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하와이로 가족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가장 군침을 흘린 곳은 다름 아닌 ‘힐링 가족’이었다.
해외 로케이션 촬영. 이국적인 풍경에 지금 국민 연예인이라는 수식어까지 생긴 차서준과 가족들의 여행 이야기. 이보다 끝내주는 그림은 없을 테니 말이다.
‘힐링 가족’ 촬영 도중 내 손을 꼭 잡고. 여행비용부터 시작해서 일정까지 완벽하게 제공하겠다는 말을 꺼냈던 이주연 PD였다.
하지만.
“죄송해요 피디님. 이번 여행은 어릴 때부터 버킷리스트로 꿈꿔 왔던 거라서요. 가족끼리 편하게 다녀오고 싶어요.”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우리는 차 배우가 계속해서 출연을 해준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우리 가족들만의 오손도손한 여행을 위해 거절한 나였다.
사실 돈이야 진즉에 언제든지 떠날 수 있을 정도로 벌었지만. 하와이 여행을 이제서야 떠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하와이로 떠날 만큼 긴 기간 동안 아빠가 휴가를 내기가 쉽지 않았고. 또 매년 여름에 미국에서 촬영하는 나를 보러 오기 위해 휴가 기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서준아. 아빠는 일등석이 아니어도 된다니까.”
“아니에요. 장거리 비행인 만큼 편안하게 이동하고 싶었어요. 하준이, 하윤이도 엄청 좋아했잖아요.”
“너무 편하게 와서 좋긴 한데. 우리 아들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게 아닐까 아빠는 걱정이 되어서 그렇지.”
“아니에요! 오늘을 위해 열심히 영화도 찍고, 광고도 촬영한 건데요. 이렇게 엄마, 아빠, 하준이, 하윤이와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일등석이 아니어도 괜찮다며, 또 돈을 왜 그리 많이 썼냐며 걱정하는 말투였지만. 엄마, 아빠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한 가득이었다.
내가 엄마를 안아주자. 따뜻한 손길이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엄마는 너무 행복하단다. 예전에 우리 서준이가 나중에 꼭 하와이에 가자고 했었잖니. 그때 엄마는 이런 날이 정말로 올 줄 정말 몰랐어. 그런데 정말로 하준이, 하윤이까지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오게 되다니. 너무 고마워 서준아.”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이 가족 여행을 떠나자며 모두 준비했다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까.
심지어 몇 년 전 내가 ‘엄마! 나중에 우리 가족 다 함께 하와이로 가족 여행 가요!’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
“형아 최고!”
“엉아 최고!”
옆에서 나를 향해 박수를 치며 최고라고 외치는 하준이, 하윤이만 보더라도 돈을 쓴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럴 때 쓰려고 열심히 버는 거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몸으로 돈을 쓸 수 있는 곳이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다.
자동차를 살 수도, 또 비싼 술을 음미할 수도 없었으니까. 김도경 시절에도 딱히 사치를 부리지 않았기도 했었고.
그저 지금처럼 엄마, 아빠, 하준이, 하윤이의 얼굴에 피어난 행복한 미소만 볼 수 있다면. 이깟 여행 비용쯤은 몇십 번이고 충분히 낼 수 있었다.
“우리 서준이가 정말 다 준비한 거니?”
“네! 사실은 도현 삼촌에게 부탁해서 다 준비했어요. 맛있는 음식점이나 좋은 숙소는 힐링 가족 제작진에서 알려줬고요.”
다른 곳보다 방송국만큼 정보가 빠삭한 곳이 없었다. 내가 촬영 제안을 거절했어도 여행용 정보들을 모두 모아 건네준 이주연 PD였다.
“아들. 아빠, 엄마가 정말 행복하긴 한데. 7박이나 5성급 숙소에서 머물다 가게 되면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니?”
아무리 배우 차서준이 걸어 다니는 기업 소리를 들을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지만. 엄마, 아빠에겐 어린 아들이 힘들게 번 돈이니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도착하고 나면 더 놀랄 텐데.
사실 이번 여행은 구경보다는 휴식의 목적이 강했다. 아무래도 국내에선 배우 차서준의 가족이라는 시선 때문에 마음 편히 쉬질 못했으니까.
먼저 3박을 머물기로 한 와이키키 해변 근처 5성급 호텔에 도착한 순간. 엄마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머? 우리 서준이가 동생들이랑 따로 잘 거니?”
“네! 하준이, 하윤이가 저랑 셋이서 자도 괜찮다고 했어요. 그렇지?”
“응!”
“엉!”
그랬다. 5성급 숙소, 그것도 해변이 보이는 오션뷰로 해서 방을 하나도 아닌, 둘이나 잡은 나였다.
한국에서 하와이까지 왔는데. 엄마, 아빠가 제대로 된 휴가 느낌을 내셔야지. 과거 신혼여행도 국내로 갔었다고 하셨으니까.
동생들도 이제 제법 큰 덕분에 나랑 셋이서 있어도 문제가 없었다. 이미 여기 오기 전에 하준이, 하윤이와 속닥속닥 이야기도 마쳐두었다.
“형아랑 잘 거야!”
“엉아랑 잘 거야!”
물론 나만 있으면 된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하준이, 하윤이 덕분에 뿌듯함이 생긴 건 덤이었다.
“준비한 방 정말 고마워 아들.”
“여보. 애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응? 바다가 보이는 좋은 방을 잡아줘서 고맙다고 한 건데?”
벌써부터 마치 신혼으로 돌아간 것처럼 토닥토닥하는 엄마, 아빠였다.
혹시 이런 걱정이 들 수도 있다. 어? 벌써 서준이, 하준이, 하윤이까지 셋인데. 엄마, 아빠 두 분이서 방을 쓰게 한다고?
걱정 마라. 아빠는 예전에 하윤이가 태어나고 나서 생산직에서 서비스직으로 변경하셨으니까.
“아들. 고마워.”
“아니에요. 내일 아침에 하준이, 하윤이 데리고 호텔 안에서 놀고 있을 테니까. 엄마, 아빠는 일어나고 나면 천천히 연락 주세요.”
만약 내가 성인이었다면 어깨를 두들기거나 안아주었겠지만.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당황하며 동공지진만 일으킬 뿐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하윤이가 방방 뛴다.
“우와! 너무 조아!”
특히나 바다를 좋아하는 하윤이가 푸른 물결을 보자마자 눈이 번쩍 돌아가 내 다리를 툭툭 건드린다.
“엉아! 당장 바다 가자!”
“응? 지금?”
“엉!”
하윤아. 저기 벌써 침대에 널브러진 하준이가 보이지 않니.
아무리 일등석을 타고 왔다곤 하지만. 아침부터 공항에 들러 비행기를 타고 숙소까지 오는 여정이 쉬울 리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바다로 달려가려는 하윤이를 보면 나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옆방에 계신 엄마, 아빠도 걱정이 되어 따라오려고 하실 테니.
“하윤아. 엄마, 아빠도 조금 쉬어야 하니까. 대신 오빠랑 같이 여기서 사진 찍으면서 저기 멀리까지 보이는 바다 구경할까? 하준이가 깨지 않도록 작게 노래도 불러줄게.”
“음. 저아!”
잠시 침대에 쓰러진 하준이와 바다를 번갈아 보던 하윤이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이다. 예전에 말문이 트이기 전 하윤이는 바다에서 떠나지 않겠다며 떼를 썼었으니까. 이제 제법 컸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윤이는 하와이에 와서 먹고 싶은 거 있어?”
“엉!”
안 그래도 하와이에 오기 전. 이주연 PD가 건네준 자료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 빠질 수 없는 것이 무얼 먹고 싶으냐에 관한 것. 당연히 하준이와 하윤이가 가장 먼저 고를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께! 랍쓰따!”
“그러면 오빠랑 여기서 바다 보면서 쉬다가. 저녁에 엄마, 아빠, 하준이랑 랍스타 먹으러 갈까? 하윤이가 사진 보면서 엄청 먹고 싶다고 한 가게가 근처에 있어.”
“저아!”
사실 오늘 숙소를 여기로 정한 것도, 와이키키 해변이 가깝다는 점도 있었지만. 근처에 동생들이 가고 싶다고 한 가게들이 몰려있기 때문이었다.
김도경 시절과 제법 다른 점이 여기서 느껴졌다. 처음 보는 곳에 위치한 가게들이 정말 맛있다고 평가받다니. 그렇다면 가봐야지.
대게 사랑꾼들이 이렇게 옆에 있는데 어떻게 안 가겠어.
“오빠.”
“어?”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하윤이가 나를 와락 안아주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오빠! 고마어!”
우리 가족 왕복 일등석 티켓, 와이키키 해변 3박과 마우이에서 4박을 머무는 방 2개 숙박비. 그리고 각종 여행비까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과감한 돈을 쓴 나였지만. 하윤이의 입에서 나온 저 말 한마디에 그만 사르르 녹아내리고 말았다.
안 되겠다. 이국적인 바다가 보인다고 저렇게 좋아하는데. 내년에도 또 와야겠다.
매년 와야지.
다음 날 늦은 아침.
세상 행복해 보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서. 조금은 수척(?)해진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아빠! 엄마!”
“우리 하윤이 잘 잤니?”
“엉! 잘 자써여!”
잘 자기는. 밤늦게까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느라 넋을 놓고 있었으면서. 옆에서 잠들기 전까지 자장가처럼 노래를 불러준 나였다.
준비를 마치고 숙소를 나온 뒤.
와이키키 해변 근처 상점에 들러 한 일이 있었다.
“형아! 이거 어때?”
“엉아! 이고 어때?”
바로 하준이, 하윤이를 하와이 해변룩으로 변신시키는 것. 머리에 어린이용 모자까지 올려주고 나니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말았다.
찰칵. 이건 사진 안 찍고 못 버티지. 그렇게 동생들에게 귀여운 옷을 사주기 위해 계산대로 향하려는 순간.
“우리 서준이도 동생들이랑 같이 옷 맞출까?”
“좋은 생각이네. 오늘 사진도 많이 찍기로 했으니까. 서준이도 패션을 맞춰야지.”
“좋아!”
“저아!”
이런. 엄마의 제안에 하준이, 하윤이까지 나서서 나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골라준다.
“어? 준?! 넷티비 왕자의 난이랑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 영화 라이프에서 제이스를 연기했던 준 맞죠?”
넷티비 드라마 ‘왕자의 난’에 이어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영화 ‘라이프’의 효과는 뛰어났다.
마침 상점 주인이 내 작품들을 봤다면서 알아본 것. 결국 나와 동생들의 옷은 선물이라며 강제로 받게 되었다.
“이거 여기다가 큼지막하게 뽑아서 걸어두고 자랑할 겁니다.”
고마운 마음에 사인과 함께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자.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 호탕하게 웃는 가게 주인이었다.
“우리 서준이가 왜 선글라스를 챙기나 했었는데. 여기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네?”
“저번에 라이프 촬영 때에도 왕자의 난을 봤다면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가리기 위해 이렇게 챙겨왔어요.”
역시나 바다에 도착하니 하윤이가 방방 뛴다. 수영을 배웠다지만 안전을 위해 깊지 않은 곳까지만 허락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어린이용 구명조끼를 입힌 것은 당연한 준비.
“히잉.”
“하윤아. 깊은 곳은 위험해요. 대신 호텔에 돌아가면 거기 있는 수영장도 가기로 약속했잖아. 알았지?”
“···응.”
저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니 잠시 시무룩해졌지만. 이내 기운을 차리고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기 시작한다.
“엉아! 이고 봐!”
“응?”
하윤이가 부르는 소리에 내가 고개를 돌리자. 촤악! 하윤이의 작은 손이 물을 담아 홱 하고 나를 향해 뿌린다.
옆에서 하준이도 형을 향해 장난을 거든다. 안 되겠네. 동생들에게 물장난이 뭔지 보여줘야겠다.
그런데.
“아빠! 도아져!”
내가 동생들을 향해 열심히 물을 뿌리자. 하윤이가 아빠를 향해 재빨리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하, 항복!”
아빠까지 합세하여 3명이 공격하니 나는 항복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무릎 정도밖에 오지 않는 위치에서 물장난을 쳤는데. 어느새 나만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잠시 그렇게 동생들과 놀아주다 엄마를 바라보니. 모래사장 위에서 나와 아빠, 동생들이 물장난을 치는 모습을 찍고 계셨다.
따뜻한 태양 아래 행복한 웃음이 끊이질 않는 우리 가족.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형아! 나 배고파. 맛있는 거 먹자!”
“알았어. 아빠, 우리 간단하게 간식 먹어요.”
“그럴까? 하윤아, 아빠 손잡고 나가자.”
“엉!”
실컷 물놀이를 하고 먹은 간식의 맛은 정말 끝내줬다.
*
“여행은 즐거웠어?”
“정말 최고였어요. 아빠 출근만 아니었으면 거기서 한 달은 쉬다 오고 싶을 정도로요.”
하와이 가족 여행 기간 동안 정말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가장 행복해 한 사람은 여행 내내 단둘이서 해변이 보이는 방을 사용한 엄마, 아빠가 아닐까.
물론, 아빠가 돌아올 때쯤엔 조금 수척해지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랍스타부터 시작해서, 스테이크까지 잘 드셨으니 괜찮겠지.
“형들도 시간 내서 하와이에 다녀와요. 오하우에서 3박, 마우이에서 4박을 머물렀는데. 진짜 힐링 제대로 하고 왔어요.”
“그래? 괜찮았던 곳 말해주면 나중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내 말에 김정범이 솔깃했는지 어디가 좋았는지 물어본다. 김우승이야 아직 애기가 어리니, 조카가 더 크고 나서 다녀오면 될 테고.
“그러고 보니 형들. 내일이 드디어 그날 아니에요?”
“맞아. 서준이 너도 같이 보면 진짜 좋을 텐데. 나 특별히 외박도 허락받았잖아.”
내 말에 김정범이 정말 아쉽다는 듯 바라본다. 옆에 있던 김우승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
“서준이가 어른이 되려면 아직도 몇 년이나 남았잖아.”
듣고 있던 박우형도 아쉬움을 담아 말한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넷티비에서 ‘왕자의 난’ 시즌2가 공개될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