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깜짝이야. 농담이 아니라 정말 놀랐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가르시아 알렌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표정 관리를 잘한 덕분에 가르시아 알렌이 내 반응을 알아차리진 못했다. 이럴 때마다 내가 배우라는 사실이 정말 다행으로 느껴진다.
“농담이야. 세상에 아무리 기적 같은 일들이 많다고 해도 그렇지. 인생 2회차 같은 일이 실제 벌어질 수 있겠어?”
“···맞아요. 그런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죠.”
“그런데 준을 보고 있으면 정말 영화 속 주인공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세상에 고작 11살의 나이에 모두를 경악하게 만드는 연기력과 그런 표현력이라니. 물론, 옆에서 지켜본 결과 준이 누구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서 준비한다는 건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놀라운 건 사실이야.”
역시나 ‘연기’와 관련해서 말이 엄청나게 많아지는 가르시아 알렌이었다.
무언가를 알고서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세르지오 디난테를 비롯한 할리우드에서도 알아주는 배우들을 경악하게 만든 재능.
촬영 내내 지켜본 내 연기력을 보고서 농담처럼 저런 말을 건넨 거겠지.
“그나저나 루카스가 내일 촬영 끝나고 식사 같이하면 어떠냐던데. 준 생각은 어때?”
“저야 좋죠.”
“굿. 다름이 아니라. 이번 주가 지나면 루카스도 촬영 분량이 끝나잖아. 내가 매일 준이랑 붙어 다니니까 부러웠나 봐.”
붙어 다닌 건 아니고. 정확하게는 가르시아 알렌이 졸졸 따라다녔다고 하는 게 맞았다.
우연이지 모르겠지만. 이번 영화 촬영을 위해 잡아준 가르시아 알렌과 내 숙소도 옆집 사이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
‘디멘션 소서러’ 촬영 당시 데이븐과 내 이야기를 찾아봤는지. 어느 순간부터 매일같이 나와 함께 촬영장에 출퇴근하기 시작한 가르시아 알렌이었다.
“내일은 촬영 분량 없지 않아요?”
“없지. 갑자기 그건 왜?”
“그러면 내일은 매니저 누나 차 타고서 촬영장으로 갈게요.”
“노노. 괜찮아. 준이랑 차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얼마나 즐거운데. 특히 어제 나눴던 왕자의 난 촬영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정말 즐거웠다고. 그 친하게 지낸다는 형들과의 대본 분석 이야기도 매우 흥미로웠고. 그러니···.”
누가 저 입 좀 막아줘. 단둘이 있을 때면 저 입이 도저히 쉬질 않았다.
만약 정말로 도플갱어가 세상에 존재했다면. 미국판 박우형이 가르시아 알렌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싫다는 건 아니었다. 주로 우리의 대화 주제는 지금 촬영하고 있는 영화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다만 귀가 아플 정도로 말이 너무 많다고.
한 번은 매니저인 수진 누나에게 귀가 아프다고 하소연을 해봤는데.
“왜? 가르시아 알렌은 차 안에서 어, 왜? 아니. 이런 단답으로만 말하잖아.”
수진 누나에게선 이런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실제로 수진 누나가 들은 가르시아 알렌의 목소리는 ‘어, 알았어, 그래, 아니.’ 정도가 전부였을 테니.
신기하게도 ‘연기’를 제외한 일상대화에서는 말이 뚝뚝 끊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었다.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 매니저가 조심하라고 하더니만.
응? 이렇게 놓고 보니 완전 박우형 붕어빵인 셈이다. 더 넓은 세상인 할리우드인 만큼 평소의 과묵함은 박우형보다 한술 더 떴고.
“가르시아.”
“왜?”
“우리 영화 어떨 거 같아요? 할리우드에서 많은 작품을 찍은 가르시아라면 어느 정도 느낌이 오지 않아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글쎄. 영화라는 게 후반 작업까지 모두 끝난 결과물을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촬영장의 느낌을 봤을 땐 이번에 제대로 사고 한번 칠 거 같은데.”
가르시아 알렌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특히 주인공이 너무 매력적이잖아. 솔직히 준이 아니었더라면. 그 어떤 배우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나는 불만을 참지 못했을 거야. 그만큼 배우로서 너무나도 욕심이 나는 배역이거든. 그런 작품의 주인공을 누구보다 준이 완벽하게 소화를 하고 있으니 무조건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어?”
이어서 가르시아 알렌이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괜히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에게 달려갔던 게 아니었다.
특히 눈앞의 가르시아 알렌도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도전했었다고 했으니.
인간의 본성, 욕망, 생존을 향한 발버둥. 이 모든 것들이 ‘라이프’라는 영화 한 편 안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걸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은 나조차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오죽하면 지켜보던 스태프들의 입에서도 방금 가르시아 알렌이 했던 말처럼 ‘이번에 정말 사고 칠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말들이 나오고 있을까.
“주인공인 제이스를 놓쳐서 아쉽긴 한데. 그래도 나는 이번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님 작품 출연 결심이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왜요? 가르시아를 주인공으로 원하는 감독님들이 꽤나 많았다고 들었는데요.”
“준을 만났잖아. 단순히 재능만 넘치는 어린 배우가 아니라.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력하고, 나조차 놀랄 정도로 뜨겁게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와 인연을 쌓았는데.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
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다. ‘연기’라는 폭탄 버튼이 눌린 가르시아 알렌만 보면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망쳐버렸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가르시아 알렌의 매니저가 고맙다며 따로 선물까지 보냈을까.
내가 귀가 아프다고 징징거리긴 했지만. 누구보다 ‘연기’에 진심인 배우와 함께하는 시간이 싫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우리가 대본을 놓고 많은 시간을 함께한 덕분일까. 꽤나 좋은 결과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님이 그랬잖아. 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발전한 연기를 보여줘서 놀랐다고.”
가르시아 알렌의 표정 표현이 더 풍부해졌다는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극찬도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극찬에 가까운 말이었기에. 그날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가르시아 알렌이었다.
*
영화 ‘라이프’의 촬영장.
갑작스럽게 발생한 상황에 생존자 전원이 물에 빠지는 장면을 찍는 날이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제이스를 찍는 날이기도 했고.
두 장면 모두 물속에서 발버둥치는 상황이었기에. 오늘 촬영은 거금을 투자하여 만든 특수 수중 촬영장이 있는 세트장에서 할 예정이었다.
“드디어 오고 말았네. 오늘은 물속에 얼마나 있어야 되려나?”
“우리가 하기에 달렸지. 제발 NG 없이 한 번에 오케이로 가야 돼. 나 수영을 배우긴 했는데 물을 계속 먹는다고. 오늘 진짜 어쩌지.”
“한 번에 감독님 오케이를 받을 수 있으면 지금까지 그 고생들을 했을까. 다들 이 악물고 해.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물로 배를 채우기 싫으면.”
배우들의 입에서 농담 반, 푸념 반의 말들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철학이 그가 원하는 완벽한 장면이 나올 때까지의 반복이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몇 번의 반복을 하더라도. 또 배우가 실수를 연발한다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다시.’ 이 무서운 말을 덤덤하게 꺼낼 뿐.
또 하나.
크리스 앤더슨 감독과 절친한 사이를 유지할 만큼. 누구보다 빠르게 최신 기술을 촬영에 적용하는 감독이 세르지오 디난테였다.
“시작하지.”
오전 촬영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특별히 어려운 주문이 없는 장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배우들이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을 만족시킬 만한 장면들을 뽑아냈기 때문.
그렇게 오전 촬영을 마치고 점심시간을 가진 뒤. 오후 촬영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던 스태프들은 이상한 장면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응? 다들 왜 안 갔지?”
“그러게. 오전에 자기들 촬영은 다 끝났을 텐데. 왜 저기들 모여 있는 거야?”
“아까 의자 좀 구해달라고들 하던데요. 오후 촬영을 좀 구경하다 가고 싶다고.”
마지막에 말한 스태프의 말처럼. 어디선가 의자를 구해온 배우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구경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 배우들에게 물었다.
“왜들 안 가고 있나?”
그 물음에 가르시아 알렌을 비롯한 루카스 에드워드, 제임스 등 배우들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답했다.
“보고 가려고요. 대본 리딩 때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던 장면인데.”
“궁금해서 발이 떨어져야 가죠. 지금부터 찍을 장면이 너무 기대가 되어서.”
“인정.”
예상했던 반응이었는지.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은 시끄럽게만 하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촬영 준비를 지시했다.
그리고 시작된 촬영.
제이스가 서 있는 장소는 거친 물살이 흐르는 물가 바로 앞. 저 멀리서 들려오는 높은 곳에서 물이 떨어지는 희미한 물소리.
이대로 물에 빠져 떠내려간다면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폭포 아래로 떨어지게 될 것이 분명한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후우.”
더 이상 돌아갈 길은 없었다. 당장 자신의 뒤를 노리는 굶주림에 포악해진 거대한 곰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으니.
유일한 탈출구는 점프를 한다면 간신히 손이 닿을지 고민되는 거리에 있는 바위 하나. 저기에만 오를 수 있다면. 징검다리처럼 이어진 돌을 밟고서 건너편으로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포효. 결국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도약하는 제이스.
“끅. 조, 조금만 더.”
어떻게든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제이스. 하지만 결국 닿지 않는 손에 미끄러지며 물에 빠져드는데.
햇빛이 굴절되어 일렁이는 물속에 떠내려가면서 잠시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제이스. 그 순간 눈앞에 나타난 잡을 수 있는 무언가. 바로 희망이었다.
“오케이!”
만족에 흠뻑 젖은 얼굴로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 오케이를 외쳤을 때.
이미 슬금슬금 다가오던 배우들이 어느새 모니터 뒤에 바짝 붙어 차서준의 표정 변화를 보고 있었다.
“캬. 저기서 저런 표정이 어떻게 나오지? 순간 세트장인 걸 알면서도 진짜 폭포 앞으로 떠내려가는 줄 알았다니까.”
“나도 저건 힘들 거 같은데. 솔직히 표정 연기에 대해 자부심이 좀 있었는데. 이번 작품을 찍으면서 겸손해지는 기분이야.”
“어려서 더 풍부하게 표현이 가능한 건가? 아니면 그냥 타고 난 건가. 감독님 표정만 보더라도 알 수 있겠네. 최고였다고.”
다들 감탄을 멈추질 못했다. 수중에서 카메라에 잡힌 차서준의 얼굴 표정 변화. 서서히 변하는 생존을 향한 욕망.
마지막으로.
물속에서 무언가를 잡고 얼굴을 꺼내며 얕은 희망을 발견했다는 기쁨을 담아 거칠게 토해내는 숨소리까지.
“이번 작품 개봉하고 나면. 진짜 많은 감독님들이 앞다투어 준을 찾겠어.”
그 연기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툭 내뱉었다.
*
“엉아!”
“형아!”
힘든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쓰는 집에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던 하준이와 하윤이가 우다다 달려와 나를 꼬옥 안아준다.
아빠가 저번보다 늦게 여름휴가를 써서 우리 가족이 나를 만나러 미국에 온 것이다.
“엄마, 아빠! 장거리 비행이었는데 힘들지 않으셨어요?”
“그러엄. 우리 서준이를 보러 오는 길인데. 엄마는 하나도 안 힘들었어.”
역시 우리 가족이 최고였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라니.
하준이와 하윤이는 오랜만에 나를 봤음에 기뻤는지 양손을 하나씩 붙잡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준. 오늘 가족이 한국에서 온다고 하지 않았어?”
가르시아 알렌이 찾아온 것은. 심지어 오늘 우리 가족이 온다고 했던 말을 기억했는지. 무언가를 양손에 가득 들고서 나타났다.
응? 어디서 이거와 비슷한 장면을 경험한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생각났다. 저번 영화 촬영 때 지금처럼 우리 가족이 미국에 막 도착했을 당시 데이븐이 불쑥 나타났었다.
그리고 지금. 가르시아 알렌은 내가 지나가듯 말했던 하준이, 하윤이가 좋아한다는 피자와 랍스터를 잔뜩 들고선 등장했다.
“그게 다 뭐예요?”
“반갑습니다. 준과 함께 영화를 찍고 있는 가르시아 알렌이라고 합니다. 저번에 준과 대화를 나누다가 우연찮게 동생들이 피자와 대게를 좋아한다고 들어서. 선물 겸 방금 가져온 따뜻한 먹을 것들을 좀 가지고 왔습니다. 귀여운 친구들 안녕.”
가르시아 알렌이 선물로 가져온 피자와 랍스타를 흔들자. 하준이와 하윤이의 동그래진 눈동자가 따라간다.
“우와!”
“우아!”
‘대게 사주는 사람 = 좋은 사람’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들어있는 하준이, 하윤이에게 좋은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