04. 도망쳐야 해2022.02.12.
시야가 서서히 변한다. 검은 머리카락이, 짙은 눈썹이, 날카로운 눈매가, 높은 콧대가 혜수에게로 방향을 튼다. 혜수가 남자를 보고 있던 터라 정면으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
혜수의 눈이 왕밤만 해졌다.
‘저 남자가 왜 여기 있지?’
남자는 그때 그 남자였다. 가은인 척 선 자리에 갔을 때 제게 온갖 질문을 해댔던 그 남자. 잊을 수 없는 손으로 완벽한 심폐소생술을 하던 선생님이라는 남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내가 뭐라 그랬더라. 저 남자의 얼굴이 내 취향이 아니라고 말해줬던가. 완전히 잊고 있던 남자였다. 다시는 안 볼 사이라 생각하고 나오는 대로 지껄였었는데, 이렇게 또 만날 줄이야.
‘과거의 혜수야…… 왜 그랬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피해야 하나? 지금 몸을 돌리면 이상하게 생각하려나?’
문제는 어떻게 해야겠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남자도 혜수를 알아봤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전화하지.”
전화를 끊은 남자는 휴대폰을 쥔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았다. 길고 커다란 손은 주머니에 반쯤 걸쳐졌다. 남자가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혜수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다. 순식간에 남자는 혜수에게 다가왔다. 코 앞까지 다가와 멈춰서서는 좌우로 몇 번 목을 늘린다. 마치 영화 속에서 불량배들이 누군가를 패기 전에 흔히 하는 그 자세 말이다. 혜수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목을 움츠렸다.
“오랜만입니다.”
남자가 비뚜름한 미소를 짓는다. 웃긴 하는데 여전히 의중을 가늠할 수가 없다.
“네…… 안녕하세요.”
남자의 시선이 혜수의 머리칼을 보란 듯이 훑어내려 혜수는 더욱 몸을 움츠렸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도 펌을 못했습니까.”
“네?”
“여전히 생머리라.”
“아.”
가은은 틈이 날 때마다 미용실이며 네일 샵을 간다. 시간만 나면 방바닥과 한 몸이 되는 혜수와는 전혀 다른 여가생활을 즐긴다. 첫 만남에서 쉴 때 뭘 하냐는 질문에 최대한 가은의 시선에서 대답을 했더니 이 사달이 나버렸다. 남자의 시선이 이번에는 혜수의 손으로 내려간다.
“손톱은 깨끗하네요.”
네일아트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짧게 자르기만 한 가지런한 손톱이다. 혜수는 손끝 마디를 구부려 손바닥 안으로 감췄다.
“네, 네. 요새 조금 바빠서.”
“그렇습니까. 그래서 내 전화를 자꾸 안 받습니까?”
“네?”
이 남자가 가은이한테 계속 연락을 했던가? 그런 말은 없었는데? 갸웃하는 혜수의 머릿속에 화려한 가은의 연애사가 스쳐지나간다. 가은과 절친인 혜수는 가은의 연애사를 낱낱이 꿰고 있다. 가은이 얼마나 남자들을 자주 갈아치우는지, 몇 다리를 걸치는지, 몇 시간 만에 키스를 했는지, 과거 남친들의 매력 포인트가 뭐였는지, 또 가은이 얼마나 얼굴을 밝히는지도. 혜수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가은이도 이 남자의 사진을 늦게나마 본 게 아닐까? 그래서 차버리기엔 아까워졌나? 돌아오는 혜수의 대답이 없어도 남자는 또 묻는다.
“오늘 점심은 뭘 드셨습니까. 아까 보낸 메시지에 답이 없으셔서.”
“그게…….”
“아, 혹시 떡볶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00프로 자신 있다.
“네? 아니요. 저 떡볶이 싫어하잖아요.”
“그랬죠, 압니다.”
가은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 특이하게도 떡볶이다. 미끄덩거리는 식감에 고추 향이 섞이는 게 싫다나 뭐라나. 가은이는 떡볶이 같은 음식을 먹느니 그 시간에 술을 마시겠다는 사고의 소유자다. 그리고 이 내용 또한 첫날 이 남자를 만났을 때 말해줬던 내용이다.
“전 또. 그 사이에 떡볶이가 혹시 좋아졌나 해서요.”
보통은 싫어하는 음식이 그 짧은 시간에 좋아졌냐 묻지는 않을 텐데. 이 남자, 역시 이상하다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자가 덧붙인다.
“배가 부른데도 또 먹을 수도 있을 만큼.”
“아하하…… 그렇지는 않네요.”
“그렇군요.”
“네.”
“그래서, 제 메시지는 못 봤습니까?”
“예? 아, 아니요. 봤어요. 그런데 제가 좀 바빠서 답을 못했네요. 죄송해요.”
아, 정말. 거짓말을 하는 것이 너무 곤욕이다. 김가은, 이 기집애야. 왜 연락을 계속하는 거냐고. 나한테는 말도 안 해주고!
“그렇습니까.”
남자가 또 살짝 웃었다. 하지만 눈매는 날 선 모습 그대로라 되려 서늘하게 느껴진다. 그래, 저거다. 이 남자를 만나기 껄끄러운 가장 큰 이유. 이전 두 번의 만남에서도 그랬지만 저를 낱낱이 파헤치는 듯한 남자의 시선이 불편했다.
“가은씨.”
“네?”
“저에게 궁금한 게 여전히 없습니까?”
“네, 없는데요.”
“그럼 한 가지만 먼저 알려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를요?”
남자가 여상하게 물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혜수의 고개가 도리도리 돌아갔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겨우 세 번째로 만난데다가, 그것도 제대로 대화도 못해 본 사이인데. 격한 고갯짓에 남자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저는 말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거짓말. 거짓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네?”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의문이 서린 혜수의 눈동자에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점점 가까이 박혀온다. 남자는 멈추지 않고 혜수의 귓가에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어디 한 군데를 부러뜨려 놓고 싶을 만큼.”
“!”
뭔가 깨달은 혜수의 눈이 커질대로 커졌다.
‘설마 다 들킨 거야?’
남자는 그대로 허리를 다시 펴 혜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마치 눈앞의 고기를 어떻게 손질해 줄까 고민하는 것 같다. 등골이 서늘하다. 남자는 제 몸에 손끝 하나도 대고 있지 않은데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어떻게 알았지?’
“어, 그, 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여전히 눈알만 굴리고 있는데, 마침 저 멀리 화장실에서 나오는 승원이 보인다.
‘오빠!’
당장 승원에게 가야겠다는 생각만이 든다.
“저, 저는 바빠서 이만.”
커피 주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혜수는 몸을 돌려 승원이 있는 쪽으로 전력으로 뛰었다. 달려가며 흘끗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남자가 저를 쫓아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다. 목덜미의 털이 뾰족뾰족 솟아오른다. 이곳은 히터가 빵빵한 병원 안인데 마치 야외에 있는 것 같다. 아닌데, 오늘은 날씨도 훈훈했는데……. 기이한 느낌이다. 혜수는 멀어지는 남자를 힐끔거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대 병원 외과 68병동. 오늘은 삼일절이지만 휴일의 나른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휴일이라고 입원 환자들이 없는 것은 아닌 데다가 무엇보다 이 병원에서 가장 많은 환자 수로 유명한 이식혈관외과의 메인 병동이기 때문이다. 혜수는 스테이션으로 들어가며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식혈관 1년 차 신혜수입니다.”
“반가워요, 선생님!”
“새로 오신 1년 차 샘이구나. 잘 부탁해요.”
몇 달은 같이 부대끼게 될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모니터 앞에 앉아 병원 프로그램에 사번과 비밀번호를 넣었다.
‘내 환자들은…… 36명이네.’
담당 의사 란에는 이미 혜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마 3월 1일 자정이 되자마자 바뀌었을 것이다. 혜수는 이 환자들의 인계를 해줄 2년 차를 기다리며 차트를 읽기 시작했다.
“신혜수 선생.”
한참 모니터에 눈을 박고 집중하고 있는데 누군가 자신을 부른다. 고개를 들어보니 모니터 너머에 가운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조유민 선생님.”
혜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꾸벅했다.
“안녕하세요.”
“일찍 왔네.”
“네, 미리 차트 좀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
유민이 고개를 살짝 까딱이자 귀에 매달린 단정한 진주 귀걸이가 고급스러운 광택을 보였다. 세련된 보브컷을 한 유민은 사뿐사뿐 걸어들어와 혜수의 옆에 앉았다.
“첫 환자부터 볼까. 차트 열어 봐.”
“넵.”
혜수는 수첩과 펜을 들며 기합을 훅 불어 넣었다. 내일이 첫 회진이라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다. 한대 이식혈관외과에 대한 악명은 혜수가 인턴을 했던 선경대까지 자자했다. 이식혈관외과의 메인 교수는 자비와 용서라는 단어는 조금도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합격이 정해지자마자 이메일로 받은 인계장의 첫 장에는 첫 브리핑 때 실수를 하게 되면 앞으로의 병원 생활은 처참해질 거란 문장이 폰트 20의 붉은 궁서체로 적혀 있었다. 덕분에 혜수도 마지막 인턴 당직이 끝나고 나서 조금도 쉬지 못하고 바로 한대로 넘어왔다.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유민과 함께 환자의 차트를 들여다보았다. 유민은 외모만큼이나 우아한 몸짓과 목소리로 환자들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었다. 마지막 환자까지 모두 살펴준 뒤 유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일 봐.”
병동을 떠나려는 유민을 혜수가 붙잡았다.
“선생님. 저녁 같이 드실래요? 오늘 시간 내주신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까지 알려 줄 정도로 세세하게 봐 준 유민이 고마웠기 때문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니. 괜찮아. 내일 봐.”
하지만 유민은 단번에 거절했다. 온화하게 웃어 보인 뒤에는 바로 병동을 떠났다. 승원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연락을 해볼까 했으나 관뒀다.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은 혜수는 당직실이 모여 있는 별관으로 향했다. 병원의 2층에서 이어지는 구름다리를 따라가면 별관이 나온다. 복지가 좋은 한대 병원은 얼마 전 별관 증축 공사를 한 뒤 인턴과 레지던트들의 당직실을 새로 지어주었다. 비록 2인 1실이기는 하지만 병동의 한구석에 남는 병실을 개조해 예닐곱 명이 한방을 쓰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다. 구름다리를 지나면 복도가 나오는데 왼쪽의 문으로 들어가면 남자 숙소, 중간의 문은 여자 숙소와 이어졌고, 우측으로 이어진 복도로 더 걸어가면 교수들의 연구동이 나온다. 혜수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문으로 걸어갔다.
‘명찰을 어디 뒀더라.’
명찰을 태그해야 숙소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보안 방식이어서 명찰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여자 숙소로 들어가는 문 앞에 웬 남자가 등을 보이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짙은 색의 바지에 니트로 된 셔츠를 입고 있는 키가 커다란 남자였다. 문제는 이 남자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는 것이다. 유리문에 찰싹 달라붙어 여자 숙소의 내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 사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여자들만 쓰는 공간인 데다가 보안도 철저한 곳이라 가벼운 이너웨어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투명한 유리문이지만 저렇게 바짝 다가가 보면 안이 보일지도 모른다. 혜수는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자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 곱게 보이지는 않았기에 절로 말투가 삐딱하게 나갔다.
“저기요. 지금 뭐 하세요? 들어가야 하니까 좀 비켜주세요.”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익숙한 콧대, 턱선, 전신을 뒤덮는 그만의 분위기가 점점 드러났다.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 때쯤 남자의 온전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혜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는 그 남자였다. 어제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거짓말을 싫어한다던 그 남자.
‘세상에! 또 만났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혜수는 잽싸게 손을 들어 제 왼쪽 가슴 위에 얹었다. 가운의 왼쪽 주머니에 새겨진 석 자의 이름 ‘신혜수’를 가려야 했다. 혜수가 가은인 척을 했다는 것은 이 남자도 이미 안다. 하지만 제 진짜 신분을 노출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더군다나 이 남자는 거짓말하는 사람은 어디 한 군데 부러뜨리고 싶다고까지 말했던 이상한, 아니, 살벌한 사람이다. 어제 혜수를 쳐다보는 시선에서 느끼지 않았나. 잘못 걸렸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남자도 혜수를 알아본 듯했다.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혜수의 얼굴을 보던 서늘한 눈빛이 점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어느 순간 남자의 시선이 멈췄다.
‘뭘 보는 거야?’
남자의 눈은 제 가운의 왼팔에 새겨진 한대 병원의 마크를 보고 있었다. 순간 제대로 들었다. 피식하는 그의 웃음소리를. 그간 보아왔던 의중을 알 수 없었던 단순한 입꼬리의 올림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즐거움이 섞인 웃음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섬찟했다.
‘도, 도망칠까?’
하지만 다리 길이 차이가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게다가 체육 선생님일지도 모르는 남자다. 뛰어봤자 금방 잡힐 것 같았다. 운 좋게 도망에 성공한다고 해도 직장까지 들켰으니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어떡하지?’
치열하게 고민을 하는데 남자가 느릿하게 말한다.
“손 좀 내려보시죠.”
“네?”
“그 왼손. 좀 내려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