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대환장 맞선2022.02.02.
“취미는 뭡니까.”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해서…….”
아! 아차 싶다. 거짓말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클럽에 가서 춤추는 걸 좋아한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잖아.
‘어쩌지?’
순간 맞은편 벽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멋들어지게 적어 내린 붓글씨다. 5성급 호텔답게 두툼한 고목 액자도 그렇고 글씨 자체도 꽤 값어치 있어 보인다.
“……서예를 해요.”
“아. 몸으로 서예를.”
“손도 몸이니까요. 호호.”
“그럼 특기는?”
“그것도 서예예요.”
물론 거짓말이다. 실제 이 대답의 주인공의 특기 또한 술을 마시고 뻗는 것이다.
“혈액형은 뭡니까.”
“오…… 오형?”
얘가 혈액형이 뭐더라. 오형이 맞나? 아, 몰라. 대충해. 이 남자가 병원에 날 데려가서 검사해 볼 것도 아니고.
“형제자매는 어떻게 됩니까.”
이건 자신 있다.
“언니가 한 명 더 있어요.”
동생과 마찬가지로 술을 물처럼 마시는 언니.
“몇 살 차이입니까.”
‘뭘 이런 걸 다 물어봐?’
이상한 남자다. 생긴 것과 다르게 이상한 말들만 한다. 그래도 아는 대로 답 해 주었다.
“3살 차이요.”
“청소년기 때 장래희망은 뭐였습니까.”
이건 전혀 예상한 질문이 아니었다. 물론 답을 들어본 적도 없다. 머리가 팽팽 굴러간다. 김가은의 장래희망? 얘가 장래희망이 있는 애였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을 것 같은데. 에라이, 모르겠다. 아무거나 대자. 어차피 또 만날 사이도 아닌데 뭘 대든 상관없을 것이다.
“현모양처요.”
무심하게 닫혀 있던 남자의 잘생긴 입꼬리가 순간 비틀렸다. 희미하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지만 앞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전달되지는 못했다.
“지금은 전혀 다른 걸 하고 계시는군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여자는 애써 도도하게 웃어 보였다.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 김가은은 청담동에서 고급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술을 파는 양 보다는 스스로 놀고 마시는 양이 더 많은 클럽.
“좋아하는 색깔은 뭡니까.”
이쯤 되니 스무고개인가 싶다.
“빨……빨간색?”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니 빨간색이겠지, 뭐.
“싫어하는 색깔은요.”
“회색?”
이건 확실하다. 가은의 옷은 늘 화려하다. 핑크색, 노란색, 연두색 등 꽃밭처럼 알록달록한 옷만 입고 다닌다. 쨍한 색깔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나 뭐라나.
‘취조당하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거람.’
곤욕이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언제 끝나는 거냐고. 답을 둘러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슬슬 한계가 다가온다. 하지만 이후로도 남자의 질문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어릴 적 친구들과 해보던 100문 100답 같다. 폭격 같은 질문들이 지나가고 잠시 대화가 끊겼다.
‘하아. 끝인가.’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빼며 푹신한 쿠션이 놓인 의자에 기대앉는데 문득 남자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손이 참 예쁘네.’
남자의 양쪽 손은 완벽히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커다란 체격만큼 큰 손이기는 하지만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몸과는 다르게 대리석을 조각한 것처럼 매끈하고 아름답다.
“그럼 가은 씨는, 저에게 궁금한 것 없으십니까?”
여자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없어요.”
조금의 고민도 없이 튀어나오는 대답에 남자의 입꼬리가 또 비틀렸다. 이번에는 픽 하는 소리가 제대로 들려왔다.
‘저 남자, 지금 비웃은 거야?‘
“알겠습니다.”
남자는 손깍지를 풀고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몇 번 두드렸다.
“오늘 해 주신 대답을 종합해 보면. 취미와 특기는 서예에 어릴 적 장래희망은 현모양처였고. 지금은 클럽을 운영 중. 좋아하는 색은 빨간색에 싫어하는 색은 회색이지만, 소지품은 전부 무채색이고.”
남자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여자의 핸드백이며 휴대폰, 차 키를 지나 여자에게로 옮아갔다. 허리부터 천천히 여자의 몸을 훑어 위로 올라간다. 날카로운 시선에 꿀꺽, 침이 넘어간다.
“펌을 한 달마다 하지만 지금은 생머리. 시력이 안 좋아 렌즈를 끼지만 지금은 맨눈. 한강에 자주 걸어 다니면서 산책을 하지만 집은 도봉구라는 겁니까.”
“그, 그럴 수도 있죠!”
여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이곳에 저를 다짜고짜 내보낸 가은을 원망했다. 얼굴만 비추면 된다고 했잖아. 이런 질의응답 시간을 가질 거라곤 말 안 했잖아! 그래도 조금만 더 버텨보기로 했다. 보아하니 이제 물어볼 것도 다 떨어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참으면 돔 페리뇽 로제가 손에 쥐어질 테니.
“그렇습니까.”
남자가 슈트의 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손에 쥐어진 것을 테이블 위에 탁, 올려놨는데 푸른 물빛의 야외 수영장이 그려진 플라스틱 카드였다.
‘이게…… 뭐야?’
일반적인 호텔 수영장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VIP 회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수영장의 모습이었지만, 여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여기 피트니스 회원 카드입니다. 올라가죠.”
“네?”
“수영장이요. 어제 그렇게 문자를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기대하고 있겠다고.”
“제, 제가요?”
절로 눈이 커지고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럼 누굽니까. 중요한 문제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다. 가은이는 얼굴뿐만 아니라 바디 사이즈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애다. 어깨의 넓이, 흉근의 두께, 이두와 삼두의 갈라짐 등 원하는 것이 디테일한 애다.
‘김가은, 이 미친 기집애! 나더러 처음 보는 남자랑 손바닥만 한 옷을 입고 수영장에 가라고?’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남자와 헤어지고 나면 당장 가은이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생각했다.
“올라가시죠.”
“잠깐만요.”
여자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의 슈트 자락을 억세게 쥐었다.
“뭡니까.”
“저…… 제가 지금 몸이 좀 많이 안 좋거든요? 그러니까 다음에 가요.”
“다음에는 되는 겁니까?”
비꼬는 게 분명한 어조였다. 밥을 먹고 질문을 하던 내내 들어온 건조한 말투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그 말투는 여자의 인내심을 한계 끝까지 긁어내렸다.
“그럼요. 당연하죠. 다음을 기대해주세요.”
물론 다음은 없다. 우리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이니까. 그래서 더욱 당당하게 소리쳤고 한술 더 떠 혀로 입술을 티 나게 한번 훑었다. 반짝이는 입술에 남자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떠난다.
“저도 많이 기대했었거든요. 오늘 몸살만 걸리지 않았어도.”
"정말입니까."
"그럼요. 아쉽네요. 계속 기대하고 있을게요. 다음에 뵐 때까지."
“……얼마든지.”
“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
우뚝 서 있는 남자를 그대로 둔 채 테이블에서 바삐 걸어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쿵, 하고 묵직한 게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멈춰선 채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곧 소리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여자가 앉아 있던 바로 건너편 테이블 앞에 한 노인이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쓰러져 있었다. 노인의 주위에는 테이블에서 떨어진 접시가 와그작 깨져 있었고, 원래라면 접시에 담겨 있었을 과일과 떡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붉은 피부였던 듯한 하얗게 센 머리의 노인은 지금은 붉은색을 넘어서서 검푸른 빛의 얼굴색을 띠고 있었다.
“헉!"
여자는 앞뒤 잴 것 없이 노인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세요?”
아무리 흔들고 불러도 답은 없었다. 노인은 정신을 완전히 잃은 채였다. 끙끙대며 노인을 바로 눕힌 여자는 코밑에 검지와 중지를 겹쳐 갖다 댔다. 1초. 2초…… 5초. 몸 속 어딘가 꽉 막히기라도 한 건지 느껴져야 할 공기의 흐름이 전혀 잡히지 않는다.
‘숨을 안 쉬어.’
맥박은 더더욱 뛰지 않았다. 여자는 노인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두꺼운 패딩의 지퍼를 열고 니트 조끼 또한 끌어내렸다. 그 와중에도 노인의 얼굴은 점점 시꺼메져 갔다.
‘어서 흉부 압박을 해야 해.’
가슴을 최대한 노출한 후 양 무릎을 단단한 타일 바닥 위에 고정했다.
‘빨리, 빨리.’
손을 겹쳐 환자의 가슴에 얹고 흉부 압박을 하려고 자세를 잡는 그때. 여자의 손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뭐야?’
한시가 급한데, 지체할 틈이 없는데. 누가 방해를 한단 말인가. 홱 돌아보니 제 앞에 날이 서게 잘 다려진 슈트 바지가 우뚝 서 있다. 긴 기럭지를 한참 쫓아 올라가 보니 보이는 얼굴은 조금 전까지 제가 가은을 대신해 선을 본 그 남자다. 뜻 모를 방해에 여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요?”
“주위 안 보입니까.”
“뭐요?”
남자가 가리킨 손을 따라가니 나뒹구는 음식들이 보인다.
“떡 드셨죠?”
남자가 노인의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다.
“네, 네. 맞아요.”
대답을 들은 남자의 시선이 다시 여자에게로 돌아온다.
“그럼 뭐겠습니까.”
“……기도 폐색?”
“알면 도와요.”
남자는 노인을 일으켰다. 노인 또한 체격이 퉁퉁했지만 남자는 가벼운 것이라도 드는 것처럼 손쉽게 제 왼팔에 노인을 기대게 했다.
“아! 맞다!”
여자의 외침에 이번에는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또 뭡니까.”
“119요. 119를 불러야 해요. 제세동기가 필요한데.”
“이미 불렀습니다.”
남자의 발치에는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과 언제 벗은 건지 남자의 슈트 상의가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여자가 환자의 호흡을 확인하는 사이 전화를 한 모양이다.
‘제일 중요한 건데.’
외우고 또 외운 순서였지만 잊었다. 호흡과 맥박이 없는 환자를 만나면 제일 먼저 119를 부르고 제세동기를 요청해야 한다는 것을. 실제로 눈앞에서 쓰러지는 환자를 본 것은 처음이라는 것이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남자는 노인을 제 앞에 세워두고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런 뒤에는 양손을 겹쳐 가슴 아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노인의 앞에 가서 노인의 양어깨를 손으로 받쳐 노인이 앞으로 쓰러지지 않게 했다. 그런데, 남자의 자세가 심상치 않다.
‘이 사람 뭐야? 하임리히(기도에 음식물이 걸렸을 때 하는 응급처치법)를 아네? 그것도 제대로잖아.’
남자는 교과서에나 볼 만한 정석적인 자세로 노인의 몸을 두 손을 굳게 모아 압박했다. 언제 와이셔츠를 걷어 올린 건지 팔에는 힘을 줄 때마다 근육이 잘게 갈라졌다. 그런데, 왼팔의 근육이 더 강하게 수축한다. 비대칭인 것이 확연히 눈에 보여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로 힘줄이 불거졌을 때, 노인의 입에서는 톡, 하고 떡 한 조각이 튀어나왔다.
“오오!”
“세상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탄성이 나온다. 떡이 나오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쉬지 않고 노인을 땅에 눕혔다. 그러고는 다시 양손을 겹쳐 흉부 압박을 하기 시작했다. 무릎을 단단히 땅에 고정하고 어깨가 아닌 고관절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분당 100회의 압박. 그 자세와 속도 또한 완벽하여 마치 응급구조에 관한 동영상 강의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왼팔의 근육이 더 강하게 수축한다.
‘이 남자 혹시 의료인인가?’
여자도 남자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었다. 까슬한 대리석 바닥의 차가움이 얇은 스타킹을 뚫고 들어온다.
“이제 제가 할게요. 쉬세요.”
아무리 건장한 체격의 남자라도 제세동기가 오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 심폐소생술을 하기에는 벅차다. 시간이 갈수록 정확도가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이 노인은 더 큰 후유증을 앓게 될 것이다.
“할 줄 압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걸 아는지 남자도 두말없이 손을 뗐고 여자는 지체없이 노인의 가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자세 또한 훌륭했다. 처음 판단을 잘못하기는 했지만 그것 빼고는 전부 흠잡을 데 없다. 그렇게 둘은 교대로 흉부 압박을 했다. 남자가 흉부 압박을 할 때에 여자는 쉬지 않고 노인의 턱을 잡고 기도를 열어줬다.
‘자세가 그럴 듯한데. 이 여자 혹시 의료인인가?’
처음 만난 사이치고는 합이 꽤 잘 맞다는 생각이 들 무렵.
“커헉.”
마침내 노인이 갇혀 있던 숨을 내뱉었다. 몇 번 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 뒤에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아이고, 남철이 아버지. 정신이 좀 드시오?”
노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노인에게 달라붙어 팔이며 다리를 주물렀다. 검푸르다 못해 흑색이었던 피부색은 서서히 돌아와 어느새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그들의 주위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또다시 환호성을 내질렀다.
“대단하다!”
“멋져요!”
그때 호텔 직원들이 인파를 헤치고 제세동기를 가져왔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여기 요청하셨던 제세동기…… 엇, 눈 뜨셨네요?”
“네. 119도 불렀으니 구조대원들 도착하면 병원으로 이송하면 됩니다.”
남자는 손으로 무릎을 두어 번 탁탁 턴 뒤 바닥에 놓인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커다랗게 구멍이 세 개나 난 검은 스타킹에 감싸진 무릎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지 않아 구멍 난 스타킹의 주인공을 알아챘다. 지금까지 심폐소생술을 같이하던 여자다. 심폐소생술은 꽤 격한 몸짓이니 바닥에 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여자가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자세히 보니 한쪽 하이힐 굽이 부러져 있다.
‘…….’
저렇게는 내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는 여자가 서 있는 곳으로 팔을 뻗었다. 여자의 손목을 잡아채기 직전.
“고객님. 연락처라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호텔의 지배인이 남자를 붙잡은 탓에 간발의 차로 여자를 잡지 못했다. 남자는 인상을 쓰며 지배인의 손을 뿌리쳤다.
“왭니까.”
“호텔 차원에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저 혼자 한 것도 아니고.”
짜증이 확연히 묻어나는 말투였지만 새로 발령받은 초짜 지배인은 끈질겼다. 몇 번 더 달라붙는 지배인의 손길을 모른 체하고 남자는 다시 뒤돌아섰다. 그새 더 모인 인파를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내고는 그 사이로 걸어갔다. 눈으로는 조금 전까지 흉부 압박을 같이하던, 꽤 쓸만하다 생각했던 여자를 찾았다. 하지만 여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