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넷티비 드라마 ‘학교 생존’은 만화 원작을 각색한 드라마였다.
당연히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원작 팬들이라면 기대와 동시에 캐스팅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화라서 작가가 마음껏 표현한 캐릭터인데. 과연 실제 배우들이 영상 속에서 그 캐릭터들을 잘 구현할 수 있을까.
특히 ‘최우정’. 평소에는 공부, 운동, 노래 등 못 하는 것이 없는 모범생 반장이었지만. 괴현상이 펼쳐지고 난 뒤에 서서히 가면을 벗는 인물에 대해선 더욱더 그랬다.
“차서준? 진짜? 그 차서준이 학교 생존의 최우정에 캐스팅되었다고?”
“그렇다니까. 솔직히 드라마로 제작된다고 했을 때. 최우정만큼은 못 살릴 거라 생각했는데. 차서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인정. 몇 년 전에 디멘션 소서러에서 악역으로 나왔을 때 제대로 보여줬잖아. 시간이 지났으니 더 미친 연기력을 보여주지 않을까?”
차서준 캐스팅 소식을 들을 ‘학교 생존’ 원작 팬들이 이렇게 호들갑까지 떨었을 정도.
사실 지금 그 누구보다 차서준이 보여줄 최우정이란 캐릭터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김도윤이었다.
차서준이 김도윤과 함께 대본 연습을 했다지만. 단 한 번도 최우정의 숨겨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
“진짜 도윤이 너한테도 안 보여줬다고? 한 번도? 같이 계속 연습했다면서.”
“그렇다니까요. 서준이가 그러는데. 정말 감독님이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내려면. 카메라가 돌아갈 때 처음 봐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이유라면 말이 되긴 하는데. 나는 당연히 네가 서준이랑 연습하면서 본 줄 알았지. 어땠을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최이안이 정말 못 봤냐는 질문에. 김도윤은 그저 저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학교 생존’에 캐스팅되면서 원작 만화를 다 읽었기에 최우정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인지에 대해선 안다.
하지만.
그 사이코패스를 과연 차서준이 어떻게 보여줄지에 대해서는 정작 사총사 친구인 김도윤조차 몰랐다.
지금 누구보다 차서준의 최우정이 궁금한 사람이 김도윤이었다.
“자, 촬영 시작합시다.”
박성필 감독이 촬영 시작을 알리고.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준비를 마무리한다.
“연습 때처럼만 하면 돼. 알았지?”
“알았어.
차서준은 평소와 똑같았다. 촬영장에 도착함과 동시에 자신과 함께 막내 스태프까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한다.
그다음 오늘 촬영 동안 찍을 장면에 대해 간략하게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다면.
과연 차서준이 보여줄 사이코패스의 진면목은 어떨까?
“레디! 액션!”
박성필 감독의 외침과 동시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2학년 3반의 담임이었던 권길형의 실체가 낱낱이 까발려진 상황.
이 혼란한 상황에 유일한 기댈 곳이던 담임의 더러운 실체에 학생들은 충격에 빠지고. 구해온 줄로 권길형을 묶고 처분에 대해 의논하는데.
“그냥 괴물에게 던져주자. 수연이도 저 새끼랑 있다가 죽었잖아. 난 똑같이 돌려주고 싶어.”
“그러면 우리가 저거랑 다를 게 뭐야. 그건 안 돼.”
“안 되긴. 저 새끼만 던져주면 5분은 더 살 수 있다고.”
학생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권길형이 했던 그대로 괴물에게 미끼로 던져주자는 강경파와, 그것만큼은 인간적으로 안 된다는 온건파의 대립.
당연히 2학년 4반 생존 학생들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이 나타난 순간부터 은연중에 학생들의 정신적 리더가 된 반장. 최우정이었다.
“음. 내 생각에는 투표로 하면 어떨까 싶어. 우리가 딱 7명이니까. 손을 들어서 결정하자.”
“우정아. 이건 투표로 결정할 사항이···.”
“거기까지. 반장 말을 따르자고 한 건 너 아니야?”
결국 시작된 투표. 손을 든 사람은 정확하게 3:3 반반으로 나뉘고. 남은 사람은 이제 반장인 최우정 하나.
“나는···.”
최우정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는 순간.
크아악!
학생들이 숨어있던 교실 창문이 흔들리며. 괴물이 이쪽을 향해 쿵쿵 발소리를 내며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렸다.
“어, 어떻게 해.”
“도망치자. 여긴 2층이니까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도망치는 거야.”
“그러다 다치면? 뒤처지는 사람은 무조건 잡아먹히는 거 몰라? 저 새끼도 다리 다친 덕분에 우리가 묶은 거잖아.”
우왕좌왕하는 학생들.
그때 나서는 최우정.
“내가 여기 남아서 유인할게. 너희는 위로 도망쳐.”
자신이 미끼가 되어 저 괴물을 유인할 테니. 친구들은 도망치라 하고.
괴물이 학생들이 숨어있는 창문을 지나가는 순간. 최우정이 앞문 복도를 향해 의자를 던진다.
우당탕!
그 소리에 괴물의 고개가 그쪽을 향하고. 학생들은 최대한 걸음을 죽인 채 조용히 도망을 친다.
언제 다시 저 괴물이 학생들을 향해 고개를 돌릴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였다.
가장 마지막에 교실을 빠져나가던 김정열은 보았다. 담임의 손을 향해 날카로운 펜으로 내려치는 최우정의 모습을.
“끄으윽!”
순간 터지는 권길형의 고통에 찬 신음. 그 소리에 반응하는 괴물.
잠시 후.
간신히 몸을 숨긴 김정열이 있는 곳에 거친 숨을 삼키며 최우정이 나타났다.
생존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 이 자리에는 오직 최우정과 김정열, 단둘뿐.
“너 이 자식! 너 뭐야. 너 뭔데 사람을 미끼로 던져.”
김정열이 분노에 찬 손길로 최우정의 멱살을 잡는 순간.
“들.켰.네?”
마치 분필 칠판을 끼이익 긁는 듯한 불쾌한 목소리가 최우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다음 서서히 올라오는 고개. 마주한 회색빛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주는 섬뜩함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는 김정열.
“너, 너 일부러 계속 작은 소리를 냈지? 여기에 우리가 있다는 걸 저 괴물에게 알리기 위해서.”
목소리가 떨린다. 이 검은 돔 안에선 더 이상 사회적 규범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가 살기 위해선 너를 저 사람을 씹어 먹는 괴물에게 던져야 한다.
서서히 이 무서운 생각들이 남은 생존자들의 머리 안에 슬금슬금 차오르고 있는 상황. 그런데 눈앞의 최우정은 아무렇지 않게 실천해버렸다. 오히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직까지 어떻게든 친구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김정열에게 있어. 방금 죽일 놈이지만 담임을 먹이로 던지듯 행동한 최우정의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재밌잖아. 목숨을 건 술래잡기. 넌 재미없어? 난 재밌는데.”
오직 희열에 찬 저 목소리를 듣는 순간. 경악에 순식간에 휘둥그레지는 김정열. 아니, 김도윤의 눈동자.
그걸 놓치지 않는 카메라 감독.
“···너, 너!”
떨리는 손을 들어 최우정을 가리키는 순간.
“커엇!”
박성필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학교 생존’의 원작 만화를 본 사람이라면. 보던 이들의 손에 땀을 나게 만들던 최우정이라는 미친놈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야. 이거 나중에 시청자들 보고 나면 또 난리가 나겠네요. 최우정을 과연 얼마나 살릴까 걱정하던데. 최우정이 저기 있네.”
“원작 캐릭터보다 더 미쳤던 거 같은데? 아까 카메라 감독님 클로즈업 하다가 깜짝 놀라는 거 봤어?”
“봤지. 하마터면 배우들의 미친 연기에 NG 끼얹을 뻔했잖아.”
“지금 해맑게 웃는 표정이랑, 방금 그 표정이 매치가 안 되네. 이래서 다들 차 배우, 차 배우 하는구나.”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방금 차서준이 보여준 ‘미친놈 최우정’의 연기가 뛰어났다.
말 그대로 미친놈을 데려다가 촬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누가 그랬는데. 몇 년 전에 차 배우랑 촬영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고.”
“무슨 생각?”
“혹시 연기 똑딱 스위치가 있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고. 감독님의 큐 사인과 동시에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보여줘서.”
여전히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스태프들의 눈에. 김도윤, 최이안과 방금 촬영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차서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
“서준이 너 완전 미친놈인 줄 알았어!”
“완전 미친놈이었잖아!”
미친놈을 연기한 배우에게 있어 최고의 칭찬이긴 한데. 정말 미친놈을 보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착각이겠지?
김도윤과 최이안이 호들갑을 멈추질 못했다. 특히나 코앞에서 표정 변화를 보고 있던 김도윤은 더욱더 그랬다.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기 전까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물론 놀람과 동시에 촬영 중임을 잊진 않았다.
촬영 전 ‘어렵겠지만, 최대한 리얼리티하게 가보자고. 알았지?’ 이렇게 요청한 박성필 감독의 요구를 완벽하게 살려버린 셈이다.
“이야, 도윤이 방금 표정 연기가 최고였는데? 내가 말하던 그 어려운 주문을 완벽하게 그대로 잘 살렸어. 최고야.”
“정말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날 미친놈 보듯 바라보던 김도윤이었지만. 옆으로 한걸음에 달려온 박성필 감독의 특급 칭찬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뒷머리를 벅벅 긁던 김도윤이 슬쩍 내 곁으로 다가와 주변에 들리지 않게 속삭인다.
“이런 반응을 끌어내려고 안 보여줬구나?”
“당연하지. 어땠어?”
무슨 말이 필요할까. 방금 모니터링한 김도윤의 연기는 본인이 봐도 완벽에 가까웠을 텐데.
괜히 박성필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게 아니다.
믿었던 반장의 숨겨진 본성. 그걸 처음 마주하게 되면서 터지는 경악. 그 순간에서의 표정 변화를 완벽히 살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어려운 표현을 내 덕분에 완벽하게 수행하게 된 김도윤이었다. 방금 경험은 앞으로 배우 생활에 있어 큰 양분이 될 것이다.
“최고야. 진짜 서준이 너 덕분에 칭찬을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어.”
결국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고마움을 표할 뿐이었다.
단순히 내가 상황을 만들어줬다고 해서 모두가 김도윤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재능. 항상 나와 비교되어서 그렇지. 김도윤에겐 배우로서 성공할 수 있는 재능이 넘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끝나고 야식 먹자. 내가 쏠게.”
“됐다. 내가 살 테니 이안이 형이랑 먹고 싶은 거나 생각해놔. 정범이 형도 같이 갈 거야.”
벼룩의 간을 빼먹지. 이제 아역 배우를 벗어나 배우로 자리 잡기 시작한 친구의 얇은 지갑을 털 생각은 없었다.
내가 산다고 하니 김도윤이 두 손을 번쩍 들며 기뻐한다.
“진짜? 나 오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맛있는 거 먹을 생각인데?”
“먹어. 그러라고 산다고 한 거니까. 가면서 내일 촬영 준비도 좀 하자.”
“아, 맞다.”
방방 뛰며 좋아하던 김도윤이 다시 차분함을 되찾는다.
원래 사람이 들떴을 때를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거만해지지 않도록 채찍질도 잊지 말아야지.
앞으로 남은 촬영들이 점점 더 어려운 감정 표현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당연히 완벽한 연기를 위한 준비는 필수였다.
김정범이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부른다.
“서준아.”
“네?”
“방금 너 연기가 완전 미친놈처럼 보이더라. 그냥 촬영을 위해 미친놈 하나 섭외해서 온 줄 알았어.”
리얼리티를 위해 김정범의 손을 향해 제법 강하게 내려치긴 했다.
정범이 형의 입에서 나온 ‘끄으윽!’하는 소리가 연기를 위해 내뱉은 소리가 아니었을 정도.
“다 형이랑 연습한 덕분이에요.”
“알지. 다 아는 데에도 진짜 미친놈 같긴 하더라.”
이건 과연 칭찬일까, 욕일까.
아까 내려친 손을 자꾸만 매만지는 것이. 후자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
다음 날.
서도현이 나를 회사로 불렀다. 촬영에 집중하라면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대표실까지 부르지 않았는데.
“삼촌, 무슨 일이에요?”
“왔구나. 마침 광고 제안이 하나 들어와서 불렀다.”
“광고요?”
서도현의 설명을 듣는 순간. 나는 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배우 차서준에게 들어오는 것이 광고 제안들이었다. 아무리 좋은 기회라 하더라도 촬영 중에는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뒤로 미루는 삼촌이었는데.
나를 여기까지 불렀다는 건 제법 흥미로운 것이라는 뜻.
“정확히는 서준이 너에게 들어온 광고는 아니야.”
“제가 아니라고요?”
그러면 더 이상했다. 과거 ‘힐링 가족’에 출연할 때야 하준이, 하윤이에게 제법 많은 광고들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허나 이제 동생들은 TV에 얼굴을 비추는 것보다, 학교생활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 그런 동생들에게 뜬금없이 광고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니. 하준이, 하윤이도 말고.”
하준이, 하윤이도 아니란다. 그렇다면 엄마?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내가 너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서도현을 바라보자.
“궁금한 모양이구나. 요 며칠 사이에 차 배우에게 막내가 생겼다고 소문난 건 너도 알고 있지?”
아, 최근 커뮤니티를 통해 우리집 막내가 된 멍이가 제법 유명해지긴 했다.
“멍이에게 들어온 광고다. 집에 가져가서 멍이랑 이야기하고 삼촌에게 알려줘.”
멍이에게 광고가 들어왔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