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김시율은 비록 배우 차서준의 팬미팅에는 가지 못했지만. 오늘 개봉하는 영화 ‘라이프’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당연히 연차도 썼기에. 고향으로 내려와 차 배우 팬클럽 네임드 팬인 금동이맘과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딸, 고마워. 오늘 영화 예매 경쟁도 엄청 치열했다면서?”
“응. 내가 팬미팅은 놓쳤어도 영화까지 놓칠 순 없지. 아이맥스 뜨자마자 광클해서 예매했어.”
“근데 너 이렇게 평일에 내려와도 괜찮니?”
“엄마. 우리 차 배우 영화잖아. 무조건 연차 쓰고 첫 타임으로 봐야지.”
얼마 전 있었던 팬미팅에 못 가 얼마나 아쉬웠던지.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들로 대리만족하면서 오늘만을 기다렸던 그녀였다.
“팝콘은 작은 걸로 살게.”
“그러렴. 시사회 다녀온 사람들 이야기를 보니. 팝콘 먹을 시간도 없다고 하던데.”
그렇게 스몰 콤보 세트를 산 모녀는 상영관 안으로 향했다.
“아침인데 벌써 사람이 꽉 찼네.”
“시사회 때부터 대박이라고 소문이 자자했잖아. 거기에 아이맥스 관이고. 아까 확인해보니까 평일 첫 타임 영화인데도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찼어.”
농담이 아니라 평일 첫 시간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좌석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엄마, 영화 시작한다.”
-제이스, 준비 다 했어?
-존! 나 너무 설레요!
평범한 이웃 관계인 제이스 부자와 존. 태어나기 전부터 이웃으로 친하게 지냈던 탓에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하는 세 사람.
‘좀 너무 평범한데?’
당연히 모든 영화가 그러하듯 초반에는 인물관계도 설명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너무나도 잔잔한 분위기에 김시율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콰앙! 갑작스러운 사고로 추락하는 프로펠러 비행기. 순식간에 변하는 아수라장. 폭발, 불길, 죽음. 그리고 운이 좋게 살아남은 7명의 생존자.
-존, 구해줘서 고마워요. 존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거기서 죽었을지도 몰라요.
-제이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런 부정적인 단어는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야. 네 아빠까지 구했어야 했는데···.
생존자들은 정확히 어디인지도 모르는 정글 속에서 서서히 지쳐가고. 서서히 바닥을 보이는 식량.
‘꿀꺽.’
서서히 고조되는 내적 긴장감에 김시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대형 스크린 너머 인물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서서히 당겨져 팽팽해진 실이 끊어질 타이밍이 다가오고 있다고.
-고, 곰이다!
-도망쳐!
-제길! 다리를 다쳐서 뛸 수 없다고! 나도 데려가!
-미, 미안해. 나라도 살아야지.
-퍼킹!
굶주린 곰의 습격. 다리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남자가 결국 산 채로 잡아먹히고 마는데.
그 모습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생존자들. 그리고 시작된 균열. 높아지는 언성과 터지고 만 욕설.
-내가 왜 저 꼬맹이까지 데리고 가야 하는 거지? 여기서 다 죽을지도 모를 판에. 난 이대로 떠나겠어.
-뭐? 그러면 이 어린애를 여기다 버려두고 가자고?
-댁이 챙기시던지. 난 내가 가져온 몫을 가지고 갈 테니. 그렇게 알라고.
결국 흩어지는 생존자들. 태어날 때부터 지켜봐 온 존은 제이스를 버리지 못하고.
-끄아아악!
저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 그 순간 스크린에 확대되는 제이스의 표정.
“아.”
그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는 순간. 김시율은 자신도 모르게 축축해진 손을 닦으며 단말마를 터트리고 말았다.
‘이래서 시사회 때 그런 말들이 나왔던 거구나.’
차서준의 팬클럽에서도 시사회 후기들이 언급될 수밖에 없었다. 엠바고 때문에 영화 내용적으로는 말하진 못해도 차서준의 연기력에 대해선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김시율 그녀처럼 말이다.
-조, 존? 어, 어떻게 당신이···.
-제이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수없이 고민했음을 알아줬음 좋겠어. 더 이상은 널 데리고 생존할 자신이 없어.
지금까지 아빠처럼 제이스를 이끌던 존은 결국 생존을 택하고. 설상가상 얼마 남지 않은 식량까지 모두 가져가는데.
-날 미워해도. 아니, 원망해도 좋아. 나쁜 새끼, 죽일 놈의 새끼라고 욕해도 좋아. 미안하다···.
결국 홀로 남겨진 고개 숙인 제이스. 그리고 클로즈업되는 감춰진 표정.
“어?”
그 순간 상영관 안에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저런 단발마나 터졌다. 분명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믿었던 이의 배신, 홀로 남겨진 어린아이.
그런데.
‘웃어?’
제이스는 웃고 있었다. 마치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듯. 그리고 서서히 보여주는 미묘한 표정 변화.
그걸 본 김시율은 깨달을 수 있었다.
‘결심했구나.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로.’
극한의 상황. 한 걸음만 미끄러진다면 기다리고 있는 죽음. 그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존이 자신을 버리고 홀로 살아남기를 택하기를 끊임없이 고뇌한다는 것을.
그때부터였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생존을 위한 투쟁은.
-끄윽.
-흐윽. 살고 싶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누구 하나 팝콘에 손을 넣어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저 침만 꿀꺽 삼키며 마른 목을 애써 축일뿐.
30여 분간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몸부림치는 제이스.
그리고.
예고편에서 봤던 그 장면이 나왔다. ‘포기’를 떠올리는 순간 찾아온 희망. 그걸 잡고 물 밖으로 고개를 꺼내며 확 터트리는 미소.
잠시 후.
상영관이 불이 들어왔지만. 내내 긴장감을 놓지 못했던 관객들은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와씨. 나 이거 내일 또 봐야겠다.”
“너도? 나도. 이 영화는 무조건 영화관에서 봐야 되는 영화네.”
“난 그냥 심야 시간 자리 날 때 아이맥스로 다시 예매하려고. 이건 무조건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지.”
“인정. 만약 아이맥스로 안 봤으면 후회했을 거 같은데?”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 그걸 들으며 김시율은 생각했다.
‘이번 차 배우의 영화 라이프도 정말 대박이 나겠구나.’
김시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 예매 어플을 실행시키고 있었다.
*
무슨 말이 필요할까.
첫날 관객수 45만으로 흥행 돌파 조짐을 보인 영화 ‘라이프’는. 개봉 1주 차가 지났을 무렵 4백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흔히 말하는 천만 관객 영화들의 초반 성적을 ‘라이프’가 보여주고 있는 셈. 무엇보다 영화를 관람한 이들의 입에서 호평들이 쏟아진다는 점을 주목할 만했다.
당연히 나를 만난 형들의 입에서 현재 흥행을 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가 없었다.
“역시 서준이야. 지금도 예매율 1위 아니야?”
“거 봐. 내가 시사회 때 보고서 무조건 초대박 난다고 했잖아. 영화가 사람을 확 사로잡는데. 나 어제도 다시 보고 왔어.”
“나도.”
마지막에 다시 봤단 박우형의 말에 김우승과 김정범이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누우구랑?”
“에이, 알면서 묻고 그래. 그나저나 형 그렇게 과감하게 만나다가 들키면 연애설 기사 뜬다고.”
“조심하고 있어.”
안 그래도 박우형의 연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형들이었다. 특히나 전직 아이돌인 김우승이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안 들키는지에 대해 교육까지 했을 정도.
박우형이 사람들이 없을 심야 영화를 봤다고 말하자. 잘했다며 박수를 치는 김우승과 김정범이었다.
저 형들 모습이 꼭 주말 드라마를 보는 우리 엄마 같단 말이지.
“지금 한국에서도 엄청 흥행 중이긴 한데. 한국보다 해외에서 반응이 더 뜨거운 것 같아요.”
내 말에 형들이 맞지맞지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당장 몇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런 성적보다 중요한 일들이 터지고 있었으니까.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감독들이 배우 차서준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슬슬 인터뷰에서 같이 촬영하고 싶은 배우들을 언급할 때 내 이름이 나오기 시작한 것.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님 모임에서 또 이야기가 나왔다면서?”
“네.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는데. 다음 작품은 꼭 자기들이랑 해야 한다면서 다음 모임 때에도 꼭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정말로. 처음에는 영화가 잘 나온 덕분에 하는 덕담 같은 말인 줄 알았다. 모임 멤버 중 한 명이 당장이라도 비행기 표를 예약하려고 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내 말에 박우형이 고개가 이쪽을 향해 홱 하고 돌아선다.
“아무래도 관객들은 영화의 내용에 푹 빠지겠지만. 감독들의 눈엔 서준이 네 연기력만 보였을 테니. 괜히 가르시아 알렌이 영화 촬영 이후 서준이 너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가 있어. 나도 시사회 때 처음 보고서 과연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보다 역시나 서준이구나. 이 생각부터 들더라고. 그래서···.”
제발 그만.
실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박우형의 앞에서 크리스 앤더슨 감독,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을 비롯한 할리우드 명감독들의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눈에 불이 번쩍 들어온 박우형의 입이 쉬질 않는다.
김우승과 김정범은 어느새 저쪽으로 사라져 결혼식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배신자들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얼마 안 남긴 했다. 연사모의 두 번째 주자가 될 김정범의 결혼식이.
*
“엉아!”
“형아!”
집에 돌아오니 하준이와 하윤이가 쪼르르 달려와 내 다리에 안긴다. 그런데 입고 있는 옷들이 외출용이었다.
“준비 다 했어?”
“응!”
“엉!”
오늘은 엄마와 함께 영화 ‘라이프’를 보러 가기로 한 날. 이미 나갈 옷까지 모두 입은 동생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가 나갈 준비를 마무리하기 전까지. 하준이와 하윤이는 오늘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형아. 우리 반에 이미 엄마, 아빠랑 영화를 보고 온 친구가 있대. 그런데 영화가 엄청 재밌었대. 팝콘 먹는 것도 잊어서 끝나고 가지고 나왔대.”
“그래?”
“응! 그래서 나도 오늘 형이랑 영화 보러 갈 거라고 하니까. 다들 우와! 하면서 엄청 부러워했어.”
이미 하준이가 배우 차서준의 동생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당장 ‘힐링 가족’에 차서준의 가족으로 몇 달째 출연 중이었으니.
그런 나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니. 유치원 같은 반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한 모양이다.
“엉아! 나도!”
“우리 하윤이 친구들도 부러워했어?”
“엉!”
하윤이가 ‘엉아 최고!’ 하면서 나를 꼬옥 안아준다.
잠시 후.
“흐어엉. 아프지 마!”
“으어엉. 아프디 마!”
영화가 끝나자 꾸욱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리는 하준이, 하윤이었다.
영화 내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내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던 모양. 그래도 영화관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는지 상영하는 동안에는 눈물만 글썽거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촉촉해진 눈망울로 내 양손을 꼬옥 잡는 동생들의 작은 손에 그만 웃음이 터질 뻔한 나였다.
“어? 차 배우다!”
“영화 너무 잘 봤어요!”
“이번 영화 진짜 대박이에요.”
“동생들 우는 거 너무 귀엽다. 여기 손수건 드릴게요.”
확실히 ‘힐링 가족’에 출연한 보람이 있었다. 영화관에 배우 차서준이 엄마, 동생들과 함께 왔음이 밝혀졌지만. 누구 하나 달려드는 이가 없었다.
다만, 내 양옆에 매달려 대성통곡을 하는 하준이, 하윤이를 미소를 지은 채 사진을 찍고 있을 뿐.
아마 조금 있다가 차서준 목격담이 올라올 듯싶다.
[오늘 라이프 상영관에서 차 배우랑 동생들 만남.]
영화 상영하는 동안에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긴장해서 몰랐는데.
끝나고 나니까 차 배우랑 동생들이 관람하러 왔더라. 꾹꾹 참았는지 영화가 끝나자마자 아프지 말라고 엉엉 우는데.
관객들 모두 그런 차 배우 동생들을 보면서 엄마 미소 지음. ㅋㅋㅋㅋㅋㅋ
└ 님도 거기 있었음? 나도 있었는데 너무 귀엽더라. 영화 보는데 다른 사람들 방해되지 말라고 꾹 참았다가 끝나고 울더라. ㅋㅋㅋㅋㅋㅋㅋ
└ 차 배우 동생들 너무 귀엽네. ㅋㅋㅋ 내가 차 배우 동생들이더라도 끝나고 그랬을 듯? 연기가 그냥 미쳤음. ㄷㄷㄷ
└ 근데 내가 가족이라도 그럴 정도로 영화가 끝내줬음. 진짜 팝콘 사지 말란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더라.
└ 영화 상영하는 내내 손에 땀을 쥐면서 봤음. 분명 2회차 관람인데도 나도 모르게 긴장되었음. ㄷㄷ
└ 지금 괜히 해외에서도 ‘라이프’ 때문에 난리 난 게 아님. 생존 수영 배워야 한다고 수영도 유행이라잖아.
└ 거기서 끝이 아님. 지금 해외 유명 감독들이 같이 작품 하고 싶은 배우로 차서준 이름 꺼내기 시작함. 이제 진짜 월드 스타급 배우 되는 거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