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새벽 3시였다.
분명 잘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피곤해 보여야 정상인데. TV 화면 불빛에 보이는 눈동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피곤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집중한 채. ‘학교 생존’ 마지막까지 쉬지 않고 달린 것이다.
배고플까 야식으로 시킨 피자는 한 조각도 채 먹지 못한 채 식어버렸다. 그만큼 드라마에 몰입해서 봤다는 뜻.
“어우. 이제야 배고픔이 느껴지네.”
그제야 허기가 느껴지는지 김우승이 식은 피자를 집어 들었다.
“이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뽑혔는데? 정신없이 보느라 배고픈 줄도 몰랐네.”
“나도. 이러다가 차기작도 악역으로 제안 들어오는 거 아닌지 몰라.”
김우승이 건네는 식은 피자 조각을 받은 김정범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만큼 초반에는 믿음직한 담임, 본색을 드러낸 뒤에는 학생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개자식 그대로를 잘 보여준 김정범이었다. 꽤나 소화하기 어려운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차기작 배역 걱정을 하면서도 입가에 띈 미소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
“그러게. 형 완전 나쁜 놈 그 자체던데? 내가 감독이라도 그런 배역 있으면 무조건 형 캐스팅할 것 같아. 잘해도 너무 잘해.”
“그지? 그런데 악역 너무 많이 하면 광고 떨어져서 안 되는데.”
“나쁜 놈 말고 근사한 개새끼 같은 거 하면 되지. 형은 그것도 잘 어울릴 듯?”
“맞네. 악역 중에서도 매력적인 악역 들어오면 생각해 봐야겠다. 근데 칭찬 맞지?”
김우승과 김정범이 피자를 우물거리며 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역시 박성필 감독이고. 서준이 넌 원작 만화 속 캐릭터보다 완벽한 최우정을 보여줬다고 생각해. 너는 연습할 때보다 카메라 앞에 설 때가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 드라마도 해외에서 매력적으로 보일만한 요소들이 많고. 특히 박성필 감독이 꽤나 고심한 흔적들이 화면 구성 곳곳에 보일 정도야. 이거 반응 제대로 터지겠다.”
몇 시간 동안 달린 드라마가 꽤나 만족스러웠는지. 박우형은 배고픔조차 잊은 채 날 앞에 둔 채 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놔두면 한 시간은 떠들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김우승에게 피자 한 조각을 받아 박우형에게 건넸다.
다행히 박우형도 배가 고팠는지 눈앞에 피자가 나타나자 입을 다물고 먹는다.
“내일. 아니, 오늘부터 한동안 난리가 나겠어. 지금 살짝 찾아보니까 해외에서도 반응들이 제법 좋은 거 같은데?”
“좋다 뿐이겠어. 이제 시작일걸? 일단 우형이 형이 저렇게 극찬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연사모 형들 중에서도 특히나 연기에 미쳐 사는 사람이 박우형이었다.
특히 공부를 위해 수많은 영화, 드라마를 섭렵한 사람이 박우형인 만큼. 작품을 향한 우형이 형의 평가는 정확할 때가 많았다.
그런 박우형이 극찬을 했다? 이건 작품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었다.
당장 넷비티, 학교 생존 등 드라마 관련 단어들이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
“벌써 새벽 3시가 넘었네. 다들 슬슬 자자고. 점심때쯤에 일어날 거잖아? 나가서 밥 먹고 헤어지는 게 어때?”
슬슬 졸린 지, 김정범이 하품을 쩍하며 점심을 먹고 헤어지자고 제안하자.
“오케이. 점심은 뜨끈한 국물 어때? 날도 추운데.”
“좋은 생각.”
김우승과 박우형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덕분에 아침 일찍 가려던 나도 붙잡혀 버렸다. 형들 중 한 명이 날 데려다 줄 테니 점심도 같이 먹어야만 할 것 같다.
이 형들 왜 집에 들어갈 생각을 안 하지?
“축하 문자 들어오는 거지?”
“네. 다들 잠도 안 자고 마지막까지 달렸나 봐요.”
우우우웅.
새벽 3시임에도 핸드폰의 진동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 다들 1화부터 시작해 마지막까지 스트레이트로 달린 모양.
“이야, 지금 서준이 핸드폰 쉴 새 없이 울리는 거 보니까. 다음 주에 학교에 가면 전교생 친구들이 달려들겠는데?”
*
무슨 말이 필요할까. 김정범의 예언처럼 학교에 도착하니 난리가 났다.
내가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말 그대로 전교생의 축하 인사가 쏟아진 것. 그건 학생들을 넘어 선생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도윤과 함께 교무실에 불려가 축하를 받았다. 우리 학년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년 선생님들도 모두 오셨더라.
심지어 저 뒤에 흐뭇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는 사람은 교장 선생님이었다.
교무실에 계신 선생님들께 따로 사인을 해드리니 함박 미소를 지은 건 당연한 이야기.
“축하해!”
“드라마 정말 재밌게 봤어!”
“나 다른 학교 친구들에게도 꼭 보라고 홍보하고 있어.”
“만화보다 더 재밌었어!”
교무실부터 교실까지 돌아오는 길도 축하의 향연이었다.
나야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라 덤덤했지만. 이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처음인 김도윤은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질 못했다.
“서준아! 도윤아!”
“···축하해.”
꾹꾹 참아왔는지. 점심시간이 되자 최지환이 격하게 김도윤과 나를 안아준다. 뒤이어 하지우 역시 마찬가지.
“대박! 나 5화만 보고 자고 일어나서 마저 보려고 했거든? 근데 정신 차리니까 새벽이었어!”
“···나도 숙소에서 형들이랑 봤어. 다들 잠자는 것도 포기하고 봤어.”
새벽까지 달렸다고 말하는 최지환. 그리고 블랙홀 멤버들과 숙소에서 잠도 포기하고 봤다는 하지우까지.
“축하해 줘서 고마워. 나 진짜 지금 꿈을 꾸는 것만 같아.”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단연 김도윤이었다. ‘학교 생존’의 주연 중 한 명이었으니까. 조연으로 출연할 때와는 감회가 다를 것이다.
특히 아침 일찍 왔는지.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축하 인사를 받으며, 사인을 해주고 있었던 김도윤이었다.
“비밀 하나 말해줄까?”
“···뭔데?”
“도윤이가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왔더라고. 그것도 엄청 일찍.”
최지환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비밀을 폭로했다. 아무래도 세계적인 스타인 차서준과 같이 등교를 한다면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내가 미친놈 그 자체인 최우정을 완벽하게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
귀엽게도 김도윤이 오늘따라 슬쩍 먼저 등교한 모양이었다. 스포트라이트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
어쩐지 언제 학교에 갈 거냐고 물어보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떠올라서 오늘 지각만 간신히 면할 시간에 등교했다.
“하지 마!”
“하디 마!”
“···하지 마?”
이렇게 김도윤을 놀릴 수 있는 것도 사총사 친구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말은 저렇게 해도 세상 행복한 웃음을 하루 종일 지우지 못한 김도윤이었다. 점심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구분조차 못 하던데.
“드라마 마지막까지 보고 나니까 삼촌이 그러더라. 고생했다고. 정말 최고였다고. 다 서준이 네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고맙긴. 다 도윤이 네가 죽어라 노력한 덕분인데. 사실 내가 아니었어도 도윤이 넌 주연으로 캐스팅되었을 거야.”
배우 김도윤의 첫 주연작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TV 채널을 통해 국내에만 공개되는 것이 아닌. 넷티비를 통한 전 세계 동시 공개.
지금도 김도윤의 핸드폰에는 네티즌들이 퍼온 해외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주 애가 실시간으로 새로고침을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들에서 눈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너무 보지 말라고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좋은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고, 드라마 성적도 끝내주는 상황이니 즐기시게 냅둬야지.
“근데 서준이는 진짜 미친놈인 줄 알았어. 아까 친구들 중 몇 명은 널 보면서 흠칫흠칫 놀라던데?”
“···완전 미친놈. 멤버 형들 중에서도 물어보더라. 사실 서준이가 진짜 저런 성격인 거 아니냐고. 그래서 내가 절대로 아니라고 제대로 교육을 시켰어.”
응? 블랙홀 멤버, 그것도 형이라면서. 그룹 막내가 형에게 교육 시켜도 괜찮은 거니?
저걸 내 연기에 대한 극찬으로 들어야 할까. 아니면 날 향한 농담으로 들어야 할까.
어쨌거나.
배우 차서준이 보여준 최우정은. 수많은 원작 팬들이 기대한 만화 속 미친놈 최우정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말해봤자 입만 더 아프지.
당장 공개일에 새벽까지 같이 봤던 연사모 형들의 반응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특히 박우형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차기작 소식을 들을 듯싶었다.
“서준아. 오늘도 기사 계속 쏟아지고 있는데. 봤어?”
“봤지. 도윤이 너도 혹시나 아이디 하나 만들어서 댓글 달고 그러면 안 된다. 세상에 비밀이 없어요. 우승이 형 흑역사 발굴되는 거 봤지?”
내 말에 흠칫 놀라던 김도윤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설마 하고 있었어? 어쩐지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핸드폰을 자꾸 두들기더라. 축하 문자에 대답하는 줄 알았더니 반응들을 음미하고 있었던 모양.
어쩐지 ‘학교 생존’ 기사들마다 유독 아이디 하나가 김도윤을 집중적으로 칭찬을 하더라.
괜찮다. 사실 김우승의 흑역사도 내가 떠들지만 않았어도 무덤까지 비밀로 갈 뻔했었으니.
김우승처럼 자기를 칭찬하려고 남을 깎아내리거나 그럴 애가 아니었기에. 김도윤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였다.
- 넷티비 드라마 ‘학교 생존’ 세계에서 통했다.
- 다시 한번 증명한 차 배우 효과. ‘학교 생존’ 넷티비 1위 등극.
- 시청자들의 극찬이 쏟아진 ‘학교 생존’. 국내보다 뜨거운 해외 시청자들의 반응.
- 벌써부터 나오기 시작한 시즌2 제작 요구. ‘학교 생존’ 신드롬으로 이어지나?
└ 재밌더라. 기자들 호들갑이 아니라 진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음. ㄷㄷ 정신을 차려보니까 새벽에 마지막 화를 보고 있었음. ㄷㄷㄷ
└ 국내 반응은 뭐 말할 필요도 없고. 해외 반응은 더 뜨거움. ㅋㅋㅋㅋㅋ 기자들이 과장하는 게 아니라. 진짜 시즌2 제작해야 된다고 말 나오고 있더라. ㅋㅋ
└ 바로는 못 들어갈걸. 학교를 벗어나 도시 단위가 되는 건데. 제작비가 이번에 들어간 거랑 차원이 다르게 들어갈 수 있음.
└ 그럼에도 긍정적인 생각이 나오는 게. 지금도 전 세계 시청 시간 압도적인 1위임. 내가 봤을 땐 점점 입소문도 퍼지고 있어서 계속 1위 유지할 거 같은데.
└ 떠나간 가입자들 돌아오는 소리 들린다! 넷티비가 차 배우 효과를 보고서 활짝 미소 짓는 게 보인다! 그러니 시즌2 제작 발표 좀···.
└ 차 배우 차기작 결정되었다는 소식 있었나요? 아무래도 시즌2 제작 결정이 된다 하더라도 바로 안 될 텐데. 차기작 소식 아시는 분?
여기까지는 ‘학교 생존’ 관련 기사들과 사람들의 반응이었고.
└ 김도윤 배우가 진짜 잘하더라고요. 괜히 차 배우가 친구인 김도윤의 연기력을 극찬한 게 아니었음. 매 화가 진행될수록 발전하는 연기력이 눈에 계속 들어옴. ㄷㄷㄷ
└ 도윤이니?
└ 에이, 설마 진짜 김도윤이겠음? 김우승을 봤는데?
└ 근데 진짜로 잘하긴 했음. ㅋㅋㅋ
└ ㅇㅈ 차 배우 친구라서가 아니라. 차기작도 기대되더라.
이건 아마 김도윤이 몰래 쓴 것과, 농담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
사실 지금 김도윤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김도윤의 삼촌이자, 구름엑터스의 대표 서도현이 그 주인공이었다.
농담처럼 직원들이 ‘요즘 대표님 미소 천사 된 거 같지 않아요?’ 이런 말을 할 정도니.
“축하한다.”
“다 삼촌 덕분이에요.”
요즘 따라 서도현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원래 낮이고, 밤이고 대표실로 가면 앉아 있는 사람이 서도현이었는데.
저녁에 잠깐 회사에 들르면 서도현이 없는 경우가 잦아졌다. 보통 미팅이 있으면 직원들에게 말하고 가는데.
팀장님들에게 물어도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는 답변만 들을 뿐이었다.
“삼촌.”
“응?”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응?”
저거 봐. 은근슬쩍 다시 되물으면서 대답을 회피한다.
“아니. 요즘 삼촌이 많이 바빠 보이는 것 같아서요. 팀장님들에게 물어도 모른다고 하고.”
“그게···.”
내 말에도 서도현이 말끝을 흐린다. 괜찮다. 이럴 줄 알고 미끼를 준비해 왔거든.
“어? 시율 누나한테 연락이 왔네.”
흠칫. 서도현이 내 말에 무언가 찔리는 것이 있는지 움찔 놀란다.
저거 봐.
사실 서도현은 모르겠지만. 저번 만남 이후 김시율과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슬쩍슬쩍 삼촌 언급을 많이 했었다.
구름엑터스 대표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또 어떠한 매력을 가진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대놓곤 아니고 은근슬쩍 지나가듯 계속.
오랜만에 차서준 연애 조작단을 하려니 힘들더라.
그렇게 내가 서도현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고 있을 무렵.
♪♬♪~
핸드폰이 울려서 이름을 확인해 보니.
주우정 감독이었다.
내가 전화를 받기 위해 소파에 앉자. 안도의 숨을 내쉬는 서도현의 모습이 보인다.
일단 삼촌보다 주우정 감독님에게 집중해야지.
- 드라마 대박 축하해. 지금 잠깐 통화 가능할까?
“네. 감독님은 잘 지내셨어요?”
- 나야 잘 지냈지. 그보다 아직 차기작 결정된 거 없지?
“당연하죠. 감독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시나리오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으니 차기작 같이 하자고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음일까. 수화기 너머 웃음을 터트리는 주우정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완성되었어. 그 시나리오.
그리고.
주우정 감독이 드디어 완성한 모양이다.
“감독님. 그러면 언제 만날까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완성되었다는 시나리오를 조금이라도 빨리 확인해야지.
당장이라도 달려가겠다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 내가 아직 제주도라서. 이번 주말 저녁 어때?
주우정 감독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