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드디어 그날의 아침이 밝았다.
하준이, 하윤이가 일 년 중에서도 손꼽아 기다리는 날.
“형아. 일어났어?”
“오빠. 일어났어?”
워낙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인지라. 하준이, 하윤이가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난 모양이었다.
혹시나 내가 아직 자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지. 방문 밖에서 조용히 나를 부른다.
사실 거실에서 소곤소곤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를 듣긴 했는데. 일부러 기다렸다.
“일어났어. 들어와도 돼.”
“정말?”
“들어간다?”
내가 들어오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생들이 방문을 열고 우다다 뛰어 들어온다. 그다음 침대 위로 올라와 나를 와락 안아주는 하준이, 하윤이.
방을 나서지 않고 기다린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형아! 메리 크리스마스!”
“오빠!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 하준이, 하윤이도 메리 크리스마스.”
하준이, 하윤이가 애타게 기다렸던 오늘은 바로 크리스마스였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준다는 크리스마스.
이제 세상에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된 하준이, 하윤이었지만. 그보다 더 좋은 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형아. 나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 거실 트리 아래에 선물 박스 있는 거 봤어.”
“나도나도. 너무 궁금한데. 오빠가 일어날 때까지 작은 오빠랑 조용히 기다리려고 했어.”
“그런데 너무 궁금해서. 혹시나 형아가 일어났는지 살짝 물어본 거야.”
어제 10시가 되기 전에 코오 잠이든 동생들을 본 다음. 열심히 만든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 선물 박스들을 놓아두었다.
아마 하준이, 하윤이가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지자마자 거실로 나온 뒤. 선물 박스를 보고 신이 나서 내 방 앞으로 달려온 것이다.
“형아. 빨리 거실로 나가야 돼.”
“맞아. 오빠 빨리 거실로 나가자.”
결국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양손에 하준이, 하윤이의 손을 잡은 채 거실로 나와야만 했다.
응? 어제 내가 선물을 놓을 때까지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트리 아래에 놓여있었다.
깜짝 놀라는 내 반응에 웃음을 터트리며. 하준이, 하윤이가 짜잔 하면서 준비한 선물을 소개한다.
“형아. 내가 형아를 위해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준비했어.”
“나도! 오빠를 위한 선물로 뭘 준비할까 하다가. 작은오빠랑 편지를 쓰기로 했어.”
이런. 잠이 확 깨는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사실 돈으로 살 수 있는 선물 같은 것보다, 하준이, 하윤이가 손으로 쓴 편지가 더 감동적이었으니까.
심지어 한두 장이 아니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무려 10장이 넘는 편지를 쓴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건?”
편지 봉투 안에는 소원권이라 적힌 깜짝 선물들이 들어 있었다.
“어깨 주물러주기? 발 주물러주기? 안아주기?”
“응! 오빠가 그 소원권을 쓰면. 내가 자다가도 일어나서 해줄 거야.”
“맞아. 언제든지 나랑 하윤이에게 원하는 소원 있으면 그걸 주면 돼.”
감동이었다. 몇백, 몇천만 원 상당의 선물들보다. 하준이, 하윤이의 마음이 담긴 이 선물이 더 마음을 울렸다.
“고마워. 그러면 내가 준비한 선물을 확인해 볼까?”
“응!”
“좋아!”
아직 안방에서 엄마, 아빠가 주무시기에. 하준이, 하윤이가 조용히 팔짝 뛰었다.
가장 먼저 선물을 확인한 건 하준이었다.
“형아! 이거 진짜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그러엄. 하준이가 가지고 싶어 했던 거 맞지?”
“응! 너무 고마워. 나 너무 행복해!”
하준이가 선물 박스를 열다가 기쁨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뭐가 들어 있었냐고? 하준이가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최신형 컴퓨터.
딱히 게임 같은 건 많이 하지 않지만. 멍이 영상 편집에 재미를 붙인 하준이가 더 좋은 컴퓨터가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다.
“오빠 최고야! 고마워!”
그 옆에서 자기 선물을 뜯던 하윤이 역시 우다다 달려와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오빠가 이거 선물해 줬으니까. 나도 열심히 연습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거야!”
하윤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은 기타였다. 소리도 좋고, 여자아이들이 제법 좋아할 만한 디자인의 것으로 골랐다.
버스킹이야 언제나 큰오빠와 같이 가는 게 최고라고 말하는 하윤이었지만. 가수라는 확고한 꿈이 생긴 이상 기타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했었다.
내가 크리스마스로 하윤이 선물로 준비한 건 단순히 기타가 끝이 아니었다.
“하윤아. 오늘부터 오빠가 기타를 가르쳐줄 거야. 열심히 배울 수 있지?”
“응! 나 진짜 오빠한테 열심히 배울 거야.”
하나 더 준비한 선물은 바로 기타 레슨이었다. 학원에 보내 배우게 해도 되겠지만. 단호하게 그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은 나였다.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놓쳐선 안 되지. 버스킹도 준비할 겸 기타를 가르쳐 주면서 하윤이와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그때였다.
마치 자기는 잊은 거냐고 섭섭함을 담은 외침이 들려온 것은.
“멍!”
“걱정하지 마. 우리 멍이 선물도 준비했으니까.”
우리집 막내가 된 멍이를 잊어선 안 된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가장 격렬하게 반기는 사람. 아니, 막내가 멍이었으니까.
하준이, 하윤이 것 말고도 작은 선물 박스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자기 선물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멍이의 꼬리가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멍이 선물도 확인해 볼까?”
“멍!”
내 말에 기쁜지, 멍이가 나를 향해 펄쩍펄쩍 뛰었다. 저러다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꼬리를 격렬히 흔들면서.
“우와. 멍이 신난 거 봐.”
“멍이가 엄청 좋아해.”
작은 상자 안에서 나온 건 바로 인형이었다.
“멍이야. 마음에 들어?”
“멍!”
이미 자기 마음에 들었는지. 멍이가 선물로 준비한 인형을 입에 살짝 문 채 멍! 하고 외쳤다.
우리 멍이의 애착 인형이 되었으면 좋겠네.
“우리 서준이, 하준이, 하윤이, 멍이. 벌써 일어났니?”
거실에서 시끌시끌한 우리 때문에 깨셨는지. 안방에서 엄마, 아빠가 눈을 비비며 나오셨다.
“엄마, 아빠.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 하준이, 하윤이도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아빠를 위한 특별한 선물은 따로 준비를 했다. 그것도 매우 특별한 선물로.
작은 봉투.
돈이 들어있기엔 너무나도 얇은 두께의 봉투에 아빠의 고개가 갸웃하신다.
그리고.
“아, 아들? 이, 이게 정말 크리스마스 선물이 맞니?”
내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확인한 아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다.
옆에서 같이 확인하던 엄마의 표정은 방긋 웃음꽃이 피었고.
“당신은. 우리 서준이가 엄마, 아빠를 위해 준비한 특별한 선물이잖아요. 서준아 고마워. 엄마는 너무 행복하단다.”
바로 크리스마스 호텔 숙박권.
마침 크리스마스가 금요일이고. 내일이 토요일이니 아빠의 출근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짓는 엄마와, 조용히 부엌으로 가 홍삼을 드시는 아빠였다.
사실 여기엔 작은 비밀이 하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며칠 전에 엄마에게 어떤 선물을 드릴지 선택지를 보여드렸는데. 엄마가 호텔 숙박권을 선택하셨다.
아빠 미안.
*
- ‘학교 생존’ 2주 연속 전 세계 1위. 식을 줄 모르는 뜨거운 인기
-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배우 김도윤. 차 배우에 이어 해외로 진출하나?
- 드라마의 힘? 넷티비 시청자들 원작 만화로 찾아가. K-웹툰 열풍까지 이끌어가나.
- 해외에서 쏟아지고 있는 ‘학교 생존’ 시즌2 제작 요구. 넷티비 결정은?
- 차 배우 효과. 집 떠난 넷티비 시청자들 ‘학교 생존’을 보기 위해 돌아와.
└ 나 ‘학교 생존’으로 하도 기자들이 기사를 써서 국뽕인 줄 알았는데. 진짜 해외에서 엄청 많이들 보더라. 심지어 웹툰도 같이 뜨고 있음. ㄷㄷ
└ 괜히 수많은 할리우드 감독들이 차 배우, 차 배우 외치는 게 아님. 솔직히 차 배우의 최우정이 아니었음 이 정도까진 아니었을걸?
└ ㅇㅈ 차 배우가 보여준 최우정 캐릭터가 원작 초월이라는 말이 쏟아지고 있잖음. 진짜 우리는 차 배우의 시대에 살고 있다!
└ 사실 한국인 배우가 해외에서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줄은 몰랐음. 아마 차 배우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소설 쓰고 있네!’ 이런 말 들었을 듯. ㅋㅋㅋㅋㅋㅋㅋㅋ
└ 농담이 아니라. 진짜 해외에서 학교 생존 시즌2 제작해달라고 요청이 쏟아지고 있어요. 만약 제작 결정이 난다면 대박이겠네요. ㄷㄷ
└ 우리 차 배우 차기작 소식은 없나요? 벌써 크리스마스도 지났고 올해도 이제 끝나 가는데. 아직까지도 차기작 소식이 들려오질 않네요. ㅠㅠ
넷티비에서 공개된 ‘학교 생존’은 여전히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해지했던 넷티비 이용자들이 ‘학교 생존’을 보기 위해 다시 결제한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당장 늘어난 이용자 수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
“요즘 도윤이 이상해.”
“···이해해. 나도 첫 1위 했을 때 저랬어.”
‘학교 생존’이 많은 사랑을 받을수록.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바로 김도윤이었다.
이제 슬슬 적응이 될 법도 한데. 김도윤은 여전히 사람들의 반응을 찾아보며 히죽히죽 웃음을 감추질 못했다.
“도윤아.”
“응? 왜?”
“너 팬서비스 잊으면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학교 생존’ 대성공을 통해 많은 사랑을 받는 만큼.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기 위해 시기, 질투의 눈으로 보는 이들도 늘어났을 테니.
“예전처럼 정체를 가리겠다고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나가도 널 알아보는 팬들이 생겼을 거야. 만약 특별한 스케줄이 있는 상황이라면 정중하게 다음에 해드리겠다면서 양해를 구하고. 그런 바쁜 일이 없다면 가능하면 모든 팬들에게 팬서비스를 해야 돼. 팬이 없다면 배우도 있을 수 없는 법이니까. 알았지?”
응? 애들 반응이 왜 이래.
“···내가 처음 데뷔했을 때도 저랬어.”
특히나 데자뷰를 본다는 듯이 하지우가 말했다. 그랬었나? 하지우는 아이돌이니 조금 다르게 말했을 텐데.
“알아. 서준이가 하는 말들은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있다고.”
교육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김도윤, 하지우가 어디 가서 팬들에게 소홀히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역시 차 배우의 사총사 친구들이야!’ 이런 미담들만 가득할 뿐이었다.
“어? 그러고 보니 도윤이도 이제 주연으로 차기작 제안들 엄청 쏟아지겠네?”
“응. 삼촌이 들어온 것들 보여줬는데. 조금 천천히 결정하려고.”
최지환이 김도윤에게 차기작에 관해 물었고. 김도윤이 천천히 들어오는 작품들을 살펴보면서 결정하겠다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선은 나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서준이 너는?”
나?
*
“기대가 되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주 감독의 시나리오니.”
“삼촌도 그래요? 사실 저도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주우정 감독과 만나기로 한 토요일 저녁. 나는 혼자가 아닌 서도현과 같이 식당을 찾았다.
만약 주우정 감독의 시나리오가 마음에 든다면. 배우 차서준의 차기작이 결정되는 자리가 되는 셈이니 서도현이 따라올 수밖에.
“주 감독이 오랫동안 널 지켜보면서 준비한 시나리오니 기대해도 괜찮을 거다.”
“맞아요. 저번에도 만났었는데. 그때는 아직 완성이 되질 않았다면서 또 한참을 기다리게 했거든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주우정 감독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작업 때문에 제주도에 계셨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다른 감독도 아닌 주우정 감독이었다. 작품을 찍었다 하면 해외 각종 시상식에 단골로 초청되는 감독.
당연히 서도현과 주우정 감독의 인연은 옛날 ‘목소리’ 이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었다.
“이거 제가 갑작스럽게 끼어든 거 아닌가 모르겠군요.”
“단순히 소속사 대표님을 넘어, 서준이에게 가족 같은 삼촌 아닙니까. 사실 대표님 말씀이 없었으면 제가 같이 뵙자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서도현과 주우정 감독의 대화가 이어졌지만.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몇 년을 기다린 시나리오가 드디어 완성되었다는데.
“감독님.”
“응?”
“일단 시나리오부터 볼 수 있을까요?”
내 말에 주우정 감독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줄 알았다면서 메고 온 가방에서 시나리오를 꺼낸다.
응? 하나가 아니라 두 부다. 시나리오를 꺼낸 주우정 감독이 하나는 내게, 다른 하나는 서도현에게 건넸다.
“사실 서준이도 서준이지만. 대표님께도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 두 개를 준비해 왔습니다.”
“서준이가 보는 동안 어떻게 참아야 하나 걱정했는데. 감독님 덕분에 그 걱정을 덜 수 있게 되었군요.”
서도현은 배우 차서준의 소속사 대표를 넘어, 작품 보는 눈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능력자였다.
당연히 시나리오를 쓴 감독 입장에선 서도현의 평가가 듣고 싶겠지.
나는 주우정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제목부터 살폈다. 몇 번을 물어봐도 완성되고 나면 보여준다던 제목이었으니까.
그리고.
시나리오 겉표지에 적힌 제목을 확인한 순간.
“어? 감독님 이거···.”
나는 정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주우정 감독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 제법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정한 건인데.”
그런 내 반응에 주우정 감독이 이상하냐는 듯 되물었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사실 특별한 제목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화들짝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차서준에게 있어서는 정말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제목이었으니까.
주우정 감독이 오랫동안 날 주인공으로 쓴 시나리오의 제목은.
[탑스타 어게인]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