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차서준의 팬이라면 어찌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영화 ‘라이프’ 소식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을까.
당연히 차 배우의 열렬한 팬인 김시율 역시 목이 빠져라 예고편만 기다리고 있었다.
“떴다고?”
드디어 예고편이 떴다는 소식에 김시율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분 32초라니 너무 아쉬운데. 더 길게 보여주지.”
공개된 1차 예고편 영상의 길이는 아쉽게도 1분 32초. 그럼에도 이미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로 인하여 조회수가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김시율은 설레는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시작된 예고편 영상.
갑작스러운 사고, 압도적인 자연 앞에 무기력한 인간들. 생존을 위한 발버둥, 그 과정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배신, 죽음.
“역시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야.”
이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짧은 영상임에도 보는 이의 입에서 침이 꿀꺽 넘어가게 만들며 압도한다.
그리고.
“와.”
예고편 마지막에 등장한 차서준 때문에 입을 다물 수 없었던 것.
엉망이 된 몸. 좌절이 느껴지는 얼굴. 마지막으로 넝마처럼 물속에서 제이스를 비추는 굴절된 햇빛.
두둥! 가슴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무언가를 잡는 제이스. 물 밖으로 나오며 확! 터져버리는 삶에 대한 희망.
마지막에 떠오르는 단어 ‘라이프’.
“미쳤다. 일단 생존에 대한 영화인 건 알겠는데. 마지막에 차 배우 표정이 미쳤는데?”
비단 김시율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예고편을 본 이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댓글들을 달기 시작한 것.
└ 이래서 제목 ‘라이프’였구나. 역시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네요. 예고편만으로도 보는 내내 심장이 두근두근하게 만들다니. ㄷㄷ
└ 마지막에 차 배우 표정 변화 보셨어요? 저걸 영화관에서 보면 소름이 쫙 돋을 거 같은데. 개봉까지 어떻게 기다리나요. ㅠㅠ
└ 이래서 다들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하고서 찾았구나. 일단 까봐야 알겠지만 짧은 예고편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압도해버리네요. 저걸 상영관 대형 스크린으로 본다면. ㄷㄷㄷ
└ 아직도 개봉까지 더 기다려야 한다니. ㅠㅠ 예고편을 보고나니까 당장이라도 보고 싶은데.
└ 저는 무조건 아이맥스로 볼 거임. 이건 무조건 개봉하자마자 아이맥스 영화관으로 가서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 됨.
역시나 예고편을 본 사람들이라면 저런 반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덕분에 하루라도 빨리 개봉해달라는 요구들이 빗발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김시율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 소식 하나가 올라온 것은.
“이, 이건?!”
*
배우 차서준의 첫 할리우드 주인공 영화 ‘라이프’의 1차 예고편이 공개된 뒤. 당연히 실시간 검색어 순위는 관련 단어들이 점령해버렸다.
그리고.
“서준아.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제 팬들을 만나는 일만 남았어.”
“너무 설레요. 정말 오랜만에 팬미팅을 하는 거잖아요.”
“오랜만이지. 한동안 시상식이다, 영화 촬영이다. 바쁜 일정 탓에 팬들을 만날 시간이 없었으니까.”
“맞아요. 팬들도 너무 오랜만의 팬미팅이라 너무 기대된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아직 개봉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영화 대신. 나는 조금 더 빨리 팬들과 만날 수 있는 팬미팅을 준비했다.
‘힐링 가족’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지만. 녹화된 영상으로 만나는 것과 실시간으로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팬미팅은 차원이 달랐으니까.
배우 차서준의 팬미팅은 일반적으로 배우들이 하는 팬미팅과 조금 달랐다. 가수 콘서트를 방불케 할 정도로 노래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노래를 몇 곡이나 준비했다고?”
“12곡이요. 예전 팬미팅 때 반응이 너무 좋았던 곡들이랑. 이번에 들려주고 싶은 노래들을 정하다 보니. 그렇게 많아졌어요.”
이 노래까지는 날 보러 온 팬들을 위해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12곡이라는 노래 리스트가 완성되었다.
좀 줄여볼까도 싶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하는 팬미팅인지라. 최대한 추리고 추려서 완성된 곡수가 저것이었다.
오죽하면 이게 팬미팅 준비인지, 아니면 솔로 가수의 콘서트 준비인지 헷갈린다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였을까.
“이번에는 대관료부터 시작해서 곡 사용료, 추가설비 사용료까지 나갈 비용이 제법 되어서. 저번처럼 풍성한 선물을 준비하기는 쉽지가 않아. 알고 있지?”
“네. 이제는 소규모로 만나는 수준이 아니잖아요. 대신 팬들을 위해 노래를 많이 준비하고. 또 토크 타임도 많이 준비했으니. 이해해주실 거예요.”
배우 차서준의 팬미팅은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마진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팬들을 만난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는 것.
과거 상영관 수준에서 팬들을 만날 때에야 풍성한 선물을 준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너무 많은 팬들과 함께할 예정이었기에 불가능해졌다.
“삼촌, 그거 아세요?”
“응?”
“이번에 1000석 규모의 아트홀에서 하잖아요. 그런데도 더 큰 곳에서 해달라는 요청들이 엄청 많더라고요.”
내 말에 서도현이 웃는다. 아마 직원들이 보여줘서 이미 본 듯싶다.
[차 배우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좀 자각할 필요가 있음.]
아니! 대체 왜!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팬들이 많은데. 왜 아트홀 같은 데에서만 팬미팅을 하는 거야!
자기 주제를 좀 알고 대형 실내 체육관이나 월드컵 경기장 이런 데에서 하면 얼마나 좋아.
나 이번에도 팬미팅 티켓팅 실패했다고. ㅠㅠ
제발 다음 팬미팅은 수천 명의 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에서 해주라!
└ 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보통 저기서 말한 대형 체육관이나 월드컵 경기장 같은 곳은 인기 가수들이 콘서트 할 때나 가는 곳 아님? ㅋㅋㅋ
└ 맞지. 그런데 우리 차 배우 팬미팅은 이제 더 이상 배우 팬미팅이 아니다 이거야. 콘서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팬들을 위해 노래 계속 불러줌. ㅋㅋㅋ
└ 우리 엄마 예전 팬미팅 갔다가 완전 반해버렸음. 딸! 고마운데 다음에도 꼭 티켓 구해줘.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불효녀는 이번에 티켓팅 실패함. ㅠㅠ
└ 어지간한 콘서트 티켓보다 저게 효도 선물일수도 있어요. 차 배우가 트로트도 진짜 맛깔나게 불러서. 다녀오면 다들 대만족하심. ㅋㅋ
└ 아니. 무슨 배우 팬미팅을 콘서트처럼 생각들 하시네요. 사실 나 이번에 당첨되어서 너무 설렘. 다녀와서 후기 남길게요.
└ 와씨. 부럽다. 나도 가고 싶다. 우리 차 배우 정말 꼭 한 번 보고 싶은데. ㅠㅠ 그래도 팬미팅하는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으니. 다음엔 나도 갈 수 있겠지?
└ 팬미팅 장소 규모가 커지는 속도보다. 차 배우 팬들이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빠름. ㅋㅋㅋ 팬미팅이라 쓰고 콘서트라 읽는다잖아. ㅋㅋㅋ
이처럼 더 큰 곳에서 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었다. 아쉽지만 가수가 아닌 이상 이보다 더 크게 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
- 마치 가수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열창하는 팬들. 뜨거운 열기 속 배우 차서준 팬미팅 이뤄져.
- “항상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팬들을 감동시킨 배우 차서준의 한마디.
- 배우 차서준 팬미팅 성료.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 영화 라이프로 찾아뵐 것.”
- 전석을 매진시킨 배우 차서준의 팬미팅. 티켓 못 구해 발 동동 구른 팬들도 넘쳐나.
- 오랜만에 팬들과 시간을 보낸 배우 차서준.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찬 팬들과 행복한 시간 보내.
배우 차서준의 팬미팅이 끝난 뒤.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들이 쏟아졌다.
이제 기사 제목에 배우 차서준의 이름만 들어가도 높은 클릭수를 보장하는 상황이니.
“팬미팅 어땠어?”
“저는 팬미팅이 아니라 콘서트를 하는 줄 알았어요. 정신을 차려보니까 앵콜 소리에 저도 모르게 3곡을 더 불렀다니까요.”
내 말에 김정범이 낄낄하고선 웃음을 터트린다. 보나 마나 저 질문도 기사 보고서 던진 거겠지.
안 되겠다. 나는 김우승과 슬쩍 눈빛을 주고받았다. 김정범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서준이 노래가 끝내주긴 하지. 만약에 서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저런 재능을 가졌으면 꼭 가수 하라고 했을 텐데.”
“정범이 형. 쟤가 할리우드에서. 그것도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 주인공을 하는 배우인데. 되겠어? 그래도 아쉬워서 내가 서준이에게 축가 부탁했던 거잖아.”
“알지. 그래서 나도 축가를 서준이에게··· 헙!”
역시. 김우승이 살짝 미끼를 던지자마자 덥석 무는 김정범.
안 그래도 김정범이 슬슬 결혼 생각을 떠올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왕자의 난’ 시즌2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살짝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왕자의 난’ 촬영이 끝난 지금. 이제 슬슬 결혼을 준비할 때가 되긴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찔러봤더니 결혼 소식을 낚은 셈.
“와. 이제 정범이 형도 가는구만. 축하해.”
“안 그래도 그거 관련해서 우승이 너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잘됐다.”
마침 잘됐다는 듯 김정범이 김우승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그런 형들을 보다가. 나는 핸드폰을 보고 있는 박우형을 불렀다.
결혼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두 사람은 모르겠지만. 핸드폰만 보고 있는 박우형의 모습은 꽤나 수상한 것이었다.
“우형이 형.”
“어?”
“형은 제게 할 말 없어요?”
당황했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몇 년 동안 친하게 지내온 나라면 알 수 있었다.
지금 박우형은 매우 당황하고 있다는 걸.
“응? 왜? 무슨 일이야. 뭔가 있는 거 같은데?”
“그러게. 우형이 형이 저렇게 당황하는 건 또 처음 보는 거 같은데.”
결혼 준비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 있던 김정범의 레이다에 그 반응이 잡혔고. 김우승도 놓치지 않고 후다닥 달려왔다.
“없어.”
그제야 두 사람도 핸드폰만 계속 보고 있는 박우형의 모습이 의아하다고 느껴지는 모양.
이대로라면 절대 진실을 토해내지 않을 박우형이었기에. 나는 과감하게 안쪽으로 직구를 날렸다.
“김수아 선생님.”
흠칫. 저 봐 저 봐.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온 순간. 박우형이 더 이상 포커페이스를 지키지 못하고 반응하고 말았다.
사실 나도 몰랐다. 김수아 선생님과 우형이 형 사이에 뭔가가 생길 줄이야.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뭐야? 김수아 선생님이 누군데?”
“맞아. 대체 누군데 우형이 형이 저렇게 반응하는데?”
김수아 선생님이 누구냐고? 과거 사총사들의 샛별반 선생님이자. 이제는 하준이의 유치원의 담임선생님.
“아니, 우형이 형. 그보다 대체 형이 김수아 선생님이랑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사실 나는 이게 너무나도 궁금했다. 아무리 접점을 찾아보려 해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였으니까.
그때였다. 김정범과 김우승의 닦달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박우형이 진실을 토해낸 것은.
“하준이 덕분에.”
응? 왜 여기서 하준이 이름이 나와?
“엉? 하준이? 서준이 동생 하준이 말하는 거야?”
“하준이가 형이랑 그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데?”
김정범과 김우승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박우형에게 설명을 해달라며 되묻는다.
하지만.
박우형의 입에서 하준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 번쩍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박우형과 김수아 선생님 사이를 알게 된 것도. 익명의 제보자인 하준이가 있어서였다.
“원래 내가 하준이랑 가끔씩 영상통화를 했었거든. 형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있으면 하준이가 내게 물어보기도 했었고.”
“아, 그건 나도 저번에 봤어. 서준이에게 생일 선물 사주고 싶은데 어떤 걸 좋아하냐고 우형이 형에게 묻던데.”
“맞네. 그러고 보니 우형이 형이 하준이를 엄청 잘 챙겼잖아. 가끔씩 유치원에 선물로 맛있는 것도 종종 보냈고.”
그랬어? 나도 몰랐던 박우형과 하준이의 관계였다. 하준이가 박우형을 잘 따르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다니.
‘폭군의 세자’에서 알게 된 이후로 묵묵히 나를 잘 챙겨주던 사람이 우형이 형이었다.
그런 박우형이 하준이까지 뒤에서 정말 잘 챙겨주었다는데 감동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이 형 정말···.
“전에 하준이가 유치원에서 영상 통화를 걸었는데. 그때 수아 씨가 같이 있었거든. 그리고 바로 다음 날에 우연히 식당 옆자리에서 만나게 되어서. 그때부터 알게 되었어.”
이럴 수가. 차서준 연애 조작단에 이어 차하준 연애 조작단이 활동하고 있었다니.
심지어 차하준 연애 조작단은 도저히 불가능할 거라 여겨지던 박우형의 연애까지 성공시켰단다.
우리 동생.
대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