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놀이동산 사진을 보면서 웃을 때는 좀 얄밉긴 했지만. 사실 정범이 형에겐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비중은 크지 않지만. 작품 분위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권길형을 기꺼이 하겠다고 나섰으니까.
만약 나와의 우정이 아니었더라면. 아무리 권길형 역이 중요하다 한들 김정범급 배우를 섭외한다는 건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형. 여기서 형이 확 머리채를 잡아 넘어뜨리고 도망치다가 안심하는 순간. 제가 저쪽 귀퉁이에서 시야에 등장할 거예요.”
“오케이. 그러면 거기서 나와 딱 눈을 마주친다. 맞지?”
“네. 그 시선 안에 담긴 감정이 중요해요. 우리가 연습할 때처럼만 맞추면 될 것 같아요.”
악역은 좋은 연기를 보여줄수록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렇다면 나와 박우형, 김우승과 함께 몇 년 동안 연기에 대해 파고든 김정범이 보여줄 악역 연기는 어떠할까.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과거 ‘왕자의 난’ 시즌1, 2를 통해 악역 연기를 이미 증명한 김정범이었으니.
“어우, 방금 리허설로 가볍게 했는데도. 진짜 나쁜 새끼라는 말이 절로 나올 뻔했잖아.”
“그러게. 왜 연사모가 연기를 사랑하는 모임인 줄 몰랐는데. 이번 작품 촬영을 하면서 알겠더라. 연기력들이 미쳤어.”
“차서준, 김정범. 두 배우 다 말도 안 되는 연기를 보여주잖아. 이거 나중에 넷티비에서 공개되고 나면 또 난리 날 거 같은데?”
수군수군거리는 매니저들의 말처럼. 김정범은 진짜 나쁜 새끼 그 자체를 보여줄 준비를 마쳤다.
어떻게 아냐고?
김정범과 함께 오늘 촬영할 장면을 며칠이나 준비했으니까.
“레디! 액션!”
박성필 감독의 외침과 동시에.
“얘들아. 선생님은 너희를 꼭 지킬 거야. 그러니 선생님만 믿고 아무리 무섭더라도 잘 이겨내자. 알았지?”
“네, 쌤! 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맞아. 옆 반 담임은 저 괴물이 등장하자마자 애들 다 버리고 도망쳐서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던데.”
김정범이 책임감, 정의로움, 신뢰 가득한 2학년 3반 담임선생님 권길형으로 변했다.
나는 다음 장면에서 등장할 예정이었기에. 조금 떨어져서 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확실히 좋다. 막 엄청난 명연기! 이런 게 아니라. 앞으로 들이닥칠 상황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조금은 평화로워진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니.
그때였다.
쿠웅. 묵직한 걸음 소리와 동시에.
“어, 어어?! 우, 우리 쪽으로 오나 봐요.”
“어떡해요 쌤?”
담임과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던 학생1, 2가 들려온 굉음에 돌연 불안감에 빠진다. 나중에 후반 작업으로 이쯤에 돌변하는 분위기를 보여줄 음악이 깔리겠지.
“커엇!”
그리고 울려 퍼지는 박성필 감독의 오케이 사인. 이제 다음 장면 마지막에 내가 등장할 차례였다.
“차 배우, 준비됐어?”
*
흔히 말하는 원작 초월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인기 원작 만화가 있는 경우에는 배우의 연기가 원작 캐릭터와 매번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학교 생존’의 연출을 맡은 박성필 감독 역시 원작 만화를 몇 번이나 읽었다. 사람들이 어떤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는지 철저하게 분석하기 위해서.
그런데.
‘저기 있네. 최우정이가.’
박성필 감독이 만화를 읽는 내내 가장 매력적이라 느꼈던 주인공 중 한 명인 최우정이 눈앞에 있었다.
아직 등장하진 않았지만. 이미 리허설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잠시 최우정에 대한 생각을 뒤로한 채. 박성필 감독은 모니터에 집중했다.
“이쪽으로!”
괴물이 거칠게 달려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최우정이 소리쳤다. 이쪽으로 도망치라고.
그 소리를 들은 담임 권길형과 학생1, 2가 그쪽을 향해 달린다.
당연히 괴물은 CG처리가 될 예정이기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배우들이 어디쯤 괴물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식별 공만 뒤에 동동 따라갈 뿐.
‘지금부터 중요하지.’
이제부터였다. 마치 영웅처럼 학생들을 지켜줄 것만 같았던 담임 권길형이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이.
쩔뚝, 쩔뚝.
권길형은 다리를 접질린 상태였다. 담임을 맡은 반 학생 하나를 구하려고 책상을 던지고 도망치다 다친 것.
그가 정의감이 넘쳐서. 또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나선 것이 아니었다.
책상을 던져도 괴물이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손에 든 시체를 먹어 치우느라 이쪽에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재수가 없게도 괴물이 책상을 던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버렸다. 다행히 쫓기는 과정에서 다른 희생양을 던져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걸 본 이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권길형이었다. 문제는 다시 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에게 쫓기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시발, 아까 괜히 나서가지고.”
“···쌤?”
쩔뚝이면서 뒤를 따르던 권길형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지자. 앞서 달려가던 여학생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꺄아악!”
권길형이 우악스럽게 손을 뻗어 여학생의 뒷머리를 잡아챈다. 그러고는 확 당겨 넘어뜨린다.
“미안하다 수연아. 선생님이 살아야 다른 친구들을 지켜줄 수 있어. 너도 알지? 아까도 선생님이 너희를 구하기 위해 나섰던 거?”
자신의 변명이 저 여학생에게 들리지는 않을 거다. 왜냐고? 이미 권길형은 괴물에게 여학생을 제물로 던지고 도망치고 있었으니까.
저 앞에 달려가는 다른 여학생은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기에 상황을 몰랐다. 그저 뒤에서 터지는 비명 소리에 다리의 힘을 박찰 뿐.
결국 권길형의 비겁한 행동은 또다시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나쁜 꺄아악!”
자신을 욕하려던 여학생의 목소리는. 결국 으적으적 씹히는 소리와 함께 짧은 단말마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살았···.”
권길형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순간. 마주치고 말았다.
이 괴현상이 시작된 이후부터 이상하게도 꺼림칙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반장. 최우정의 눈을 말이다.
순간 말없이 오가는 두 사람의 아이 컨텍.
아주 미묘한 최우정의 표정 변화.
“커엇!”
그런 두 사람의 눈빛 연기를 보면서. 박성필 감독은 짜릿함과 함께 오케이 사인을 외쳤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진짜 최고라 불리는 배우들은 눈빛만으로 시청자들에게 울림을 줄줄 알았다.
방금 김정범과 차서준이 마지막에 보여준 짧은 눈빛 교환처럼 말이다.
“정범 씨. 방금 최고였어요. 우리 차 배우는 뭐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었고.”
박성필 감독은 새삼스럽게 감사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최우정은 정말 영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캐릭터였다. 이 검은 돔과 괴물이라는 말도 안 되는 현상이 펼쳐지기 전까지는 뛰어난 모범생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최우정이라는 캐릭터 안에 또 다른 괴물이 있었다.
사이코패스.
사회적 규범이 무너진 이 학교 안이야 말로. 최우정이라는 괴물이 기다려왔던 시간임을 시청자들이 안 순간. 터질 반응들이 기대가 되는 박성필 감독이었다.
당장 웅성웅성이고 있는 스태프들만 보더라도. 나중에 어떤 반응이 나올지 충분히 예상되었으니까.
“그러면 저번 촬영 때. 머리 위 유리창으로 괴물이 지나갈 때 떨리는 연기는 사실 다른 이유에서였네? 공포가 아니라?”
“사실 나도 그게 공포심인 줄 알았는데. 만화 보니까 완전히 다르더라. 마치 꾸욱 참고 있는 희열 같았다고 할까?”
“와, 보는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게 할 수 있다니. 그게 현실에서 연기로 표현이 되는 거였네.”
“차 배우가 아니었으면 최우정의 비중을 확 줄일 수밖에 없었을걸. 진짜 미친 재능이야.”
*
오늘 촬영이 예정보다 일찍 끝난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퇴근하는 아빠를 반길 수 있었다.
“아빠!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어이쿠. 오늘은 우리 아들이 먼저 퇴근해서 기다리고 있었네? 오늘 촬영은 잘했어?”
“네.”
현관문을 열자마자 내가 방긋 웃으며 반기자. 아빠의 얼굴에서도 활짝 웃음꽃이 폈다.
내가 오늘도 고생한 아빠를 꼬옥 안아주자. 질 수 없다는 듯 하준이, 하윤이도 아빠를 향해 달려 나왔다.
“아빠!”
“아빠!”
“우리 하준이, 하윤이도 오늘 학교 잘 다녀왔어?”
아빠는 하준이와 하윤이를 한 번씩 번쩍 안아주고 나서야 거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여보, 왔어요? 오늘도 수고했어요.”
“당신도 애들이랑 하루를 보내느라 고생했어.”
어이쿠. 나는 재빨리 하준이, 하윤이를 안아 슬쩍 몸을 돌렸다. 동생들의 시선이 엄마, 아빠를 보지 못하도록 말이다.
사실 우리 앞에서 격렬한 스킨십을 할 리가 없는 엄마, 아빠였지만. 이렇게 하면 동생들이 좋아해서 한 것뿐이었다.
“아빠! 나도 뽀뽀!”
“나도!”
이렇게 하준이, 하윤이가 자기들도 엄마처럼 볼 뽀뽀를 해달라며 달려가는 풍경이 펼쳐질 수 있을 테니까.
그때였다.
멍! 하준이의 방에서 작은 강아지의 소리가 들려온 것은.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아빠가 그 소리에 하준이 방문을 바라보자.
“아빠. 잠깐만요.”
하준이가 쪼르르 방으로 가더니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품에 안고서 나타났다.
“오늘 서연이랑 도서관 다녀오는데. 박스 안에서 쪽지 하나랑 얘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어요.”
안 그래도 나도 설명을 들은 참이었다. 하준이가 서연이랑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는데. 구석에서 작은 낑낑 소리가 들려왔단다.
그래서 그곳으로 가보니 방금 가져다 놓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종이 박스. 그 안에 쪽지 하나랑 작은 강아지가 들어있던 것.
“어떤 집에서 애들이 하도 졸라서 시골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왔는데. 금방 싫어졌다고 해서 집에서 못 키우게 되었대요. 그래서 좋은 주인 만나라고 쪽지와 함께 둔 거래요.”
“저런. 누군지 몰라도 정말 책임감 없는 행동을 했구나.”
“맞아요. 반려동물을 선택할 때에는 정말 신중히 고민하고 해야 하는데. 이 아이가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걱정돼요.”
하준이의 글썽글썽한 눈동자가 강아지를 향한다. 낯선 환경, 그리고 한 번 버려졌다는 기억 때문인지. 강아지는 하준이 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잠시 그런 강아지와 하준이를 번갈아 본 아빠가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다.
“하준아.”
“네?”
“그러면 우리 하준이는 이 강아지를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많은 고민과 결심을 했니?”
아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안 된다가 아니었다. 방금 하준이가 했던 말처럼 강아지를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신중히 고민했는지에 대해 물은 것.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이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다.
“네! 제가 목욕도 시키고, 밥도 주고, 대소변도 치울게요!”
“나도!”
옆에 있던 하윤이도 돕겠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이미 하준이의 품에 안겨 있는 강아지를 본 순간부터 눈을 반짝인 하윤이었다.
아빠가 집에 오기 전까지 이름을 무엇으로 지어야 하나 둘이서 심각하게 토론을 하고 있었다면 말 다 한 거겠지.
잠시 하준이, 하윤이와 아빠의 대화를 지켜보던 엄마가 궁금했는지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런데 애가 똘망똘망하게 생긴 것 같긴 한데. 무슨 견종이니?”
안 그래도 그것도 확인하고 온 참이었다. 아까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는데 하준이에게 문자가 왔었다.
- 형아, 혹시 촬영 끝났어?
무슨 일인지 전화를 해보니 강아지를 주웠다면서. 자기와 이 강아지와의 만남이 운명이라며 들뜬 목소리로 말하던 하준이었다.
그 길로 수진 누나에게 부탁해서 근처 동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진찰부터 했다. 혹시나 어디가 아파서 버려진 아이가 아닌지 확인해야 했으니.
겸사겸사 이 아이가 대체 어떤 견종인지도 확인했다. 진찰이 모두 끝난 후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간단했다.
“얘가 시고르자브종이래요.”
“응? 무슨 종?”
“시고르자브종이요!”
하준이의 당찬 대답에도 아빠의 고개가 갸웃하신다. 푸들, 말티즈, 치와와. 이런 종류는 들어봤어도 시고르자브종이란 단어는 처음 들어보셨을 테니.
“시골 잡종을 조금 우아하게 표현한 거래요. 의사 선생님이 진찰한 결과 다양한 종이 섞인 믹스견이라고 했어요.”
“아, 똥···.”
“아니에요! 얘는 시고르자브종이에요!”
흔히 시골에서 쓰는 표현인 똥개라는 단어를 꺼내려다가. 하준이의 눈망울을 보고선 황급히 말을 삼키는 아빠였다.
그런 아빠와 하준이의 모습에 엄마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멍.”
한 번 버림받았던 기억 때문일까. 강아지가 아주 작게 짖으며 하준이의 품에 파고든다.
그런 강아지를 하준이가 보낼 수 없다는 듯이 껴안았다.
이런. 우리집에 새로운 식구가 생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