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몇 달 전.
박성필 감독은 사실 캐스팅 단계서부터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했었다.
“누구? 김도윤?”
“네. 서도현 대표가 있는 구름엑터스 어린 배우잖아요. 차서준도 거기 소속이고요.”
김도윤에 대해선 박성필 감독도 익히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차서준의 사총사 친구로 각종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 몇 번이나 언급되었는데.
심지어 차서준과 같이 아역 배우로 데뷔까지 했으니. 업계 종사자라면 배우 김도윤에 대해 모를 수가 없는 셈이다.
연기력도 꽤나 괜찮다고 들었다. 차서준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역대급 천재에 가려져서 그렇지. 방송가에서는 알음알음 ‘김도윤? 걔도 제법 연기 잘하던데?’ 이런 말이 떠돌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김도윤을 그 역에 캐스팅한다 치고. 혹시 차서준은 안 될까?”
박성필 감독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시선이 되돌아온다.
순간 자신의 입을 통해 뱉어진 말이었지만. 박성필 감독 본인이 생각해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긴 했다.
“크흠. 아니, 마침 차서준이 휴식 기간이잖아. 아직 차기작 결정했다는 소식도 없고. 그냥 찔러만 보자는 거지. 솔직히 우리 작품 괜찮잖아.”
“괜찮은 게 아니라 정말 대박이죠. 그런데 차서준이 한국에서 작품 하려고 할까요? 당장 3연속 할리우드 거물 감독들이랑 같이했는데?”
그것도 그랬다. 차서준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한국에서 작품을 한단 말인가.
당장 할리우드의 유명감독들조차 아직 학생 신분인 차서준에게 맞춰 촬영 스케줄까지 조정해주는 판에.
“우리 김 작가 이번 대본이 죽이긴 하지. 그러면 이렇게 하자.”
“어떻게요?”
“김도윤한테 대본 넣는 김에. 그냥 미친 척하고 차서준한테도 넣어 봐. 혹시 알아? 성사되면 그림 좋잖아. 사총사 친구들의 첫 주연 드라마.”
모두가 1등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로또를 사는 게 아니었다. 꿈과 희망. 그리고 혹시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까지.
그렇게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김도윤을 캐스팅하면서 차서준에게 슬쩍 제안만 해봤던 박성필 감독이었다.
그런데.
차서준에게서 출연하겠다는 답변이 왔다.
‘미쳤네. 차서준이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상대 배우의 호흡이 살아났어.’
박성필 감독은 왜 할리우드의 많은 감독들이 배우 차서준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본 리딩과는 또 달랐다. 그때는 ‘역시 차 배우야.’ 이렇게 차서준이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에 감탄했다면.
지금은 상대 배우의 호흡까지 끌어내는 차서준의 말도 안 되는 연기 내공에 경악을 감출 수가 없었다.
“들었냐고! 또 죽었어!”
“쉿. 목소리 낮춰.”
“나, 나 너무 무서워.”
“정신 차려. 분명 그 괴물은 눈앞에 있는 것도 못 피하고 부딪치면서 움직였어. 앞을 못 보는 게 분명해.”
차서준과 단역 배우가 교실 구석 안에 숨는 씬이었다. 마치 진짜 괴물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단역 배우의 호흡이 가파르다.
저 단역 배우가 숨겨왔던 연기 재능을 갑자기 만개했을 리는 없다. 어제 있었던 촬영에서 기대에 조금 못 미치는 모습을 수차례 확인했으니까.
그렇다면.
‘차서준이네. 자연스럽게 상대 배우까지 현재 상황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거는 진짜 연기 내공이 엄청 쌓인 원로 배우들만 할 수 있는 건데.’
범인은 차서준이었다. 눈동자 너머 일렁이는 감정의 소용돌이, 떨리는 몸, 가끔씩 툭툭 튀어나오는 두려움 섞인 숨소리까지.
차서준의 저런 섬세한 표현이 상대 단역 배우가 마치 진짜 이곳이 괴물이 튀어나온 현실이라고 몰입하게 만든 것이다.
“커엇!”
박성필 감독이 만족에 찬 오케이 사인을 외치자.
“와, 이래서 같이 촬영했던 선배님들이 차 배우, 차 배우 했던 거구나.”
“미쳤네. 저게 고작 18살의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연기라고?”
“나 보면서 진짜 숨도 삼켰잖아. 진짜 저기 아래서 괴물이라도 쫓아올 거 같아서.”
“이거 나중에 음악까지 넣어서 완성된 화면으로 보면 죽이겠는데요?”
그제야 숨까지 참고 지켜보던 스태프들의 입에서 감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최아라는 자신이 있었다. 비록 자신이 이번 작품에 초반에 죽음을 맞이하는 단역이지만. 확실하게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자신이.
그런 최아라가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다.
“다시! 방금 뒤에서 괴물이 쫓아온다는 지문 못 봤어? 계주하듯 달리는 게 아니라. 극한의 공포에 쫓겨 도망쳐야지.”
단역을 전전하던 그녀에게 넷티비처럼 과감하게 CG 촬영에 투자하는 작품 출연이 처음이라는 것.
상대 배역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대사를 하는 것과. 이런 초록 배경 안에서의 CG 촬영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최아라는 몇 번의 NG 끝에 간신히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아라 씨. 오늘은 좀 아쉬웠어. 내일은 잘 준비해서 왔으면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지?”
박성필 감독이 까다로운 주문을 하는 게 아니었다. 실제 최아라가 어느 부분에서 부족했는지. 촬영된 장면을 몇 번 반복하며 보여주면서 디렉팅까지 해주었으니까.
실제 그녀가 보기에도 자신의 연기력이 다른 배우들에 비해 손색이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특히 오늘 촬영은 그 유명한 배우 차서준과 단둘이 도망치는 장면. 최아라는 본격적인 촬영 시작 전부터 심호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쿵! 쿠웅!
분명 후반 작업을 위해 소리를 내지 않았음에도 들려온다. 입가에 피를 질질 흘리며 다음 먹이를 찾아 헤매는 괴물의 묵직한 걸음 소리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이 그 진동에 따라 움찔움찔 반응하며. 최아라에게 괴물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흐윽.”
“쉿. 너 아까 책상 밑에서 숨죽이고 있어서 저 괴물을 피했다고 했지?”
“으, 응. 분명 눈을 마주친 것 같았는데.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지나쳐갔어.”
마치 조금 있으면 죽음이 닥칠 것 같은 공포스러운 감정이 치솟은 건. 초조, 긴장, 두려움의 격랑이 몰아치는 차서준의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였다.
흔히 말하는 직접 마주하여 무서운 것이 아닌. 그 알 수 없는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준 것.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최아라는 지문에 적힌 속으로 애써 삼키며 흐느끼는 연기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끄아악!”
다시 터지는 비명소리. 그리고 으적으적 무언가가 뼈째 씹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까지.
결국 서서히 조여 오는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최아라가 작은 비명을 터트렸다.
“들었냐고! 또 죽었어!”
“쉿. 목소리 낮춰.”
“나, 나 너무 무서워.”
“정신 차려. 분명 그 괴물은 눈앞에 있는 것도 못 피하고 부딪치면서 움직였어. 앞을 못 보는 게 분명해.”
복도를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 눈앞에 차서준이 조금씩. 아주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게 떨리는 몸으로 자세를 낮추고 있었으니까.
괴물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차서준의 손이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최아라를 누르는 손길의 그 떨림이. 그 안에 담긴 감정이 그녀에게 서서히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
교실 창문 위의 무언가와 시선을 마주한 차서준의 표정을 보게 되었을 때.
최아라는 결국 비명을 터트리고 말았다.
“커엇!”
박성필 감독의 만족 가득한 오케이 사인이 들리자.
“와, 방금 표현 좋았는데요?”
“예?”
마치 방금 전 최아라가 보던 모습은 신기루라도 되는 것처럼. 차서준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의 방금 연기를 칭찬했다.
그 모습에 아직 몰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최아라는 얼빠진 얼굴로 ‘예?’ 하고선 되물을 수밖에 없었고.
“조금 있다가 다음 장면에서 제가 손을 잡고 달려! 하고서 외칠 거예요. 그러면 누나는 여기 지문처럼···.”
자기가 어떤 식으로 다음 장면에서 행동할지 설명하는 차서준을 보면서. 최아라는 진짜 천재의 재능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단역인 최아라가 찍을 장면이 몇 씬 남지 않았지만. 어떤 감정을 잡고서 연기를 해야 할지 확실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최아라가 조심스럽게 고마움을 표하는 순간.
“방금 잘했어요. 다음 장면에서도 그 감정을 떠올리면 꽤나 좋은 연기가 나올 거예요.”
차서준이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
오늘은 김정범의 촬영이 없기에, 나와 김도윤 둘이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아직 촬영 초반부이지만. 쉬지 않고 떠드는 김도윤의 표정이 밝았다. 오늘 박성필 감독님의 칭찬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
“아까 감독님이 내게 한 칭찬 들었어? 대본 리딩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어보셨다니까.”
“내가 그랬잖아. 너 계속 연습하면 할수록 엄청나게 좋아진다고.”
“알아. 근데 이게 막상 내가 대사를 뱉을 때에는 막 발전한 것 같다, 이런 게 잘 느껴지지가 않았거든.”
이해한다. 원래 발전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닌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칭찬을 한다 해도 김도윤의 입장에선 더 열심히 하라는 당근처럼 느껴졌겠지.
그 당근이 사실은 진실이었음을 오늘 촬영장에서 느낀 것이다. 그것도 모두의 인정을 받으면서.
“아까 감정씬에서 사람들 표정 봤어? 진짜 대박이었잖아. 안 그래요 누나?”
“맞아. 오늘 촬영장 분위기 너무 좋다고 다들 그 이야기 하더라.”
김도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까 이야기를 꺼낸다.
오늘 촬영이 제법 순조롭긴 했다. 박성필 감독의 입에서 '다시.‘ 라는 말이 거의 나오질 않았으니까. 흔히 말하는 ‘대박’이 느껴지는 촬영장의 분위기였다.
거기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 장면도 몇 개 뽑았으니. 아마 촬영된 장면에 후반 작업이 추가되고 나면 꽤나 좋은 장면이 완성될 터였다.
“도윤아.”
“응? 아, 맞다. 흥분할 때가 아니지.”
역시. 어릴 때부터 조기교육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다. 오늘 있었던 일에 기뻐하며 만족하는 게 아니라. 다음 촬영을 미리미리 준비한다.
김도윤이 가방 속에서 다음 촬영 대본을 주섬주섬 꺼내는 걸 보면서. 나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서준아, 진짜 부족하다 느껴지면 고쳐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도 괜찮아. 나 오늘 확실하게 느꼈어. 우리 서준 쌤의 말은 무조건 옳다고!”
김도윤이 이를 악물고 열심히 준비하려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지금 촬영 중인 넷티비 드라마 ‘학교 생존’이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되기 때문.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던 배우 차서준의 넷티비 드라마 복귀작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커질 것이 분명한 상황.
“이번에 진짜 최고의 연기를 선보여서. 나도 서준이 너처럼 더 넓은 무대에 도전할 거야. 그러니 도와줘!”
어찌 도와주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와 비교를 해도 포기하지 않은 친구가 김도윤이었다.
그런 친구의 불타는 열의는 외면하면 안 되지.
“마침 잘됐네. 그러면 내일 토요일이고 오후 촬영이니까. 너 아침 일찍 회사로 와.”
“···응? 아, 아침 일찍?”
“어. 설마 너 내일 토요일이라고 늦잠 자려고 했던 건 아니지?”
내 물음에 김도윤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절레절레 아니라고 대답했다.
*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 좋은 점은 무엇일까.
바로.
“하준아, 하윤아. 우리 일요일에 놀이동산 갈까?
“진짜?”
“정말?”
이제 동생들과 셋이서 편하게 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에는 집 앞 놀이터면 몰라도, 멀리 나가면 엄마가 당연히 걱정을 하셨으니까.
이제는 내가 18살이 되었고. 동생들도 초등학생이 되었는지라 셋이서 다녀도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
비록 아직 미성년자라 운전면허를 따진 못했지만. 서울은 대중교통이 정말 잘 되어 있으니 상관없었다.
“그러면 우리 놀이동산은 어디로 갈까?”
“용인!”
“서울!”
이런. 하준이, 하윤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 갈렸다. 하준이는 간 김에 동물도 보고 싶어서 용인을 외친 듯싶다.
그러면 이럴 때 지혜로운 방법이 있다.
“이번 주는 놀이동산 가고. 다음에 주말 시간 날 때 동물원 가려고 했는데. 하준이 생각은 어때?”
둘 다 가면 된다.
“그러면 나도 서울!”
효과는 훌륭했다! 다음에 동물원에 가자는 말에 하준이도 손을 번쩍 들고서 서울로 가자고 한다.
작년에 셋이서 대중교통을 타고 용인에 갔다가 조금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일요일에 놀이동산에서 놀고. 저녁에 나와서 하준이, 하윤이가 좋아하는 바이킹스 뷔페도 가자. 알았지?”
“너무 좋아!”
하윤이가 기쁨을 참지 못하고 나를 와락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