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연사모 형들을 만날 때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가장 첫 번째 변화는 우리가 모이는 장소가 새롭게 탄생한 것.
마지막 주자였던 박우형이 결혼한 이후로. 연사모 형들과 내가 만날 새로운 곳이 필요해졌다.
“응? 그러면 잘됐네. 마침 세입자가 나간 주택 하나가 있거든. 주차장도 좀 넓고, 조용한 곳에 위치해 있으니. 거기 쓰자.”
“그래도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이제 서로 집에서 밤늦게까지 있기도 좀 그래질 테고. 식당이나 이런 곳에는 주변 시선도 의식해야 하고 불편하잖아.”
그 결과, 김우승이 가지고 있는 집 중 한 곳을 연사모 모임 장소로 사용하기로 했다.
오늘도 형들과 만나기 위해 아지트에 도착한 참이었다. 오는 길에 김우승이 나를 픽업했고. 박우형은 따로 왔다.
“정범이 형이 늦네요?”
“와이프 퇴근하고 애기 맡기고 온다고 했으니까. 아까 출발한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새로운 아지트는 꽤나 좋았다. 전처럼 거실 대형 TV로 같이 작품을 보면서 맛있는 것을 먹을 수도 있고. 또 침대를 놓은 방도 몇 개 있어 잠도 잘 수 있으니 말이다.
약간 외곽에 위치해 추가 배달비가 붙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다.
이곳 내부는 형들과 내가 돈을 모아서 완성했다. 아직 어린 나는 안 내도 된다고 했는데.
- 올해 광고 수입 1위는? 국민 연예인 배우 차서준.
이 기사를 보고선 보태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인 형들이었다.
작년에 데이븐과 가르시아 알렌이 한국에 놀러 왔을 때. 호텔에서 지내기보다 여기 와서 머물다 갔다면 말 다 한 거지.
또 한 가지 다른 변화는.
“늦어서 미안.”
“왔어?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한 것 같아. 정범이 형은 왜 그리 피곤해 보여?”
“어우. 말도 마라. 애가 밤새 우렁차게 우는데. 와이프가 아침 일찍 출근이라, 애 재우느라 한숨도 못 잤잖아.”
대화 주제에 ‘육아’가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연이지, 운명인지 작년에 나란히 득남, 득녀를 한 김정범, 박우형이었다.
나도 엄마를 도와 하준이, 하윤이를 돌본 경험이 있는지라. 형들과 함께 육아에 대해 제법 이야기를 할 것들이 많았다.
자기는 피곤에 눈 밑에 다크써클이 한가득인데. 정작 멀쩡해 보이는 박우형이 눈에 들어왔는지. 김정범이 박우형을 향해 물었다.
“우형이 형은 괜찮아? 애가 밤에 안 울어?”
“어. 밤 되면 조용히 자.”
그 대답을 들은 김우승이 웃음을 터트리며 김정범을 놀렸다.
예전에 김우승이 육아에 지쳐 피곤한 얼굴로 나타났을 때. 김정범이 놀리자 두고 보자며 오늘만을 기다린 우승이 형이었으니까.
“저거 봐. 애들은 아빠를 닮는다니까. 그래도 조금 더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나저나 어떻게 되다보니 우리가 육아를 하고 있네.”
“어? 정말 보니까 그러네요?”
정말이었다. 과거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회사까지 관두고 도전했던 사람이 김청아였다.
그런데 나 때문에 김우승을 만나게 되었고. 또 갑작스럽게 애가 생기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내심 미안함을 가지고 청아 누나에게 괜찮은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정작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괜찮아. 우승 오빠가 정말 좋은 사람이고. 평생 같이하면서 응원해줄 내 사람이 생긴 거잖아. 그리고 서준이가 봐도 나는 주연보다는 명품 조연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니?”
“맞아요. 제가 봤을 땐. 누나 연기력이 좋아서. 조금만 더 다듬으면 찾는 감독님들이 엄청 많아질 것 같아요.”
사실 김청아의 생각이 정확했다. 청아 누나는 연기를 너무 좋아하고, 또 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 꼭 자신이 작품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김청아였다. 육아를 하면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아 더 좋아지기도 했고.
조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니. 김우승과 번갈아 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청아 누나 이번 작품에서 캐릭터가 너무 좋다고 사람들이 엄청 칭찬 많이 하던데요?”
“그거 다 서준이 네가 도와줘서 그래. 안 그래도 고맙다고 집에 한 번 오라던데.”
“다음에 시간 될 때 갈게요. 지금은 누나가 촬영 준비에 바쁘잖아요.”
내 대답에 김우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한다.
이어지는 화제는 당연히 내가 출연할 예정인 넷티비 드라마 ‘학교 생존’이었다.
심지어 오랜만에 넷티비 드라마를 찍는 날 위해 특별출연을 결심한 김정범도 있었으니까.
“준비는 좀 어때? 오랜만에 정범이 형이랑 같이 하는 거 아니야?”
“잘 되어가고 있어요. 사실 정범이 형이 특별출연을 해준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내가 김정범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자. 김정범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빳빳이 핀다.
“엣헴. 서준이 너 나한테 잘해야 돼. 그 담임 역할 배우 못 찾아서 박 감독이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알지?”
“알죠. 형 고마워요.”
이번 ‘학교 생존’에는 중간 분위기 메이킹 역할을 하는 캐릭터가 하나 있었다.
바로 주인공들의 담임선생님 권길형 역이었다. 오죽하면 박성필 감독이 딱 맞아떨어지는 배우를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았을까.
그때 서도현이 박성필 감독에게 추천한 배우가 김정범이었다. 이제 탑급 배우가 된 정범이 형이었지만. 날 위해 흔쾌히 악역 조연을 수락한 것이다.
처음에는 정의로운,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위험을 무릅쓸 것 같은 권길형이었지만. 중간에 생존을 위해 앞서 달려가던 반 여학생의 뒷덜미를 잡아채 던져버리는. 말 그대로 죽음 앞에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물.
“연습할 때 정범이 형의 연기 보고서 깜짝 놀랐잖아요.”
“왜? 원래 저 형 그런 연기는 특히나 잘했잖아.”
“알고는 있었는데. 이제 깊이가 느껴지더라고요. 이쪽 연기의 대가가 된 대배우를 만난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어요.”
내 극찬에 가까운 말에 김정범의 표정이 헤벌쭉하게 변한다. 그러면서 ‘에이, 원래 그랬어.’ 라며 손을 저었지만. 입꼬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더더더 칭찬을 해달라고.
“사실 정범이 형이 저 때문에 출연을 결심한 거잖아요. 정말 성공하면 다 형 덕분일 거예요.”
효과는 매우 훌륭했다. 방금 전까지 잠을 못 잔 피로가 보이던 김정범이었는데. 어느새 개운해진 표정으로 얼마 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맞지. 그래도 역시 서준이는 서준이더라. 대본 리딩에서 서준이 연기에 다들 깜짝 놀랐다니까. 서준이 넌 어땠어?”
“오랜만에 한국말로 한 대본 리딩이었는데. 꽤나 만족스럽더라고요.”
“다들 잘하지? 이번에 박 감독이랑 김 작가가 배우들 뽑을 때 연기력을 가장 우선으로 봤다잖아.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지도 면밀하게 따져보고.”
배우 차서준의 몇 년 만의 복귀작이었다. 작품이야 꾸준하게 해왔다지만, ‘왕자의 난’ 이후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나였으니까.
거기에 나 덕분에 탑급 배우인 김정범을 특별출연으로 모실 수 있었다. 당연히 나머지 배우들 캐스팅에도 특별히 신경 쓴 것이다.
흥행할 수 있는 최고의 판이 깔렸는데. 괜히 연기 구멍을 뽑아서 몰입감을 흔들 필요는 없을 테니까.
배우들의 실감 나는 연기를 통한 극한의 긴장감이 작품의 생명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한국에서 하니 촬영이 편하겠네?”
“맞아요. 매번 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타이트하게 찍다 보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번에는 학교 끝나고 촬영장만 가면 되니까 최고예요.”
내가 말하자 형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잠시 웃음이 지나간 뒤.
“서준아.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게 있어.”
박우형이 나를 향해 말을 꺼냈다. ‘연기’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조금은 도움을 줄 말이 떠오른 모양.
“거의 5년이란 시간을 할리우드에서만 촬영을 하고 복귀한 거잖아? 그러다 보니 그동안 새롭게 촬영 현장에 뛰어든 이들에게는 차서준이라는 배우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볼 수밖에 없을 거야. 저 친구는 아마 몇 년 전과 달라졌겠지. 촬영 현장에서 감독조차 휘두르는 거 아니야? 이렇게. 사실 걱정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서준이 네가 조금만 조심하면 좋을 것 같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넷티비 드라마라곤 하지만. 배우 차서준의 한국 복귀 선택은 해외에서도 의외라는 시선을 보내곤 했으니까.
할리우드에서조차 의외란 시선을 보내고 있는 상황인데. 국내 촬영 스태프들의 입장에선 더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우형이 형. 걱정하지 마. 쟤가 6살에 데뷔해서 지금까지 보여준 게 얼만데. 그래도 처음 모습 그대로잖아.”
“맞아. 뭐, 첫 촬영을 하기 전까지는 뒷말이 조금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서준이 촬영장에 딱 뜨는 순간 그 이야기들 싹 사라질걸?”
*
넷티비 드라마 ‘학교 생존’의 촬영장.
“차서준이 정말 오랜만에 한국에서 작품 하는 거 아니에요?”
“몇 년 만이더라.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찍은 작품이 왕자의 난 시즌1이었으니까. 정말 오래되긴 했네.”
“대체 왜 돌아왔을까요? 지금도 같이 하자는 할리우드 감독들이 많다고 하던데.”
준비에 한창인 스태프들 사이에서 뜨거운 주제는 당연 배우 차서준에 관한 것이었다.
‘학교 생존’이 할리우드에서만 작품을 하던 배우 차서준의 한국 복귀작이었으니까.
학교야 한국에서 계속 다녔다지만. 촬영은 할리우드에서 했기에, 요 몇 년 사이에 이 판에 들어온 스태프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편하게 촬영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아니. 솔직히 이제 차서준 정도의 위치면 이번 감독님도 쉽게 터치 못 할 거 아니에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할리우드야 스타 위에 감독들이 많다곤 하지만. 국내에서 그 정도 급의 감독은 몇 없었으니까.
‘라이프’의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 이후 찍은 두 작품의 감독들 역시 명감독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 편하게 촬영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복귀한 게 아니냐는 뒷말이 스태프들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차서준 평소 인성이야 물어볼 필요도 없이 유명하지만. 그래도 촬영 현장에서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왜? 할리우드에서도 딱히 잡음이 나오거나 그런 적은 없었다며.”
“노는 물이 달라졌잖아요. 당장 같이 호흡을 맞추던 배우가 할리우드 탑스타들이었는데. 거기에 감독의 이름값부터가 무게감이 다르잖아요.”
꽤나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아무리 초심을 지키려고 다짐을 한다한들 사람이라면 당연히 변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대화를 나누고 있는 스태프 본인도 신입이던 3년 전과 비교하면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사람이 좋다는 것과, 프로 정신은 다르잖아요. 저번 작품 촬영 때 주연 하나가 짜증 부리는 거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반사판 각도 미세하게 틀어졌다고 난리 치는 건 좀 심하긴 했지. 그래도 그렇지. 차서준이 정말 그럴까?”
“글쎄요. 보면 알겠죠, 뭐.”
잠시 후.
대화의 주인공인 차서준이 도착했다. 사총사 친구로 알려진 김도윤, 연사모의 김정범과 함께.
그리고.
“안녕하세요! 어? 감독님 진짜 오랜만에 뵙는 거 아니에요?”
“서준이 왔구나? 키는 훌쩍 컸는데 웃는 모습은 그대로네?”
“당연하죠. 이번에 감독님과 함께하니 걱정할 필요도 없겠는데요? 잘 부탁드립니다. 어? 안녕하세요.”
차서준의 등장과 동시에 촬영장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순식간에 활기가 확 불어넣어지는 느낌이랄까.
“어어? 차 배우 정말 오랜만이야. 나 기억하고 있었어?”
“에이, 당연하죠. 형을 처음 봤을 때가 막내 스태프로 들어왔을 때인 거 같은데. 맞죠?”
“맞아. 이번에도 잘 부탁할게.”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과거 촬영 당시 막내 스태프로 활동했던 이들까지 기억하는 걸 보고. 차서준에 대해 걱정을 하던 스태프들이 웅성웅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옛날 소문 그대로인 거 같은데? 그때도 차서준만 등장하면 촬영장 분위기가 확 산다고 그랬거든.”
“그러게요. 신기하네.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는 탑급 배우가 되었으면 고개가 좀 빳빳해질 만도 한데. 누가 보면 신인 배우가 등장한 줄 알겠어요.”
“거 봐. 색안경을 끼고 보면 안 된다고. 자, 곧 촬영 시작할 테니 마무리하자고.”
다시 분주히 준비를 하던 그들이 경악하게 된 건. 차서준이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섰을 때였다.
“레디! 액션!”
감독의 외침과 동시에.
차서준의 눈빛이 돌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