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그 남자를 차는 방법2022.02.09.
혜수는 벌써 L 호텔 로비 앞에 나와 있었다. 빨리 만나고 집에 들어갈 생각에 서둘렀더니 약속 시간보다 꽤 일찍 도착해버렸다.
‘으, 추워.’
겨울이라 해가 진작에 떨어지기 시작해 주위는 어둑어둑했다. 호텔을 오가는 사람들의 복장을 보는데 연말이라 그런지 다들 화려하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브랜드의 패딩, 매끄러운 털이 달린 질 좋은 코트, 번쩍번쩍한 구두들까지. 문득 제 차림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낡은 운동화에 대충 주워입고 나온 청바지. 디자인은 모르겠고 보온에만 신경을 쓴 두툼한 검은 색 오리털 패딩까지. 잠깐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던 혜수는 고개를 저었다.
‘뭐 어때. 이 차림으로 안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빨리 얘기하고 가자.’
약속한 사람이 언제 오나 목을 빼 들고 있는데 6시가 되면서 호텔 주위에 세워진 조명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지난번 그 남자를 만났을 때엔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설치했나 보다.
‘예쁘다.’
여러 색깔로 다채롭게 반짝거리는 불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저 멀리 한 사람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 계단쯤은 더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커다란 키를 가진 남자는 슈트 위에 검은 모직 코트를 걸친 채였다.
“왔다.”
그 남자였다. 오늘 혜수가 차버려야 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완벽한 이목구비가 점점 제게로 가까워진다. 화려하다고 생각했던 조명의 반짝임은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뒤로 밀려났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남자를 한 번씩은 돌아본다. 남자는 그런 시선에는 익숙해 보였다. 저를 힐끔거리는 시선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혜수와의 거리가 한 발짝 만큼 좁아지고 남자가 고개를 까딱했다. 혜수의 차림을 분명히 봤을 텐데도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가은 씨.”
“안녕하세요.”
혜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름을 모르니 불러줄 수가 없지만 어쩔 수 없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뭐.”
혜수는 빨갛게 얼어버린 볼을 한번 문지르고는 코를 훌쩍였다.
“여기 오래 있었습니까.”
“아니에요. 저도 금방 왔어요.”
“추우신 것 같은데. 들어가시죠.”
남자는 지체없이 금빛 테두리가 둘러진 유리문을 열려 했고 혜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저, 죄송한데요.”
“네.”
“제가 오늘 갑자기 선약이 생겨버려서. 거기 갔다 오느라 배가 불러서요. 식사는 못 할 것 같은데요.”
배가 부르다는 핑계를 대고 집에 가버릴 생각이었다. 헤어지기 직전에는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일 계획이다. 그런데.
“잘됐네요.”
남자가 희미하게 웃는다.
“네?”
“저도 마침 밥을 먹고 왔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다. 밥 먹자고 약속하고 만났는데 둘 다 밥을 먹고 오다니. 혜수야 거절하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지만 이 남자는 뭐란 말인가. 물론 문제가 될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잘 됐어. 덜 미안하게 됐네. 빨리 만나기 싫다 말하고 가버리자.’
이만 가보겠다는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요.”
“무슨 얘기요?”
“전에 말씀하셨지 않았습니까.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남자가 기다란 검지를 들어 호텔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코트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는다. 마치 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려는 것처럼.
“?”
저 행동을 보고 있자니 한 가지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몸살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그럼요, 다음에는 꼭.
‘!’
뭔가를 깨달은 듯한 혜수의 표정을 보고 남자는 바람 빠진 소리를 한 번 냈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뒤돌아서서 다시 유리문을 붙잡는다.
“잠시만요!”
혜수가 남자의 옷자락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고 남자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네, 이번에는 뭡니까.”
“그게. 제가 밥을 너무 많이 먹었더니. 배가 좀 아파서. 그래서…… 좀 곤란한데요.”
“이런. 오늘도 또 아프십니까.”
“네…… 죄송해요.”
“아닙니다. 가은 씨가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몸이 약한 건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저 그럼 이만 집에 가 봐도 될까요? 점점 안 좋아져서.”
혜수는 인상까지 쓰며 배를 잡고 끙끙댔다.
“그러시죠. 그럼 다음에.”
“아니, 아니요. 이제 저 그쪽 그만 만나고 싶어요. 죄송하지만.”
거절의 말에도 남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레 다음 질문을 잇는다.
“그렇습니까. 이유를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네?”
혜수는 멈칫했다. 아니, 무슨 이유를 다 물어? 꽤 자존심이 센 남자 같았다. 이렇게 잘난 몸과 얼굴을 가졌으니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를 차는 여자의 면전에 대고 직접 이유를 물을 줄이야.
‘……이 사람 질문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상한 사람이다.
‘으, 뭐라고 하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은 세게 나가야 할 타이밍이었다. 이왕이면 정이 뚝뚝 떨어지게 진상 짓을 해야겠다. 그래야 이 남자를 다시는 만나지 않을 테니까. 잠깐 고민하던 혜수는 결정을 내렸다.
“그쪽.”
검지를 들어 남자를 척, 가리켰다.
"너무나 제 취향이 아니네요. 키도, 머리 스타일도.”
손을 조금 내려 목 언저리를 가리켰다.
“목소리도. 말투도 전혀 아니네요.”
“……말투까지라.”
혜수는 마지막 카운터를 날렸다.
“무엇보다. 얼굴.”
“가은 씨.”
남자가 혜수의 말을 끊었지만 듣지 못한 척했다.
“그쪽 얼굴 저어언혀 애프터 신청이 먹힐 얼굴이 아니거든요. 모르셨죠?”
혜수가 손의 방향을 틀어 제 얼굴 앞에서 휘적휘적 흔들었다.
“그러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럼 그동안 실례 많았습니다. 전 이만 갈게요.”
좋아, 이 정도면 다시 볼 생각은 안 하겠지. 혜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잠깐만. 가은 씨, 가은 씨!”
뒤에서 저를 몇 번이나 부르는 남자의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뛰었다. 전력을 다해 달리니 찬 바람이 얼굴을 아프게 때린다. 내뱉는 숨이 턱 끝까지 올라오는데 스멀스멀 걱정도 따라 올라온다. 너무 막말을 했나 싶다.
‘화났나? 왜 자꾸 부르는 거야? 불안하게.’
혜수를 쫓아가던 남자는 코트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휴대폰 때문에 멈춰서야 했다. 이 전화벨 소리는 지인이 연락한 소리가 아니다. 정말 큰일이 없는 한 꼭 받아야 하는 전화벨 소리다. 남자는 멀어지는 혜수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네.”
-나 한승원. 바빠?
“어. 바쁘니 끊지.”
정말로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승원의 간절한 외침이 들린다.
-잠깐만! TA(자동차사고) 환자인데!
남자의 손이 종료버튼 위에서 멈칫했다.
-SMA(상장간동맥)에서 액티브 블리딩(active bleeding:활동성 출혈)이 있어.
“……그 환자가 왜 OS(정형외과)에 가 있는 거지.”
-너무 작아서 CT에서 놓쳤는데. 지금 다리 수술 중인데 바이탈(vital sign:활력징후)이 흔들려. 빨리 배를 열어야 될 것 같아.
“바이탈이 얼마길래 이 난리일까.”
-지금 마취과에서 피랑 약 때려 붓는데도 78에 56. 레이노드 환자고. 그리고 오늘 너네 당직 김석호래.
“……지금 바로 가지.”
남자는 그제서야 혜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틀었다.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윤이 나는 코트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얼마나 걸려?
“30분 정도.”
-알았어. 준비해 놓을게.
통화를 마치고 손을 내리는데 미처 꺼지지 않은 휴대폰 너머에서 승원의 외침이 비져나온다.
-집도는 주 교수님입니다! 그에 맞게 준비하세요. 30분이요.
-히익, 안돼요! 주 교수님이라뇨. 저희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
수술방 안 의료진들의 비명도 빠지지 않고 들려와 남자는 인상을 쓰며 종료 버튼을 눌렀다. 혜수는 지하철에서 내려 역 밖에 나왔다. 따뜻한 지하철 안에 있다가 찬바람을 맞아 더욱 볼이 빨개진 채다. 호텔에서 이곳으로 이동하는 사이 기온은 더 떨어져 이제는 코끝도 시리다.
‘얼른 집에 가자.’
여기서 직진을 한 다음에 좌회전을 해 조금만 올라가면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병원 한대 병원이고 우회전을 해 골목길로 들어가면 혜수가 사는 원룸이 나온다.
‘으, 배고파.’
가은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온 이후로 지금껏 굶고 다녔더니 배가 고프다. 몸도 추운데 배까지 고프니 더욱 허기가 진다.
‘뭐 좀 먹을 게 없나.’
역 근처에 늘어진 노점상을 둘러보는데 떡볶이를 파는 리어카가 보인다. 혜수는 떡볶이 특유의 달달하고 매콤한 냄새에 홀린 듯 리어카로 다가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주문을 했다.
“이모, 저 떡볶이 2인분이요.”
"금방 해줄게요, 아가씨."
곧 제 앞에 놓인 떡볶이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킨 혜수는 떡볶이 네 개를 한 번에 찍었다. 이쑤시개로 떡꼬치를 만들어 입안에 욱여넣으니 볼이 금세 불룩해진다.
‘크으, 이 맛이지.’
지금은 누가 따뜻하고 고급스러운 호텔 레스토랑 안에서 스테이크를 먹자고 해도 거절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떡볶이가 눈 앞에 있는데 뭐가 부러우랴. 정신없이 찍고 먹고 있는데 주인이 종이컵에 어묵 국물을 따라 주었다.
“아이고, 아가씨 체해요. 여기 국물 좀 마셔요.”
“으으 저마 가사하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막히던 참이다. 혜수는 한 손으로는 가슴을 팡팡 치며 다른 손으로는 주인이 건네주는 종이컵을 받아 입에 갖다 댔다. 짭쪼롬한 국물이 정말로 맛있어 눈을 바짝 접어가며 환하게 웃었다. 봄이 되었다. 찬기가 제법 가신 공기에는 달큰한 봄내음이 섞여 있었다. 길가에 늘어진 분홍빛 벚나무들 사이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한대 병원이 나온다. 병원 로비의 커다란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간 혜수는 커다란 짐가방을 양손에 들고 서서 안을 둘러보았다.
‘그새 리모델링 했다더니. 삐까뻔쩍하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병원 답게 한대 병원은 그 규모가 거대했다. 본관부터 서관, 동관, 신관에 별관까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는 건물들은 처음 이 병원에 오는 병아리 신입의 기를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진짜 크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로비 한가운데 있는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안에서 가운을 입은 키가 커다란 남자가 걸어 나온다. 혜수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뛰어갔다.
“혜수야, 위험해. 천천히.”
“승원 오빠.”
승원이 혜수의 커다란 짐 가방을 받아들었다. 혜수에게는 커다랬던 가방이 승원의 손에 들어가니 순식간에 작아졌다.
“짐이 이게 다야? 이것밖에 없어?”
“응. 일단 급한 것만 당직실에 갖다 놓으려고. 천천히 가져오지, 뭐.”
“그래도 되지. 저녁은 먹었어?”
“아니.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됐어. 근데 좀 고프네?”
“카페에서 뭐 좀 먹을까? 추운데 따뜻한 거라도 마시던가.”
“그래, 좋다.”
혜수는 승원을 따라 로비 한편에 있는 카페로 발을 옮겼다. 다들 배가 출출한 시간인지 주문을 위해 서 있는 줄이 꽤 길었다.
“여기가 우리 병원 카페 중 제일 맛있어. 적립카드도 있고.”
“오호. 꿀팁이네.”
“혜수야,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줄 서 있을래? 혹시 주문하게 되면 난 따뜻한 아메리카노.”
“응. 다녀와, 오빠.”
주문을 대기하는 줄의 맨 뒤에 서서 줄이 언제쯤 줄어들까 보던 중이었다. 혜수의 두 걸음쯤 앞에 서 있던 키가 커다란 남자가 전화가 왔는지 들고 있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귀에 갖다 댔다.
‘크다. 승원 오빠랑 키가 비슷한가?’
승원도 키가 큰 편인데 저 남자도 그쯤 되어 보였다.
‘체격도 비슷하네. 머리 스타일은 좀 많이 다르지만.’
남자의 머리카락은 승원보다 훨씬 짧았고 짙은 검은색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상대방과 통화를 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시감이 든다. 저 목소리도, 남자의 뒷모습도 왠지 처음이 아닌 것 같다.
‘어디서 들어봤는데…….’
나지막한 목소리뿐만 아니라 말투까지 너무 익숙했다. 정이라고는 단 한 방울도 느껴지지 않는 냉기가 가득한 말투.
‘어디서 들었더라…….’
남자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가 몸을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