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어느새 13살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형아! 나 진짜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는 거야?”
“그러엄. 이제 하준이가 초등학생 되는 거야. 싫어?”
“아니! 얼른 커서 의사 선생님 될 거야!”
참고로 하준이가 말하는 의사 선생님이란 동물들을 진찰해주는 수의사였다.
처음에는 어린 나이의 꿈인 줄 알았는데. 내 손을 붙잡고 도서관으로 가서 동물 관련 책들을 찾아볼 정도로 열의가 넘쳤다.
어릴 때부터 동물들을 그렇게 좋아하더니. 나중에 정말 하준이가 수의사 선생님이 된다면 당연히 병원을 차려줘야지. 그러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
“그런데 형.”
갑자기 왜 그러지? 방금 전만 하더라도 수의사 선생님이 되겠다며 방방 뛰던 하준이었는데.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얼굴로 나를 부른다.
그런 하준이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걱정이 되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만약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다른 학교가 되어서 서연이랑 헤어지게 되면 어떻게 해?”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하준이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기 때문에. 이미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같이 배정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모양.
“음. 그러게. 어떻게 하지?”
덩달아 나도 그건 몰랐네? 하는 표정으로 같이 고민을 시작하자. 하준이가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낸다.
아마 단짝 친구인 서연이에게 보내는 것 같은데. 살짝 훔쳐만 보자.
- 서연아. 오늘 뭐해?
응? 내가 생각한 하준이의 문자 내용은 ‘만약 우리가 다른 학교로 가게 되더라도 계속 친하게 지내자.’ 이런 비슷한 것일 줄 알았는데.
우리 하준이는 서연이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으니 만날 생각부터 한 듯싶다.
하준이가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서연이를 만나게 할 순 없지. 옆에서 보면 어떤 마음인지 다 보이는데 말이다.
만나서 심각한 얼굴로 ‘서연아, 우리 다른 학교가 되어서 헤어지면 어떡해?’ 이렇게 말했다가 ‘하준이 너 바보야? 이미 같은 학교잖아.’ 이런 소리라도 들으면 안 되잖아.
“하준아.”
“응?”
“형이 다녔던 초등학교 알지? 집에서 엄청 가깝잖아.”
“응. 알고 있어. 왜?”
“하준이는 서연이랑 같이 여기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내년에 같은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어. 형이 지금까지 다녔던 학교로 가게 될 거야. 알겠지?”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심각한 얼굴로 답장을 기다리고 있던 하준이의 고개가 홱 하고선 나를 향한다.
서서히 기쁨으로 물드는 표정 변화를 보고 있자니.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진짜? 진짜야? 나 서연이랑 안 헤어져?”
“당연하지. 마침 서연이에게 답장이 왔네. 놀이터 나갈 준비 하고 있다고. 형이랑 같이 나가서 놀다가 서연이랑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갈까?”
“정말? 형아 최고야!”
역시 효과는 훌륭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상 심각한 얼굴을 하던 하준이가 방긋 웃으며 나를 안아준다.
그때였다.
“나는!”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던 하윤이가 불쑥 나타난 것은. 볼이 빵빵한 것이 하준이에게만 나가자고 한 것이 내심 서운한 모양.
코오 낮잠을 자고 있기에 놔두었는데. 어느새 일어나 우리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방금 막 깨어났는지 하윤이의 눈가엔 아직 잠기운이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어이쿠! 우리 하윤이가 거기 있었네? 아까부터 보고 싶었는데 자고 있어서 오빠가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는걸.”
내가 하윤이를 안아주며 말하자.
“징짜?”
하윤이가 방긋 웃으며 진짜냐고 묻는다.
“진짜지. 그러면 하윤이 친구 은서도 불러서 같이 놀다가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너무 조아!”
‘오빠가 말하는 맛있는 거 = 진짜 맛있음’이란 공식이 있는 하윤이가 나를 꼬옥 안아준다.
아,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하준이와 서연이가 같은 학교가 되더라도. 반 배정은 갈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음. 이걸 지금 말하면 저 방긋방긋한 얼굴이 다시 시무룩해지겠지.
말하지 말아야겠다. 혹시 모르잖아. 운명처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 될지도.
“형아! 서연이가 나오겠대!”
“엉아! 은서 나온대!”
빨리 외출용 옷을 입어야 된다고 서두르는 하준이, 하윤이를 보면서.
“밖에 날씨가 정말 추워. 불편하더라도 따뜻한 패딩이랑 내복 입어야 된다고 했지. 하윤이, 너 얼른 가서 내복 바지 가지고 와.”
나도 모르게 그만 잔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나저나 하준이의 재밌는 고민을 듣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총사 친구들도 같은 중학교에 배정을 받아야 할 텐데.
잠시 후.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또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있는 치킨집에서 배가 빵빵해지도록 먹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우리 서준이가 동생들이랑 엄청 잘 놀아줬나 보네?”
엄마, 아빠가 어느새 코오 잠이 든 하준이, 하윤이를 보며 말했다.
“네. 놀이터에서 서연이랑 은서 만나서 놀고. 요 앞 치킨집에서 맛있게 먹고 돌아왔거든요.”
제야의 종이 울리기 전까지 기다리기엔. 아까 너무 신이 나서 뛰어다닌 동생들이었다.
“벌써 일 년이 다 지나가다니. 엄마가 느끼기에는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
엄마가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그 손길이 좋아 나는 엄마를 꼬옥 안아주었다.
“맞아요. 시간이 정말 빠른 것 같아요. 하준이가 벌써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고. 또 하윤이도 엄청 컸잖아요.”
정말로. 어느새 하준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하윤이도 벌써 7살이 되었다.
그런 내 대답이 의외였음일까. 머리 위에서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거기에 옆에서 빵 터지신 아빠는 덤이었다.
왜 웃으시지?
“엄마는 동생들보다 우리 서준이가 너무 빨리 자라는 것 같은데? 뒤돌아보니 어느새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잖니. 안 그래요 여보?”
“당연하지. 마냥 아기 같았던 우리 아들이 어느새 국민 연예인 소리도 듣고 있는데. 아빠는 아직도 아들이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다는 게 믿기질 않아.”
엄마, 아빠에게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집에서는 마냥 ‘엄마! 아빠!’ 하고서 우다다 달려가 안기는 아들이었는데. 밖에선 차 배우, 차 가수를 넘어서 국민 연예인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었으니까.
“어? 이제 제야의 종 칠 거 같아요.”
소원 빌어야지. 내 말에 엄마, 아빠 역시 손을 모으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무슨 소원을 빌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 엄마, 아빠, 하준이, 하윤이가 항상 행복하게. 그리고 지금처럼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렇게 14살의 새해가 밝았다.
*
14살이 된 차서준에 대한 소식을 팬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때.
정작 그 소식은 바다 건너 미국에서 들려왔다.
- 배우 차서준, 작년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에 이어 올해 ‘라이프’로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 수상!
- 골든 글로브 역사상 최초 2년 연속 남우주연상, 그것도 드라마 부분, 영화 부문 각각 수상한 최초의 배우로 등극한 차서준.
- ‘라이프’로 감독상 수상한 세르지오 디난테 “준과 함께한 시간은 감독이 된 이후 최고로 행복했던 시간. 찬란한 재능을 가진 어린 배우의 미래가 더 기대된다.”
- 또다시 할리우드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 배우 차서준. 골든 글로브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다.
-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들고서 환하게 웃는 배우 차서준. 언제나 수상 소감의 마지막은 한국말로 이어진 “우리 가족 사랑해요!”
└ 미쳤다!!! 결국 대기록을 완성하고 말았네요!!! 작년에 ‘왕자의 난’으로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타더니. 올해는 ‘라이프’로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이라는 기적을 일으키다니!!!
└ 거기서 끝이 아님. 이제 다음 달이면 오스카라고도 불리는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공개가 될 텐데. 거기에서도 영화 라이프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거 아니냐는 말이 있음.
└ 무엇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 끝에 한국말로 가족 사랑을 이야기하는 차 배우가 멋지네요. ㄷㄷ
└ 작년 말에 넷비티에서 공개된 왕자의 난 시즌2 흥행이랑 평가를 봤을 땐. 내년엔 박우형이 저기에 설지도 모르겠네요. ㅋㅋㅋ
└ 저거 시상식 일정 끝나고. 연사모 미국지부인 데이븐이랑 가르시아 알렌이 직접 찾아와 엄청 축하를 해줬다던데. 글로벌 연사모 우정 보기 좋네요. ㅋㅋ
이번 골든 글로브에 내가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 후보로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축하하러 오겠다고 한 데이븐과 가르시아 알렌이었다.
자기들이 봤을 땐 내가 무조건 수상을 할 거라면서 말이다. 정말로 작년 드라마 부문에 이어 올해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나였다.
두 사람이 온다는 소식에 한국에서 건너온 연사모 형들이었고. 오랜만에 만난 박우형과 가르시아 알렌의 결과는 어땠을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 진짜 귀가 터지는 줄 알았다고.”
“정범이 형. 그래도 영어가 많이 늘었던데요? 이제 자연스러운 대화가 되잖아요.”
“서준아. 하루 종일 우형이 형과 가르시아의 수다를 듣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귀가 트인다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떠듬떠듬 말할 순 없지. 같은 연사모잖아.”
김정범이 툴툴거리긴 했지만. 제법 늘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데이븐, 가르시아 알렌과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만날 때마다 점차 발전하는 김정범의 회화 실력에 놀란 가르시아 알렌에게 말 폭탄 투하를 당했지만 말이다.
당황하고 있는 김정범을 보면서, 김우승이 얼마나 웃던지. 그 모습이 제법 웃겨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아두었다. 정범이 형 미안.
“그래도 데이븐이 촬영을 앞두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가르시아가 한국까지 따라왔을지도 몰라.”
“그건 좀 가능성이 있네요.”
‘디멘션 소서러’ 촬영을 앞두고 있는 데이븐 덕분에, 가르시아 알렌은 아쉬운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같이 돌아갔다.
물론, 며칠 뒤면 다시 만난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거였지만. 어쨌거나 오랜만에 수다 폭탄이 터진 박우형과 가르시아 알렌이었다.
“어? 맞다. 서준이 너 졸업식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달 14일이요. 왜요?”
“왜긴. 당연히 다른 사람도 아닌 서준이 졸업식인데. 형들이 무조건 가야지. 안 그래 우형이 형?”
“맞아. 가야지.”
옆에서 듣고 있던 박우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안 그래도 서준이 너 잠깐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 초등학교 졸업식 이야기가 나왔어. 데이븐이랑 가르시아도 오고 싶은데 스케줄 때문에 못 온다고 얼마나 아쉬워했는데.”
아니야, 넣어둬. 무슨 시상식도 아니고. 초등학교 졸업식에 연사모 형들에 이어 데이븐이랑 가르시아 알렌까지 한국으로 찾아온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 벌어질 터였다.
그리고.
영화 촬영을 앞둔 데이븐이 짧은 기간 내에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할 수는 없었다.
왜냐고?
이제 며칠만 지나면 박우형의 결혼식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그러고 보니 이제 우형이 형이 떠날 차례잖아요.”
“맞네. 정신없이 있다 보니 제일 중요한 일을 놓칠 뻔했네. 우형이 형, 준비는 다 했어?”
“어.”
단답으로 ‘맞아, 어’라고 대답하는 사람과, 얼마 전 가르시아 알렌과 몇 시간을 떠들던 사람이 어떻게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세상에, 진짜 우형이 형이 결혼하는 날이 오다니. 난 솔직히 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실감이 안 날 것 같아.”
우형이 형의 결혼식에 이어 내 초등학교 졸업식. 그리고 발표될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 발표까지.
한동안 또 시끌시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