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아역 배우로 데뷔하고 나서 한동안은 가족끼리 밖을 다니기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어딜 가든, 얼굴을 가리든 간에. 배우 차서준임을 알아보고 달려드는 사람들. 그리고 쏟아지는 사인, 사진 요청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어머? 차 배우다. 동생들이랑 놀러 가나 봐.”
“나 저번 영화 진짜 재밌게 봤는데. 혹시 사인 요청하면 안 될까?”
“얘는. 차 배우가 가족들, 특히 동생들이랑 나올 때에는 팬서비스 요청을 좀 자제해달라고 했었잖아. 혼자 있을 때에는 얼마든지 해준다고.”
“아, 나 그거 옛날에 힐링 가족에서 봤는데 깜빡했네.”
이제는 괜찮아졌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과거 하준이, 하윤이가 어렸을 때에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 ‘힐링 가족’ 덕분이었다.
당시 ‘힐링 가족’에서 동생들과 함께 마음껏 다니고 싶은데. 그러기 힘들다고 말을 꺼내자. 기자들이 그걸 놓치지 않고 기사를 엄청 쏟아냈었다.
그 결과.
└ 차 배우가 가족들과 있을 때에는 자제를 좀 해야 돼요. 아직 어린 배우가 사람들에 지쳐서 떠나고 싶어 하면 안 되잖아요.
└ 맞음. 우리가 다른 커뮤니티에도 널리널리 알려서. 자제 의식을 좀 퍼트릴 필요가 있음. 막말로 차 배우가 혼자 있을 때에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요청하는 팬들 사인 다 해주고 가잖아.
└ 그래서 다들 차 배우, 차 배우 하는 거죠.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팬들을 사랑하잖아요. 심지어 팬미팅도 딱 비용만 계산해서 티켓값 잡고.
└ 가족들, 그리고 동생들과 어디 다닐 때에는 멀리서 보기만 하고. 나중에 혼자 있을 때 팬서비스 요청하면 다 해준다고 주변에 알려줘야겠네요.
└ 어? 마침 기사들도 엄청 뜨네요. 아직 어린 배우를 향한 과한 팬서비스 요구가 힘들게 한다고요.
배우 차서준이 혼자 있을 때는 마지막 사람까지 팬서비스를 해주지만. 가족들과 있을 때는 정중하게 다음 기회를 부탁드린다고 하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거기에 차서준 가족이 출연할 때 국민 예능이라고 불린 ‘힐링 가족’이었으니. 그 파급력이 제법 컸다.
마침 ‘힐링 가족’ 이야기를 하니 생각난다. 하윤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내 차기작이 할리우드 영화로 결정되어 하차를 결심했을 때. 이주연 PD가 너무나도 아쉬워했지.
“PD님. 대신 제가 종종 특별출연으로 나올게요.”
내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이주연 PD에게 이 말을 꺼냈을 때.
“어떻게요?”
이주연 PD가 그런 방법이 있냐는 듯 되물었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방법을 말했을 때. 이주연 PD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제가 PD님께 다음 가족으로 추천해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우승이 형이라고. 마침 소소한 하루에서도 오랫동안 같이 했었고. 또 거기 조카가 진짜 귀여워요.”
그 덕분에 가장 인기 있는 가족인 차서준 가족이 하차했음에도 제법 시청률을 선방할 수 있었던 ‘힐링 가족’이었다.
“시간이 될 때 영화 촬영 중인 절 응원하기 위해 우승이 형 가족이 놀러 와도 괜찮을 것 같고요. 어때요 피디님?”
어땠냐고? 저 말을 꺼냈을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보여준 이주연 PD였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과 찍은 ‘라이프’ 공약 실천 이후. 국민 연예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인기를 얻었기에 사람들도 다 알게 된 것이다.
동생들과 이렇게 놀러 갈 때에는 팬서비스를 요청해도 정중하게 거절한다는 것을.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긴 해도 동생들과 웃고 떠들며 갈 수 있었다.
“형아!”
“응?”
“나 오늘 추로스 먹고 싶어.”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른 하준이가 추로스를 먹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서연이에게 어떠냐고 묻는다.
“추로스?”
“응! 서연아, 너는 어때?”
하준아···. 형에게는 안 묻는 거니? 이 말을 꺼낼까 하다가. 또 동생 바보 소리를 들을까 애써 삼켰다.
원래는 하준이, 하윤이와 셋이서 가기로 했었지만. 하윤이가 단짝 친구인 은서랑 같이 가도 괜찮냐는 물음 덕분에 인원이 더 늘게 되었다.
“오빠, 혹시 은서도 같이 가면 안 돼? 내가 일요일에 오빠랑 놀이동산 놀러 간다고 자랑했는데. 자기도 거기 엄청 가고 싶었다고 부럽다고 했어.”
단짝 친구를 두고서 혼자만 놀이동산에 가기가 미안했던 모양. 저번에 하윤이가 은서네 가족을 따라 1박 2일로 놀러 다녀온 적도 있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배우 차서준이 6살에 샛별반 사총사 친구들과 끈끈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것처럼.
여전히 단짝 친구들과 영혼의 베프처럼 잘 지내고 있는 하준이, 하윤이었다.
오죽하면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고려하다가 하준이, 하윤이의 반대에 포기를 했을까.
한강이 보이는 비싼 집보다 친구들과 가까운 집이 더 좋다던 동생들이었다. 그건 서연이, 은서네 집도 마찬가지라고.
“오늘 무슨 놀이기구 타고 싶은지 생각해뒀어?”
내가 묻자 4명의 꼬맹이들이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한다. 제법 진지한 표정이 어떤 동선으로 어디서부터 타야 많이 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모양.
“회전목마는 꼭 타야 한다고 생각해.”
“맞아. 그거 타고 사진 찍으면 진짜 예쁘게 나와.”
회전목마는 빼놓을 수 없다고 말하는 하윤이와 은서.
“자이로드롭 타자.”
“그거 재밌긴 한데. 너무 무섭던데.”
“내가 손잡아 줄게. 그러면 덜 무서울 거야.”
하준아? 그런 건 어디서 배웠니? 서연이에게 무서우면 손잡아 줄 테니 자이로드롭을 타자고 말하는 하준이.
그렇게 뭘 탈까 고민하는 애들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난 누구랑 타지?
잠시 후.
놀이동산에 입장함과 동시에 가장 먼저 한 일은 간단했다.
“자, 각자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씩 머리에 쓰자.”
“정말?”
“정말요?”
바로 입장과 동시에 기념품샵에 방문해서 귀여운 머리띠를 사주는 것.
너무 예쁘다며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며 나누는 동생들의 대화는. 지켜보던 내 입가에 미소를 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오빠. 난 이거.”
“은서도 같은 걸로 할 거야?”
“네. 하윤이랑 같은 걸로 할래요.”
하윤이랑 은서가 서로 같은 머리띠로 고르고.
“서연아, 넌 이게 어울리는 거 같아.”
“그러면 하준이 넌 커플용인 이거로 하자.”
“응? 좋아!”
뭔가 크흠 하게 만드는 하준이와 서연이도 머리띠를 골랐다.
그렇게 고르고 계산대로 향하려는 순간.
“어?”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이 하나 있었다.
“오빠, 왜?”
“얘들아. 잠깐 이리 와볼래?”
바로 가방이었다. 딱 보는 순간 이거 애들이 메고 다니면 귀엽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귀여운 디자인의 가방.
실용성이야 없겠지만. 네 명이 나란히 저 가방들을 메고서 사진을 찍으면 귀엽게 나올 것 같다. 그러면 사야지.
“오늘 사진 많이 찍어줄 테니까. 여기서 자기 마음에 드는 가방 하나씩 고르자.”
“정말?”
“진짜?”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생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진다. 귀여움 하나만큼은 한눈에 들어올 만큼 디자인들이 좋았다.
가격이 안 좋아서 그렇지.
다른 사람들도 가방을 한 번씩 보다가 가격표를 보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다시 제자리에 놓더라.
“자, 다 골랐어?”
“응!”
“네!”
“그러면 계산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놀러 가볼까?”
내가 동생들을 데리고서 계산대로 향하려는 순간.
“오빠, 잠깐!”
하윤이가 나를 붙잡고서 잠깐을 외쳤다. 더 필요한 게 있나? 그런 생각으로 돌아보는 순간.
“왜 우리만 이거 다 하고. 오빠는 안 해?”
우리 하윤이가 참 생각이 깊어졌구나. 오빠도 챙기려고 하고. 정말 감동이야. 그런데 오빠는 안 해도 괜찮아요.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줬지만.
“안 돼. 오빠도 같이 사진 찍을 건데. 이거 머리에 써야지 귀엽게 나온단 말이야.”
소용없었다. 결국 무엇이 어울리는지에 대해 5개 정도를 머리 위에 올려본 다음에야, 동생들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마주할 수 있었다.
“너무 귀여우세요. 머리띠 5개, 가방 4개. 다 해서···.”
결국. 다섯 명의 머리 위에 귀여운 머리띠. 그리고 네 명의 등에 가방 하나씩을 메고서야 기념품샵을 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 가방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저것까지 하라고 했으면···. 어우.
기념품샵을 나오자마자 알아본 팬들이 카메라를 꺼내 든다. 사인 요청은 하지 않겠지만, 머리띠를 올린 내 모습은 저장해두겠다는 것.
아무래도.
흑역사 짤이 떠돌아다닐 것 같다.
놀이동산에서 몇 시간을 신나게 논 다음 향한 곳은 바이킹스 뷔페였다. 저녁 먹어야지.
입장과 동시에 펼쳐진 화려한 해산물 파티에 동생들의 입이 멍하니 벌어진다.
오늘 정말 신이 나게 놀았던 만큼. 중간중간 간식을 챙겨 먹었다지만 배가 정말 고팠을 거다.
“우와!”
“먹을 것도 엄청 많아.”
“맛있겠다!”
무엇부터 먹을까 떠들 줄 알았는데. 정작 이어지는 동생들의 행동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형아, 최고!”
“오빠 최고야!”
“고맙습니다.”
“너무 좋아요.”
동생들이 우다다 달려와 오늘 이곳에 데려온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다.
아직 쓰고 있는 머리띠와 메고 있는 가방들이 더 귀엽게 보이게 만든다.
아, 동생들의 머리띠를 보니 생각났다. 아직 내 머리 위에도 아직 머리띠가 존재한다는 것이.
어쩐지. 아까 입장하는 나와 동생들을 보고서 직원들이 잠깐 웃음을 터트렸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아차린 셈이다.
“자, 먹고 싶은 것들 가져다 먹으면 돼. 대신 너무 많이 가지고 와서 남기면 안 돼요. 알았지?”
“네!”
“알았어!”
일부러 서울의 많은 뷔페 중 이곳으로 고른 이유가 있었다.
“행복해!”
대게 사랑꾼들인 하준이, 하윤이에게 있어. 랍스터 뷔페인 이곳만큼 행복한 곳이 어디 있겠어.
*
며칠 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배우 차서준의 흑역사 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늘 놀이동산 갔다가 차 배우랑 동생들 봤어요.]
하준이, 하윤이 단짝 친구들이랑 같이 다섯이서 왔더라고요.
몇 년 전에 차 배우를 직접 봤을 땐 귀염귀염했는데. 어느새 심쿵하게 만들 정도로 쑥 컸네요.
진짜 팬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멋지게 자랐더라고요.
그.런.데.
(사진 첨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동생들이 머리띠랑 가방 메고 있는 거 보고 너무 귀엽다! 했는데.
우리 차 배우 머리 위에도 귀욤한 머리띠가 있더라고요. ㅋㅋㅋ
정말 오랜만에 서울에 온 거라 사인 요청하고 싶었지만. 동생들이랑 놀러 온 거니 꾸욱 참았어요. 다른 분들도 엄마 미소 지은 채로 사진만 찍더라고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머리띠 귀엽네요. 알기론 차 배우가 저런 거 안 쓰는 걸로 아는데. 아마 하준이, 하윤이 덕분에 쓴 듯. ㅋㅋㅋ
└ 사진 부탁해서 다섯이서 찍는 것도 있는데. 너무 귀여워요. 그보다 하준이, 하윤이 단짝 친구들 우정 진짜 부럽네요.
└ 차 배우도 샛별반 사총사 친구들 있잖슴. 어? 그렇게 보니 차 배우보다 하준이가 부러운데? 하준이 단짝 친구는 여자아이잖아. ㄷㄷ
└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들 보니까. 하준이도 단짝 친구 손 꼬옥 잡고 다니네요. ㅋㅋㅋ 놀이기구 탈 때 차 배우만 혼자 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저도 그날 놀이동산에 있었는데. 커플 중에 여자가 차 배우 팬이었는지. 남친 버리고 홀라당 차 배우 옆에 앉음. ㅋㅋㅋㅋㅋㅋㅋ 남친이 못 타고 차 배우랑 앉는 거 찍어주더라. ㅠㅠ
“푸하하. 서준아, 이거 너무 귀여운데? 다음에는 형이랑 놀이동산 한 번 놀러 가자. 어때?”
그 사진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김정범이 배꼽이 빠져라 웃으며 사진 속 나와 눈앞의 나를 번갈아 본다.
“형?”
“미안. 이제 고2가 되었다고 예전처럼 귀여운 모습이 사라졌나 싶어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사진으로나마 보고 나니까 좋아서 그랬어.”
참아야지. 다른 사람도 아닌 정범이 형이었다.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나를 위해 ‘학교 생존’ 특별출연을 수락한 형이었으니까.
그런 나와 김정범을 보면서. 주변 스태프들이 수군수군거리고 있었다.
“아니. 다른 배우들은 촬영 전만 되면 감정 잡느라 분위기부터가 다른데. 저 둘만 완전 소풍 온 느낌이네요.”
“김정범이야 배우 생활만 몇 년 차인데. 차서준의 연기력은 뭐 말할 필요도 없고.”
“그래도 오늘 정말 중요한 장면 아니에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 촬영 시작합시다!”
박성필 감독이 등장해 외쳤다.
넷티비 드라마 촬영의 장점은 시간에 쫓겨 앞 장면부터 찍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있었다.
오늘 찍을 촬영은 김정범이 연기하는 권길형의 비열한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모두를 놀라게 만들 깜짝 장면이 하나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