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내가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한 서도현이 나를 반긴다.
“삼촌! 저 왔어요.”
“왜 벌써 나왔어. 아직 피로도 풀리지 않았을 텐데. 더 쉬다가 늦은 오후쯤에나 살짝 들리라니까.”
누가 본다면 우리의 대화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에미상 시상식 기간에도 미국에서 함께 있었다.
이미 7월에 후보가 발표된 순간부터. 서도현이 비행기 표부터 숙소까지 모두 예약해버렸으니까.
“삼촌. 그거 아세요?”
“응?”
“제가 에미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가족들이랑 삼촌이었거든요.”
“안 그래도 서준이 네가 이번에도 언급을 해서 얼마나 감동이었는지 모른다.”
수진 누나가 내게 내부고발을 해주었지. 에미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서도현 대표님 덕분에 오늘의 배우 차서준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라고 했을 때. 서도현의 눈시울이 글썽거렸다고.
몇 년 전 자신의 눈으로 발견한 원석에 확신을 가지고 과감한 투자를 했던 서도현이었다. 배우 차서준이 성공 가도를 달릴수록 가장 큰 수혜자가 바로 구름엑터스 대표였다.
특히.
“그리고 서준아, 다른 트로피도 아닌 에미상에서 받은 남우주연상 트로피인데. 집에 가져가서 전시해두라니까.”
올해가 밝으면서 구름엑터스는 건물 하나를 매매해서 사옥을 이전했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내가 받은 상들을 회사 한편에 공간을 마련해서 전시해두었다.
서도현이 매일 출근하면 거기부터 들른다고 수진 누나가 살짝 귀띔해주었다. 듣기론 늦은 밤까지 야근하다 피곤하면 그 방에 들어가 쉰다고.
“다 삼촌 덕분이잖아요. 그리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는데에도 동생들 방을 만들기에도 좁아서요.”
“어머니, 아버지가 아쉬워하실지도 모를 텐데.”
“아니에요. 오히려 삼촌이 더 잘 보관해주실 거라며 안심하셨어요. 요즘 집에 동생 친구들이 자주 놀러 와서 두기에 불안하다고 하셨거든요.”
안 그래도 저번에 하준이와 하윤이 베프들을 초대하면서부터. 동생들이 우리집에 정말 친한 친구들만 불러서 재밌게 논다고 들었다.
“엉아, 나 은서랑 집에서 노라도 대?”
하윤이가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면서 저렇게 묻는데. 어떻게 안 된다고 하겠어. 심지어 하윤이는 은서네 집에 종종 놀러 간다고 하는데.
또 하나 더.
트로피들은 내가 그런 서도현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서도현이 당시 사기를 당해 절망에 빠졌던 엄마, 아빠를 정말 통 크게 도와주었던 것에 대한 보답.
만약 서도현이 아니었더라면. 당시 그 어떤 소속사와 계약한다 하더라도 그처럼 빠르게 우리 가족에 평안이 찾아오지 못했을 테니.
어떻게 보면 하준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도. 서도현의 과감한 투자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삼촌. 아직 내년에 있을 골든 글로브도 남아 있잖아요.”
“그렇지. 안 그래도 에미상 남우주연상 트로피와 내년에 있을 골든 글로브를 생각해서. 좀 고급스러운 장식장 하나를 주문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말에 이미 몇 가지를 눈에 여겨 보았는지. 이건 어떠니? 하고서 사진 몇 개를 보여준다.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트로피들이야 김도경 시절에 지겹도록 모아봤으니까. 저렇게 좋아하는 삼촌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충분히 선물할 만하지.
내가 구름엑터스, 그리고 서도현과 계속해서 함께하고 싶다는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했고. 아마 서도현이 가장 기뻐하는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 그리고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과 통화를 했는데. 모두를 놀라게 했다면서?”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안 그래도 그 이야기가 나오긴 했었어요. 예상보다 촬영 기간이 훨씬 단축되었다고 했거든요.”
원래 계획되었던 촬영 일정은 12월까지 후반 작업을 모두 끝낸 뒤. 남은 분량은 내년 겨울방학 기간에 촬영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후반 작업이야 남았다지만. 에미상 시상식이 있기 전까지 내가 카메라 앞에서 찍어야 할 촬영 분량들을 모두 끝내버렸다.
“확실히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님이 완벽을 추구하시더라고요.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만 하면 될 정도로 완벽하게 촬영 준비를 해두었어요.”
“삼촌도 들었다. 원래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필요한 소도구 하나까지도 미리 완벽하게 제작해둔다고.”
“거기에 감독님 입에서 오케이라는 말이 나오는 장면들이 완벽하더라고요. 재촬영도 필요 없을 정도로요.”
정말로. 촬영에 필요한 사소한 것들까지 완벽히 준비해둔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었다. 오죽하면 영화 속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에 따른 상태별 옷까지 다 준비해두었을까.
주인공인 제이스가 입고 있는 옷도. 시간대별로 수십 벌을 제작해두었을 정도였으니.
정작 영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놀란 건.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의 준비성이 아니었다. 바로 배우 차서준의 완벽한 연기에 관한 것.
“그리고 서준이 네가 NG를 거의 내지 않아서 모두가 경악했다면서?”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었어요. 다른 배우들과 함께 촬영할 때에는 감독님이 계속해서 다시, 다시. 이런 말을 했었는데. 영화 중반을 넘어선 분량부터는 저 혼자 카메라 앞에 설 때에는 그런 말을 안 들었거든요.”
가장 놀란 사람이 바로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라면 설명이 더 쉽겠지.
그렇게 NG를 거의 내지 않고. 한두 번 만에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오케이를 끌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가르시아 알렌의 도움도 엄청 컸어요. 안 그래도 너무 고마워서 한국에 놀러 오면 맛있는 것들을 많이 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미국판 박우형 가르시아 알렌의 도움이 매우 컸다. 사소한 입매의 어색함 하나까지도 사전에 날카롭게 캐치해주었거든.
그 덕분에 본 촬영에서는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입에서 ‘다시’라는 단어가 거의 나오질 않게 만들 수 있었다.
“감독님이 후반 작업에서 필요한 부분이 생긴다면 연락 주신다고 했어요.”
“아마 연락 올 일이 없을 것 같은데. 한 번 찍은 영상은 재촬영 필요 없이 거의 그대로 쓴다고 할 정도로. 촬영 한 번에 완벽을 추구하는 감독이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니.”
이미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에 대해 많은 것들을 조사한 서도현이었다.
서도현의 저 말처럼 필요한 후시 녹음까지 모두 끝내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였다.
과연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손에서 완성될 ‘라이프’는 어떤 영화일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대단해. 진짜 기사도 엄청 나오고 장난 아니었어.”
“맞아! 최초라면서! 특히 12살에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어!”
“서준이 덕분에 삼촌이 요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대.”
오랜만에 만난 사총사 친구들이었다. 여름방학과 동시에 미국으로 떠나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영화 촬영을 시작한 나였으니까.
학교에서는 호들갑을 떨고 싶었어도 꾸욱 참았던 모양이다. 사총사들이 앞장서서 난리를 쳤다간 학교 친구들이 우르르 달려들 테니.
그렇게 꾸욱 참아왔던 흥분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터져버렸다.
그때였다.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음식이 나온 것은.
“서준아 축하한다! 이건 최고의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기념으로 사장님이 주는 선물. 오늘은 마음껏 먹으렴.”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가 바로 사총사들이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축하를 위해 온다는 돈가스 가게였다.
이미 배우 차서준이 ‘왕자의 난’으로 에미상을 휩쓸었다는 기사가 잔뜩 쏟아진 상황. TV만 틀어도 뉴스마다 그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으니.
우리가 온 것을 본 사장님이 메뉴 주문을 듣지도 않고 항상 먹는 치즈돈가스 세트를 가지고 왔다. 콜라 서비스도 함께.
“고맙습니다.”
“허허! 맛있게 먹으려무나.”
아마 이번에 찍을 사진은 계산대 바로 뒤에 큼지막하게 걸리지 않을까.
사장님이 치즈돈가스 세트를 주고 감과 동시에.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김도윤이 다다다 말을 이었다.
“완전 별들의 시상식이었다며. 직접 가보니까 어땠어? 진짜 집에서 시상식 중계를 봤는데. 우와! 할 만한 외국 배우들도 엄청 많던데.”
아역 배우로 활동 중인 만큼. 김도윤이 눈빛을 빛내며 묻는다. TV 화면에 잡힌 배우들 하나하나가 유명 배우들이었으니.
“기분이 정말 좋았어. 도윤이 너도 열심히 노력해서 다음엔 꼭 나랑 같이 가자.”
“정말? 나 저번 작품도 서준이 네가 많이 도와준 덕분에 진짜 칭찬 많이 들었거든. 그래서인지 이번에 캐스팅하고 싶다는 연락이 엄청 많이 왔어.”
김도윤이 신이 나서 조잘조잘 떠든다. 오른손에 든 치즈돈가스를 입에 가져가는 것도 잊어버린 채.
“얘들아.”
“응?”
내가 잠시 애들을 부르자. 열심히 치즈돈가스를 우물거리던 사총사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만약에 다음에도 할리우드 작품을 할 기회가 생기면. 그땐 너희들을 초대할 테니까. 꼭 시간 내서 와야 돼. 비용도 다 내가 지원할 거야. 알았지?”
“저, 정말?!”
“우와!”
“···대박.”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총사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었다. 미래에 감독이 꿈이라는 최지환, 아역 배우로 열심히 성장해나가는 김도윤. 마지막으로 아이돌로 데뷔를 위해 연습생 생활을 하는 하지우까지.
이 친구들에게 더 넓은 세상. 그리고 지금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 나가는 촬영 현장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마 친구들에게 정말 큰 경험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이번에도 기회가 되면 너희를 초대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촬영 일정이 너무나도 빡빡해서 그러질 못했어.”
내 말에 아니라는 듯 고개를 홱홱 젓는 사총사들이었다.
“맞다. 미국에서 너희들에게 줄 선물 사 왔는데. 내일 학교 끝나고 잠깐 시간 좀 내줘.”
최지환이나 김도윤은 문제가 없었지만. 바쁜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는 하지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서준이 너랑 관련된 일이면 무조건 가래. 심지어 레슨 빼고 가도 괜찮으니까 먼저 간다고 대답하고 나서 연락해도 된대.”
하지우네 소속사에서도 배우 차서준과의 친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선조치 후보고를 해도 된다고 하다니. 물론, 내가 하지우네 소속사 관계자라도 그런 결정을 내리긴 했을 터였다.
나중에 하지우가 아이돌로 정식 데뷔할 때. ‘차 배우의 절친 사총사 중 한 명!’ 이렇게 홍보만 해도 압도적인 관심을 받을 테니까.
“그러면 내일 내가 사 온 선물 받고 나서. 맛있는 거 또 먹자. 알았지?”
내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총사들이었다. 대게를 사줘야겠다.
*
한동안 조용하던 차서준의 팬클럽에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글 하나가 올라왔다.
하나둘 조회수를 올리던 그 게시글은. 이내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댓글이 달리며 인기글로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 데이븐 SNS에 올라온 글 보셨음? ㅋㅋㅋㅋㅋ]
저번에 우리 차 배우의 가족들이 여름휴가를 써서 응원차 미국으로 갔었잖아.
그때 데이븐도 친분이 있는 차 배우의 가족들을 만날 겸 지내고 있는 곳으로 갔었나 봄.
거기서 가르시아 알렌과 처음 만났다고 하던데. 그날부터 매일매일 연락이 온다고 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분명 한국 아니고. 미국, 그것도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의 이야기인데. 왜 이리 익숙한 향기가 나는 거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
└ 누가 그러던데. 가르시아 알렌이 미국판 박우형이랑 비슷한 거 같다고. 일전에 같이 촬영하던 배우 하나가 시달리다가 학을 떼고 도망간 적이 있었다고 했음. ㅋㅋㅋ ‘연기’에 관한 수다를 멈추질 않아서.
└ 사진 올라온 것들 중 하나가 넋이 나간 데이븐이었음. ㅋㅋㅋ 그 사진이 막 싫어한다가 아니라 친분을 토대로 농담처럼 써놓았던데.
└ 과연 농담일까? ㅋㅋㅋ 그래도 정말 싫었다면 데이븐이 가르시아 알렌의 집에 놀러 가질 않았겠지. 차 배우 덕분에 두 사람 처음 만난 거 아님?
└ 맞아요. 배우 박우형, 김정범, 김우승이 우리 차 배우 덕분에 인연이 닿아 연사모가 만들어진 것처럼. 할리우드에서도 우리 차 배우 덕분에 미국판 연사모가 만들어질 듯요?
└ 저번에 데이븐이 한국에 왔을 때. 연사모 배우들이랑 만나지 않았었나요? 만약 이번에 저 두 배우가 한국에 같이 온다면 연사모 형들과 만났을 때가 기대되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