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몇 달 전.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은 오랜 친우인 크리스 앤더슨 감독과 영화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르지오. 지금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네. 아무래도 촉박한 일정 때문에 걱정인 게지?”
“맞네. 아무래도 촬영이 시작되고 나면. 그때부턴 나도 모르게 깐깐해지니 말일세.”
오스카의 남자라고 불린다는 건. 그만큼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뜻이었다.
그런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촬영 현장이 쉬울 리가 없었다. 처음에 열정적이던 배우들조차 나중에는 촬영장에서 그를 볼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가뜩이나 아직 초등학생이라는 제약 때문에 촬영 기간까지 촉박한 상황. 정해진 시간 내에 세르지오 디난테 본인이 원하는 최고의 장면을 뽑아내야만 했다.
준비야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다지만. 영화 촬영이라는 것이 언제나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었으니.
“나도 촬영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네와 같은 고민을 했었지.”
“그나마 자네는 데이븐이 주연이지 않았나. 수정된 시나리오까지 다 봐서 알겠지만. 이번에는 준이 모든 걸 해줘야만 하는 상황일세.”
‘디멘션 소서러’의 크리스 앤더슨과 세르지오 디난테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친우는 데이븐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촬영했겠지만. 이쪽은 영화 중후반부에 들어서면서부터 차서준이 원맨쇼를 펼쳐야만 하는 상황.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는데. 그 어떤 설명을 하더라도 와닿을 수 있겠나. 기적을 경험해보게. 카메라 앞에 선 그 어린 친구는 또 다른 느낌일 테니.”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은 저 말이 친우의 응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뽑은 배우가 차서준이었다.
하지만.
차서준이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배우라고 하더라도. 이제 고작 11살이었다.
지금까지 세르지오 디난테 본인이 만났던 천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무리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하더라도 아직 경험이 부족할 나이인 만큼 부족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번 촬영은 최신 CG 기술 장비들이 활용될 예정인 상황. 그 장비들을 처음 접하는 어린 배우에게 있어 촬영이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왓? 저 표정이 어떻게 지어질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장비 적응이 너무 빠른데?’
대본 리딩 때 한 번. 그리고 본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 다시 한번. 세르지오 디난테는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천재’란 재능의 한계를 알 수 없기에 붙여지는 별명. 자신도 천재 감독이란 소리를 들었음에도 선입견을 가지고 한계를 규정하고 만 것.
무엇보다.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을 경악하게 만든 건. 이번 영화를 위해 특수 제작한 촬영 케이지에서 빠른 적응을 보여준 차서준의 모습이었다.
마치 이런 촬영 경험이 제법 있다는 듯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리가 없었지만. 눈앞에서 차서준이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방금 거기서 작은 손가락 떨림은 의도한 건가?”
“네!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긴장이 풀렸을 테니까요. 화면에 크게 잡히지는 않더라도. 제이스라면 그랬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차서준의 연기. 그리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듣는 순간.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은 친우가 했던 ‘기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런 차서준의 연기를 바라보는 스태프들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 분명 이번 영화를 위해 특수 제작된 촬영 케이지인데.
마치 차서준은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는 듯이. 그 누구보다 능숙하게 장비를 활용해서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어디서 비슷한 촬영이라도 한 적이 있었나? 적응 속도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인데.”
“그러게. 이러면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훨씬 단축되겠는데? 한국에 저런 장비라도 있나?”
“그럴 리가. 저거 만들겠다고 들어간 돈이 얼만데. 그냥 준의 적응 속도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인 거 같은데?”
분명 다른 배우였다면. 아무리 할리우드 탑급 배우를 가져다 놓아도 몇 번의 NG를 냈을 것이 분명한 장면인데.
“오케이!”
배우 차서준은 단 한 번의 도전만으로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오케이 사인을 이끌어냈다. 그것도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방금 준 얼굴 클로즈업될 때 표정 봤어?”
“크. 나는 보면서 소름이 쫙 돋았다니까. 죽음의 공포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기쁨과 환희가 채우는데. 저런 표현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거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차서준의 표정을 렌즈에 담는 카메라 감독과 보조라면.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할리우드에서만 십몇 년을 굴렀는데. 저런 배우는 무조건 정상을 찍었다고. 이곳이 아무리 할리우드라고 할지라도 말이지.”
*
사실 극한의 생존 환경을 다룬 영화 ‘라이프’의 촬영이 쉬울 리가 없었다.
이번 영화를 위해 제작된 특수 촬영 케이지는. 만약 내가 김도경 시절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제법 애를 먹었을지도 모를 만큼 고난도의 연기를 요구하였다.
특히나 시간이 지날수록 주인공의 감정에 몰입해야 하는 배우의 특성상. 아무리 나라 하더라도 심신이 지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형아!”
“엉아!”
하준이와 하윤이를 안는 순간. 지금까지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던 피로와 지침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직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겠지만. 힘든 직장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현관에서 자신을 반기는 애들 덕분에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형이 보고 싶었어?”
“응!”
“엉!”
심지어 미국까지 왔는데. 어디 놀러 가지 않아도 된다고. 나랑 같이 있기만 해도 즐겁다는 동생들의 반응 때문에 행복한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내가 촬영을 다녀오는 시간 동안에. 엄마, 아빠와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는 동생들이었다.
“엄마, 아빠 오늘은 어디 다녀오셨어요?”
“마침 가르시아 알렌 씨가 좋은 곳을 예약해주어서. 하준이, 하윤이를 데리고 다녀왔어.”
또 한 가지.
가르시아 알렌은 미국판 박우형이 맞았다. 도플갱어가 확실하다고.
‘연기’가 아니기에 평소 과묵한 모습으로 돌아온 가르시아 알렌이었다. 그 덕분에 하준이, 하윤이도 그를 대하기 너무 좋아할 정도.
대화 내용이 ‘그래, 어, 응, 아니, 귀엽네.’ 이런 단답형만 있었으니. 아직 영어가 서투른 하준이, 하윤이도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대화가 맞나?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신기하게도 의사소통이 된다는 점에서 대화가 맞았다.
거기에 한국에서 멀리 온 우리 가족을 위해 선물도 아끼지 않았다. 마치 저번에 우리 가족을 극진히 챙겼던 데이븐처럼 말이다.
아, 데이븐 이야기가 나오니 생각났다.
“아빠. 오늘 데이븐이 아빠한테 전화한다고 했었는데. 데이븐이랑 통화하셨어요?”
“내일 여기로 온다고 들었어. 우리 서준이 촬영 끝나면 다 같이 저녁을 먹자면서. 이미 며칠 전부터 이야기가 되었다던데?”
“네. 이미 한참 전부터 데이븐이 오겠다고 했거든요. 마침 우리 가족이 올 때랑 시간 맞춘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 소식을 듣고선 가르시아도 함께 가겠다던데요?”
데이븐이 촬영장이 있는 이곳으로 얼굴을 볼 겸 온다고 했는데. 그 자리에 가르시아 알렌도 같이 가겠다고 한 것.
아직까지 데이븐과 가르시아 알렌이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설마 여기서도 한국처럼 미국판 연사모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겠지?
“서준아. 촬영은 좀 어떠니?”
엄마가 걱정이 된다는 듯 묻는다. 이번에는 촬영장에 방문하지 않은 우리 가족이었다.
극한의 집중을 요구하는 연기의 연속이었기에. 내가 배역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
다만, 얼마나 어려운 촬영인지 가르시아 알렌에게 어느 정도 들었다고 했다.
“힘들긴 한데. 그래도 엄청 재밌어요. 처음 경험하는 촬영 방식들이 엄청 많거든요.”
“가르시아 알렌 씨가 그러는데. 중반부 이후 촬영이 많아서 우리 서준이 혼자 촬영하는 일이 많다던데. 맞니?”
“그건 그래요. 아무래도 감독님이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절정인 상태에서 연달아 찍는 게 좋다고 판단하셔서요.”
9월이 시작되고 나서야 여름휴가를 써서 미국으로 넘어온 엄마, 아빠였다.
촬영 시작 후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기에. 어느새 남은 촬영 분량은 홀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제이스의 분량이 많이 남은 상태.
물론, 순서대로 찍는 것이 아니기에 다른 배우들의 촬영도 있긴 했지만. 촬영 절반 이상의 시간을 나 홀로 찍어가고 있었다.
“아, 하나 더 있어요. 가르시아가 같이 다녀서 외롭진 않았어요.”
고맙게도 자기 촬영이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매니저라며 농담까지 던지며 같이 다니고 있는 가르시아 알렌이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영화의 주인공인 제이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들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서준아. 아빠는 가르시아 알렌을 보면 꼭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 같은데.”
이런. 어느새 아빠도 어렴풋이 느끼셨나 보다. 비록 생김새와 쓰는 언어는 다르지만. 한국에 있는 누군가와 붕어빵으로 찍어놓은 것 같다는 걸.
“누가 떠오르셨어요?”
내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아빠가.
“음. 우형 아우? 그러고 보니 데이븐은 우승 아우랑 비슷한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왜지?”
본인이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지. 아빠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
차서준이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영화 ‘라이프’ 촬영을 위해 미국으로 막 떠났을 무렵.
미국에서 프라임타임 에미상 후보가 발표되었다.
- 에미상 새 역사 쓰는 ‘왕자의 난’, 비영어 드라마 처음 에미상 후보에 올라.
- ‘왕자의 난’ 에미상 후보에 12번 불렸다. 모두가 놀란 성과!
- ‘왕자의 난’ 작품상 등 에미상 12개 부문 후보. 새 역사를 쓰다.
- 배우 차서준. 한국 배우 최초로 에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수상 가능성은?
후보가 발표되었을 당시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뜨거웠다.
└ 정말 왕자의 난이 다른 곳도 아닌 에미상에서. 그것도 무려 12개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다고?!
이렇게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들이 터져 나왔을 정도.
그리고.
9월 말 올해의 에미상이 LA에서 수상작들을 발표한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물량의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에미상 휩쓴 ‘왕자의 난’ 비영어권 최초 감독상, 극본상, 남우주연상 수상 쾌거!
- 김주철 감독. 박정아 작가. ‘왕자의 난’으로 에미상 감독상, 극본상 수상.
- 외신 “왕자의 난, 에미상 역사를 새롭게 쓰다.” 일제히 보도.
- ‘왕자의 난’ 배우 차서준.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
-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을 말하는 배우 차서준. 언제나 수상 소감의 마지막은 “사랑하는 하준이, 하윤이와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 미쳤다!!! 12살 나이의 어린 배우가 비영어권 최초!!! 역대 최연소 기록!!! 으로 에미상 남우주연상 받은 거 실화냐???
└ 실화임. ㅋㅋㅋㅋ 솔직히 모두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잖아요. ‘왕자의 난’이 올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받았었는데.
└ 인정. 2, 3월에 있었던 시상식으로 받을 가능성이 높긴 했었지. 그래도 미국 드라마 최고 권위 시상식에서 차 배우가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운 건 맞음. ㄷㄷ
└ 왕자의 난이 정말 미친 성적을 거두긴 했어도. 아무래도 비영어 드라마에 12살 배우라 안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 그대로 에미상에 새 역사를 썼네요. ㅋㅋㅋ
└ 수상 소감 말할 때. 우리 차 배우 마지막에 한국어로 말하는 거 보셨어요? 한국에 계신 소중한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하고. 또 언제나 마지막은 가족들에게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데. 정말 감동이었음요.
└ ㅇㅈ 다른 곳도 아닌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 자리에서 한국어를 들을 수 있을 줄이야. 시상식 끝나고도 인터뷰 요청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고 하던데. ㄷㄷ
그리고.
고작 12살의 나이에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만들어가는 차서준을 보면서. 누군가가 이런 말을 꺼냈다.
└ 나중에. 우리 차 배우가 성인이 되어서 보여줄 작품들이 너무 기대가 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