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깜짝이야.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처럼. 제목을 본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만약 내가 아니었더라면. 어? 재밌는 제목이네요? 하고 넘겼을 수도 있겠지만.
인생 2회차를 살아가는 배우 차서준에게 있어. ‘탑스타 어게인’이라는 제목은 마주한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셈이다.
사락사락.
옆에선 이미 조용히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려주는 서도현이 보인다. 조금 진정한 뒤 나도 천천히 시나리오를 읽었다.
[탑스타 어게인]
최고의 재능으로 너무나도 빠르게 정상에 오른 바람에 구설수가 많은 스타 주인공. 우연한 사고로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게 되고.
갑작스러운 사고의 순간. 그동안 자신이 잘못했던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던 과거들이 떠오르고. 정신을 차리니 모든 일들이 꼬이기 시작한 시점에 눈을 떴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과거의 자신이 했던 잘못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진정한 탑스타가 되어간다는 이야기였다.
꽤나 흔한 스토리였다. 과거로 돌아오거나,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하여 풀어나가는 영화들은 제법 있었으니까.
다만, 이 시나리오 안에 담긴 주인공을 배우 차서준에 대입해보면 꽤나 매력적인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농담처럼 인생 2회차를 살고 있는 거 아니냐는 농담을 듣는 나였으니까.
거기에 하나 더.
주우정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인. 인물의 감정선 흐름이 주인공에게 집중적으로 조명된 덕분에 더욱더 매력적인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어때? 어떠십니까?”
나와 서도현이 시나리오를 다 읽고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우정 감독이 묻는다. 마친 중대 발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음.”
서도현이 살짝 침음을 흘리자. 주우정 감독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혹시나 ‘꽤나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다만 저희 서준이가 하기에는 좀···.’ 이런 말이라도 나오기라도 하는 순간.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준비한 자신의 노력이 흔들리게 되는 셈이니.
작품 보는 눈 하나는 업계 최고라고 평가받는 서도현이기에 주우정 감독의 눈에 긴장이 엿보였다.
하지만.
“정말 좋았습니다. 다 읽고 나니 확실히 알겠더군요. 왜 감독님께서 서준이를 주인공으로 쓰셨다는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건 서준이를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도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별로다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좋았다는 것. 이어서 나를 위한 맞춤 정장이라는 말까지 곁들인다.
배우 차서준을 어릴 때부터 지켜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하게 되는 생각을 담은 영화. 그것이 ‘탑스타 어게인’인 셈이었으니까.
“서준이 넌?”
당연히 서도현의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왔으니. 다음 차례는 주인공이 될 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주우정 감독의 물음에 답변도 못 할 정도로 꽤나 놀란 상태였다.
비슷했다. 정확하게 하나하나 따져놓고 보자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어? 뭐지? 뭔가 알고 있나?’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과거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 그로 인한 새롭게 시작한 삶에서는 그런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까지.
다르면서도 묘하게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더 나를 위한 영화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엄청 재밌었어요. 왜 감독님이 몇 년 동안 준비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어요. 읽는 순간 알겠더라고요. 아, 이건 나를 위한 영화구나. 역시 감독님은 최고예요.”
내 말에 주우정 감독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의 장점인 감정의 흐름이 정말 잘 녹아 완벽한 한 편의 서사를 만들어냈다.
이걸 완성하기까지 주우정 감독이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을 정도. 이걸 읽고서 어떻게 극찬을 아끼지 않을 수 있겠어.
“그래? 서준이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옆에서 지켜본 느낌을 담았거든. 아마 전부터 배우 차서준을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떠올려 본 생각일걸?”
아마 그럴지도.
6살의 어린 나이에 아역 배우로 데뷔. 이후 미친 연기력과 함께 말도 안 되는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며 할리우드까지 진출.
그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건. 그런 엄청난 성공을 쌓아가면서도 인성 관련 잡음이 단 하나도 터지지 않았다는 거다.
서도현 역시 비슷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는지. 관련 썰들을 푼다.
“맞습니다. 감독님들이나 PD님들과 술자리를 하다 보면 이런 농담을 들을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농담이요?”
“서준이를 보면 꼭 한 번 정상에 올랐던 탑스타가 돌아와서. 인생 2회차 살아가는 것 같다. 이런 농담들을 가끔씩 듣게 되더군요.”
시나리오부터 시작해서. 자꾸만 깜짝깜짝 놀랄 만한 말들이 서도현과 주우정 감독의 입에서 나왔다.
어쨌거나.
분위기는 좋았다.
시나리오는 그보다 더 끝내줬고.
화려한 액션 영화나, 최신 CG 기술이 들어가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배우 차서준에게 있어. 당장이라도 촬영을 시작하고 싶게끔 만드는 매력적인 시나리오였다.
무엇보다.
“저 이거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그 어떤 배우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
새해가 밝았다.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배우 차서준의 차기작이 결정되었고, 또 김도윤과 함께 찍은 넷티비 드라마 ‘학교 생존’이 1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뭐? 차기작 결정이 되었다고?”
“네. 아직 아무도 몰라요. 형들에게 가장 먼저 말하는 거예요.”
“아이고. 나랑 같이 하자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끝내주는 거 들어올 텐데.”
아쉬운 감정을 듬뿍 담은 채 안타까워하는 김정범. 그리고 잘됐다며 축하하는 김우승까지.
새해가 밝았음에도 형들과 나는 변한 게 없었다.
“시나리오 볼 수 있을까?”
차기작이 결정되었다는 말에 시나리오부터 보고 싶다는 박우형.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한결같은 형들이었다.
“안 그래도 우형이 형이 보고 싶다고 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요.”
다른 모임도 아닌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들의 모임인 연사모였다. 특히나 연기에 진심인 박우형이 있는.
당연히 아지트에 오는데. 그것도 차기작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는데 시나리오도 챙겨와야지.
그리고.
“응?”
“어?”
시나리오 제목을 확인한 형들의 고개가 갸웃한다. 마치 내가 처음 봤을 때 보였던 반응과 판박이였다.
누구보다 배우 차서준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봐 온 형들이기에 나온 반응인 셈.
“어때요? 제목 잘 뽑힌 거 같지 않아요?”
“이거 주 감독님이 쓴 거라고 했지?”
“네.”
“몇 년 동안 서준이 널 주인공으로 대본을 쓴다고 하시더니만. 진짜 널 위한 제목을 만들어오셨네.”
김정범이 ‘탑스타 어게인’이라는 제목을 보더니 낄낄 웃는다. 아직 내용은 확인도 안 했으면서.
한 명씩 보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회사에서 이미 3부로 만들어 온 참이었다.
한동안 시나리오를 넘기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이야, 이거 완전 서준이의, 서준이에 의한, 서준이를 위한 대본이네.”
“사실 우리도 쟤를 볼 때마다 어? 설마? 혹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잖아. 주 감독님이 그걸 정확하게 캐치해서 담았어. 역시 주 감독님이네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감정도 좋고.”
“인정.”
형들이 만족스럽다는 미소와 함께 날 보며 말했다.
아마 서도현을 제외하면 차서준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깊은 친분을 유지한 사람들이 박우형, 김정범, 김우승이었으니.
누구보다 재밌게 시나리오를 읽을 수밖에.
“역시 주우정 감독님이 매 작품마다 해외 시상식에 초청받는 이유가 있어. 작중 진행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감정선이 너무나도 좋다. 이거 서준이가 아니라면 소화할 수 있으려나? 이런 생각도 들 텐데. 주인공을 또 서준이로 잡고 시작하니 완전 맞춤 정장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야.”
박우형은 특히나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탐이 난다거나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그저 날 위한 최고의 작품이 탄생한 것을 축하해 주는 표정일 뿐.
“그래서 이거 촬영 시작은 언제부터 하려고?”
“아마 날이 풀리고 봄부터 시작할 것 같아요. 배경이 봄이잖아요.”
“마침 잘됐다.”
잘 되다니?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박우형을 바라보자. 왜 언제 촬영 시작인지를 물었는지 설명해 준다.
“여기 보면 카메오 캐릭터들이 많잖아. 잠깐이겠지만 우정출연하려고. 여기 이 캐릭터가 재밌겠네.”
“네?”
뭐라고? 안 그래도 박우형도 차기작이 결정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은 들은 참이었다.
여름 끝쯤에 크랭크인을 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마침 그보다 앞서 내가 봄부터 촬영 시작을 한다고 하자. 우정출연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어? 그러면 나도나도. 이거 완전 서준이를 위한 영화인데. 당연히 형들이 도와줘야지.”
“나도?”
“당연한 거 아니야? 안 하려고 했어?”
“응? 아니. 나는 조금 있다가 그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지. 나보다 앞서서 형들이 말할 줄 알았나.”
감동이었다. 나를 위해 카메오로 우정출연 하겠다는 형들의 말은.
“형들.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제가 다 살게요.”
*
사실 연사모 형들에서 끝인 줄 알았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저 바다 건너에서 들을 수 있었다.
- 우형에게 들었는데. 준의 차기작이 결정되었다면서?
“응? 벌써 들었어요? 안 그래도 데이븐에게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 섭섭해. 아무리 한국과 미국이 멀리 떨어져 있다지만. 우리의 우정은 거리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했는데.
“데이븐. 시차를 생각해야죠. 안 그래도 지금쯤 저녁 운동을 끝내고 돌아왔을 거 같아서 연락한 거예요. 그 소식도 알려줄 겸.”
연사모 미국 지부라고 불리는 데이븐에게 차기작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박우형과 이미 통화를 한 모양이었다.
“맞다. 저번에 2월쯤에 한국 놀러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아직 학생 신분이라 학교에 다녀야 해서. 저 먼 미국까지는 자주 놀러 갈 수가 없었다.
데이븐과 가르시아 알렌이 휴식기에 맞춰 한국에 놀러 와 일주일씩 머물다 가곤 했었다.
새해가 밝았으니. 둘이서 시간 맞춰서 2월에 한번 놀러 오겠다고 했었는데.
- 그러려고 했는데. 준의 차기작 소식을 듣고 나서 일정에 변동이 생겼어.
“네?”
- 우형에게 들었는데. 차기작 제목이 탑스타 어게인이라면서? 그것도 감독이 준을 옆에서 몇 년 동안 지켜보면서 완성한 대본이고. 그걸 듣는 순간. 아, 이건 완전 준을 위한 영화겠구나 이 생각부터 들었다니까.
대체 저것과 2월 놀러 오는 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어질 데이븐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 들려온 데이븐의 이어지는 말은 나조차 깜짝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 그래서 나랑 가르시아도 카메오로 출연하려고.
“네? 데이븐이랑 가르시아가요?”
- 당연하지. 이미 다들 우정출연을 하겠다고 결정했다면서. 연사모인 우리 둘이 빠져서 되겠어? 마침 둘 다 휴식기니 상황도 얼마나 좋아. 이건 운명이라고.
할리우드 탑급 스타인 데이븐과 가르시아 알렌의 카메오 우정출연이라.
저번에 두 사람이 각각 영화를 찍으면서 받았던 출연료를 생각해 본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결정이라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고마워요, 데이븐.”
나를 생각하는 데이븐의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
배우 차서준의 차기작 ‘탑스타 어게인’. 그 영화의 황금 라인업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아직 제작사도 안 정해졌는데. 아마 이 소식이 알려지면, 진짜 너도나도 돈을 들고서 앞다투어 달려올지도.
[지금 차 배우 차기작 소식이 떠돌고 있음!]
예전에 우리 차 배우가 정체 가리고 버스킹 했었던 시절 기억 남?
진짜 오래된 찐팬들이라면 그 영상들을 몇 번이나 봤을 거라고 생각해.
그때 찍었던 영화가 바로 주우정 감독의 ‘목소리’였지. 해외에서 우리 차 배우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고.
사설이 길었네.
지금 떠도는 소문이 하나 있는데. 그 주우정 감독이 오랫동안 차 배우와 다시 한번 작업하기 위해 준비한 작품이 있다고 함.
그 시나리오가 최근 완성되었는데. 차 배우도 진짜 마음에 든다고 차기작으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있음.
└ ㄹㅇ? 우리 차 배우 차기작은 할리우드에서 할 줄 알았는데. 주우정 감독이랑 다시 뭉친다고? 그러면 10년 만에 재결합이네?
└ ㄷㄷ 차 배우 의리 보소. 내가 알기론 이번 넷티비 드라마가 또다시 초대박이 나면서 러브콜 쏟아진다고 들었는데. 주 감독이랑 했던 약속 지키는 거네? ㄷㄷㄷ
└ 사실 영화 목소리도 완전 차 배우 맞춤 영화라서 몇 번이나 다시 봤는데. 주우정 감독 특유의 그 감정선이 너무나도 좋음. 이번 재결합 너무 기대된다. ㅎㅎ
└ 이번에도 완전 차 배우를 위한 영화라는 썰이 있음. 관계자들 이야기가 저번에 찍지 못한 마침표를 이번에 찍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
└ 기대되네요. 몇 년 전에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라이프로 말도 안 되는 상들을 다 받았었는데. 이번에 주우정 감독의 영화로 다시 한번 기적을 쓸 수 있을까요?
배우 차서준의 차기작 소식이 알려짐과 동시에 시끌시끌해질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제목이 뭐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