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내게 애프터라니?2022.02.05.
모처럼의 휴일이었다. 혜수는 뜨끈한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오랜만에 웹툰이나 좀 볼까. 재밌는 게 좀 나왔나.’
간만에 찾아온 달콤한 휴식 날이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여태껏 밥도 먹지 않고 방바닥에 누워 뒹굴거리던 중이었다. 휴대폰 스크롤을 휙휙 움직이며 볼만한 작품을 고르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가은이었다.
“응, 가은아.”
-혜수야!
평소와 다르게 애교가 가득한 목소리다. 이 목소리는 뭔가 부탁할 게 있을 때만 나온다. 그날 그 선 자리에 얘 대신 나가서 무시무시한 남자를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왜, 너 어디야.”
-나 남친이랑 가평 왔지. 주말 동안 가평에 있는다 그랬잖아.
“맞다. 그랬었지. 그런데 우리 가은이. 남친이랑 놀기도 바쁠 텐데 왜 나에게 전화를 다 했을까.”
그러자 더욱 애교섞인 비음이 들려온다.
-아이잉, 우리 예쁜 혜수. 가은이가 부탁할 게 있어요.
혜수는 몇 번 욱욱거리는 소리를 낸 뒤 퉁명스레 물었다.
“뭔데, 또.”
-그때 나 대신 나갔던 자리 있잖아. 선.
가은의 부모가 강제로 만든 선 자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은은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 제주도로 여행을 간 상태였다. 하지만 약속 시간 10분 전, 나가지 않으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아버리겠다는 협박 전화가 엄마에게서 왔다. 어쩔 수 없이 가은은 마침 약속 장소 근처에서 학회에 참석 중이던 혜수에게 부탁을 했고 혜수가 좋아하는 고가의 술을 대가로 선 자리에 혜수를 내보냈다.
-그때 그 남자 말이야.
“어.”
-한 번만 더 만나주면 안 될까?
“뭐?”
혜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땡땡이 무늬의 낡은 담요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 왜? 왜?”
-애프터가 들어왔어. 밥 먹재.
“정말? 진짜로?”
-응.
혜수는 잠깐 말문을 잃었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가 적잖이 충격이었다.
“아니…… 대체 내 뭘 보고 애프터를 신청했대? 나 진짜 삽질만 하다 왔는데.”
그 남자와 한 대화라고는 100문 100답 밖에는 없었다. 그것도 엉터리 대답들만 했는데 애프터가 웬 말이냔 말이다.
-글쎄. 사람들의 취향은 다양하잖아?
“……가은아?"
-응?
"네가 지금 누울 자리 모르는구나?”
-아이잉, 혜수야, 한 번만 더 도와주라. 응?
“네가 거절하면 되잖아. 전화번호 알 거 아냐.”
-그게, 엄마 편으로 연락이 왔어. 엄마가 어찌나 좋아하던지. 내가 거절을 할 수가 없어. 꼭 나가래, 엄마가.
“…….”
-혜수야, 한 번만 더 도와주라. 응? 나 집에서 쫓겨나면 너네 집에 가서 같이 살아야 할지도 몰라.
“하아,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그 남자를 또 만나면 안 될 것 같았다. 지난번 만났을 때 묻는 말에 제대로 답변도 못 했는데 또 무슨 말을 하며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 이제는 제가 진짜 가은이 아닌 걸 들킬지도 몰랐다.
“좀 그런데…….”
곤란해하는 혜수의 말에 가은의 목소리 톤이 한층 올라갔다.
-혜수야, 우리 예쁜 신혜수. 그럼 밥은 안 먹어도 돼. 나가서 얼굴 보기만 해줘. 5분만, 아니 1분만.
“얼굴 봐서 어쩌라고?”
-이젠 만나기 싫다고 거절만 좀 해 주라. 이왕이면 정이 똑 떨어지게 하면 더 좋고.
“…….”
-그렇게까지 하면 더는 연락은 안 하겠지? 응?
“나보고 너 대신 그 남자를 차라고?”
-어, 음. 굳이 따지자면 그러네?
“…….”
-제발. 나 진짜 쫓겨나.
혜수는 잠깐 고민했다. 저를 꿰뚫어 볼 것처럼 쳐다보던 남자의 눈이 떠올랐다. 그런 남자를 제 앞에 세워두고 다시는 보지 말자 말하라고? 내가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대가는? 들어나 보자.”
-그거야 내가 섭섭지 않게 잘 준비해 둘게. 음, 돔 페리뇽 로제 한 병 더. 아니, 두 병 더. 어때? 내가 클럽에 얘기해 놓을게. 언제든 가져가.
“콜.”
지금까지의 망설임이 무색하게 혜수는 단박에 제안을 수락했다. 얼굴 한 번 잠시 팔아주고 그 비싼 술이 두 병이나 생기는 거면 남는 장사다. 남자의 무시무시했던 눈이 또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아싸, 신혜수!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하마터면 나 노숙자 될 뻔.
“그래서, 약속이 언젠데?”
-오늘 6시. L호텔 앞에서.
벽에 매달린 주황색 플라스틱 시계를 보니 벌써 4시다.
“야, 자꾸 이렇게 급하게 말할래?”
-헤헤, 미안. 이번에도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방금 전화해서 협박하잖아. 치사하게 또 집 가지고.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어.
“어휴, 내가 못 살아. 근데 그 남자 직업은 뭔데?”
지난번 아무런 정보도 없이 나가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던 터라 기본적인 것들은 알고 나가야겠다 싶었다.
-애들 가르친대.
“진짜?”
혜수의 기억 속에 그 남자는 아무리 봐도 선생님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몸을 쓰는 사람 같단 느낌을 받았었다. 예를 들면 농구나 배구 선수 같은. 완벽한 심폐소생술과 하임리히를 하는 것을 보고는 의료인인가 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었다.
‘혹시 체육 교사인가?’
“그 사람 이름은 뭔…….”
-앗, 나 오빠가 불러서 가봐야 해. 오늘도 잘 부탁해, 사랑하는 혜수야!
혜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가은의 목소리가 멀어지더니 전화는 이내 끊겼다.
‘이 화상!’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져 넣고 혜수는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던 옷을 들어 올렸다.
‘대충 입고 나가자. 호텔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빨래통에 들어있던 후드 티셔츠도 다시 꺼내 입고 오리털 패딩을 걸쳤다. 때가 군데군데 묻은 운동화에 발을 끼워 넣을 때는 조금 너무한가?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신고 가기로 했다.
‘이제 다시 안 볼 사이인데, 뭐 어때. 잘 보일 필요도 없는데.’
혜수의 머릿속엔 나가서 빠르게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뿐이었다. 날씨도 추운 데다가 황금 같은 마지막 주말 저녁을 그 남자와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혜수는 그렇게 L 호텔로 출발했다. 한대 병원.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수술실 20번 방 안. 뼈를 가르는 톱날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환자의 다리에 달라붙어 어긋난 뼈 조각들을 맞추던 승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티비알 아터리(tibial artery:경골동맥) 뛰는 게 약해졌는데.”
갈라진 근육 사이로 보이던 경골 동맥이 수술 시작 때만 해도 힘차게 펌핑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반의 반도 뛰지를 않는다. 그 말에 맞은 편에 서 있던 레지던트 4년 차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요? 전 잘 모르겠는데. 이 분 레이노드 증후군(Raynaud syndrome:혈관운동장애를 일으키는 질환) 있다면서요. 그런 사람은 원래 잘 안 뛰지 않아요?”
“기저질환을 다 떠나서 처음에는 아니었으니까 문제지.”
승원이 필드에서 고개를 들었다.
“마취과 선생님. 지금 바이탈(vital sign:활력징후)이 어떻습니까.”
“한 교수님, 안 그래도 이상하다 생각 중이었어요. 석션 통에 피가 차는 건 없는데 자꾸 BP(혈압)는 떨어지고 심박수가 올라요. 88/57, 110이요.”
수술이 시작하고 나서부터 환자에게서 나온 피를 빨아들인 통에는 바닥을 겨우 덮을 만한 정도의 피만 모여 있었다.
“승압제를 달고 있는데도 이렇습니다. 점점 떨어져요. 필드는 괜찮아요?”
“네. 토니켓(tourniquet:피가 덜나도록 사지를 압박하는 도구)을 하지 않기는 했지만 그 정도일 만한 블리딩(bleeding:출혈)은 없습니다.”
“일단 방금 헤모글로빈이랑 피검사들 나갔으니 결과 나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승원은 다시 필드로 고개를 돌렸다.
“이 환자 머리랑 복부 CT 괜찮댔지.”
“네. 괜찮았습니다.”
“누가 판독했어.”
“TA(자동차 사고) 환자라 영상 당직 교수님께 직접 가서 부탁드렸어요.”
“흠. 내가 한 번 봐야겠어. 일단 복부 CT부터 좀 띄워주세요.”
간호사가 수술방 한 편에 있는 모니터에 환자의 복부 CT를 띄웠고 승원은 그 앞으로 다가갔다.
“마우스 휠 좀 올려봐요.”
검고 하얗게 장기들을 드러낸 이미지들이 휙휙 지나가고 승원이 어느 순간 짧게 외쳤다.
“거기 잠깐만요."
승원은 더욱 모니터에 바짝 다가섰다.
“두 컷 아래. 네, 거기요.”
“뭐가 보여요? 교수님?”
“여기. SMA(상장간동맥)에 블리딩 있는데.”
“예에? 설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며 레지던트도 모니터에 달라붙었다. 무려 영상의학과 교수가 괜찮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출혈이 있다고? 한참 눈을 깜빡이며 모니터를 쳐다보던 레지던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으, 전 잘 모르겠는데요.”
“……언제는 알았고?"
한 번 레지던트를 째려본 승원은 목소리를 높였다.
“마취과 선생님. 복부에 출혈이 의심되어서요. 수술을 잠깐 멈추고 배를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될까요.”
“예에?”
모든 수술실 안 의료진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취과 의사의 곤란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 교수님, 꼭…… 그래야 해요? 지금 뒤에 응급 수술이 많이 밀려있는데. C/Sec(제왕절개)도 있고 SDH(경막하혈종)도 대기 중이에요. 멘탈(mental status:의식상태) 떨어진다는데.”
마취과 의사가 보란 듯이 당직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경외과 레지던트가 수술실을 빨리 열어달라고 독촉 전화를 줄기차게 해대는 중이었다.
“지금 이 사람 BP 떨어지는 게 SMA 블리딩 때문인 것 같아요. 정말이라면 그게 더 급합니다.”
“하지만 꽝이면 시간만 낭비하는 건데요. 영상에서 괜찮다고 했다면서요. 제가 CT를 봐도 별문제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럼 배를 열진 않을게요. 이 포들만 좀 치워서 배를 육안으로 보기만 할게요. 소독을 다시 하는 건 금방이잖아요."
“그게…”
망설이는 마취과 의사에게 승원은 쐐기를 박았다.
“바이탈 보면 분명 어딘가 피가 나는 것 아닙니까. 의심이 되니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승원의 말에 한치의 반박할 거리도 없었기에 마취과 의사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승원은 수술하던 다리를 소독액이 묻은 누런 랩으로 감싼 뒤 손짓했다.
“벗겨 봐.”
환자 위에 올라가 있던 모든 푸른 천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환자가 입고 있던 환자복 상의도 벗겨낸 순간. 레지던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환자의 배가 볼록 부풀어 있었다.
“교수님, 이 사람 배가 원래 이렇게 나왔었나요?”
“너 4년 차 맞아? 이게 다 블리딩이지. 그사이에 이렇게 살이 쪘겠냐."
승원의 말에 수술방에 탄식이 이어졌다. 역시나 한승원, 저걸 잡아내다니. 대단하다는 경탄에 더해 오늘 수술도 쉽게 끝나지 않겠다는 한탄이 더해진 호흡들이었다.
“마취과 선생님. 배 열어야겠습니다. 더 확인해 볼 것도 없네요.”
“……네. 저희도 준비하겠습니다.”
갑작스레 추가된 수술 준비로 주변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GS(일반외과) 당직 스텝 누구야.”
“잠시만요.”
레지던트가 수술방 벽 한쪽에 붙어있는 당직표를 훑었다.
“오늘…… 펠로우 쌤이 당직이시네요. GES(위장관외과) 김석호.”
“김석호?”
승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김석호라면 곰손으로 유명한 사람 아닌가. 위전절제술을 하는데 무려 5시간이 걸리며 수혈까지 해야 한다는 김석호.
“김석호 쌤한테…… 전화해요?”
“아니, 아니지. 잠깐만 기다려 봐.”
이 환자의 배가 부푼 모양을 보니 심상치 않다. 배를 가르고 뱃속에 차 들어 있던 피가 빠져나오는 순간 환자의 혈압은 미친 듯이 떨어질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따라서 그 누구보다 정확한 손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피로 범벅이 된 뱃속을 헤집은 뒤 터진 혈관을 찾아내 빠르게 꿰매야 하니까. 그리고 그런 실력을 가진 사람이…… 이 병원에 딱 한 명 있다. 순식간에 고민을 끝낸 승원은 피 묻은 장갑을 벗어버리고 직접 수술방의 유선 전화기를 잡았다. 외부 연결 버튼을 누른 뒤 숫자 패드를 눌렀다. 잠깐의 통화 연결음 끝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나 한승원. 바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