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몇 달 전.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연기파 배우. 가르시아 알렌의 매니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걸 하겠다고? 주인공으로 널 쓰고 싶다는 작품들을 다 재껴두고서?”
“어. 그럴 생각.”
“예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아쉽다는 건 알겠는데. 너 이거 주연 아니야. 비중은 있지만 조연이라고 조연.”
“알아.”
이미 설득의 단계를 넘어섰다는 걸. 가르시아 알렌과 함께 몇 년 동안 일해 온 매니저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라지만. 너 이제 조연급 아니야. 주인공을 잡아야 할 때라고.”
지금은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할리우드에서 가르시아 알렌이라는 배우가 확실한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하느냐. 아니면 흔한 연기력 끝내주는 조연급 배우로 남느냐의 기로에 선 시기.
그런 중요한 순간에 난데없이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차기작에 꽂히다니. 그것도 이미 주인공이 확정된 작품에.
“알잖아. 내가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님 작품의 주연을 꼭 따내고 싶었다는 거.”
가르시아 알렌은 몇 년 전.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시나리오 ‘라이프’를 읽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운명적인 작품 같은 거라고. 이 작품을 통해 할리우드. 아니, 전 세계에 가르시아 알렌이란 이름을 확실하게 알릴 거라고.
이미 할리우드의 탑급 배우들이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에게 거절당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나 가르시아 알렌이야.”
당시의 가르시아 알렌은 자신감이 넘쳤다. 오직 자신의 연기력 하나만으로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배역을 따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배우의 이름값이 아닌. 오직 연기력과 캐릭터 소화만 보고서 발탁한다고 알려진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었으니까.
그런데.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선택은 결국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의 연기력이 정말 인상 깊었지만 딱 거기까지라는 것.
- 자네는 앞으로가 정말 기대되는 재능을 가진 배울세. 너무 서둘러 가려고 하다 보면 넘어지는 법이야. 천천히 ‘연기’에 대해 더 경험하고 나서 같이 함세.
그래! 가르시아 알렌은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 하려는 말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 시나리오가 주인을 찾지 못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가르시아 알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 오스카의 남자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 차기작의 주인공은 동양의 배우?
- ‘디멘션 소서러’ ‘왕자의 난’의 배우 차서준.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주인공으로 발탁.
-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선택. 배우 차서준과 함께 올여름 제작 준비.
그 시나리오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어찌나 상심이 컸던지 망연자실한 표정만 지었던 가르시아 알렌이었지만.
“아니지. 직접 봐야겠어.”
이내 정신을 다잡고 배역 오디션을 준비했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원하는 작품들도 죄다 마다한 채. 오직 세르지도 디난테 감독의 다른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
그리고 오늘.
결국 가르시아 알렌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대본 리딩을 앞두고 있는 날까지 오게 된 것이다.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도 참 대단해. 사우스 코리아에 있는 배우를 직접 불러서까지 대본 리딩을 하려고 하다니. 화상 회의로 해도 되는 것을.”
“내겐 오히려 기회지.”
주인공으로 발탁된 차서준 때문에 방학이 되고 나서야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될 터였다. 그렇기에 오늘 대본 리딩이 정말 중요했다.
“세르지도 디난테 감독의 대본 리딩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지”
“어.”
“혹시나 해서 다시 말하지만. 그냥 대사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야. 전쟁이라고 전쟁.”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대본 리딩은. 감독이 배우들의 캐릭터 분석이 마음에 드는지를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감독의 눈에 흡족한 연기력을 보여주는 배우의 비중을 늘려주기도 하지만. 기준 미달의 연기를 보이는 배우를 교체하기까지 하는 자리.
오죽하면 오디션보다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대본 리딩이 더 긴장되어 두근거린다는 배우들까지 있을 정도일까.
“오늘 잡아먹으려고.”
젊은 나이에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는 연기파 배우가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재능과 연기에 미쳐 사는 열정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가르시아 알렌은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배우였다.
“혹시나 해서 디멘션 소서러랑 왕자의 난 봤는데. 확실히 장난 없더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무 흥분하면 안 돼. 알았지?”
매니저가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가르시아 알렌을 바라보았다.
이 연기에 미쳐 사는 배우에게는 한 가지 폭탄 버튼이 하나 있었다.
평소에는 단답형으로만 대화를 하는 바람에 답답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지만. ‘연기’와 관련된 주제만 나왔다 하면 입이 멈출 줄을 몰랐다.
한 번은 가르시아 알렌에게 시달리던 할리우드 유명 중년 배우가 줄행랑을 쳤을 정도. 기사가 터지고 배우의 열정으로 수습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매니저는 불안한 눈빛으로 다시 대본에 시선을 파묻은 가르시아 알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차기작 ‘라이프’의 최종 라인업이 발표되었을 때. 당연히 사람들의 반응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배우 라인업이 왜 이리 화려함? 진짜 저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의 주인공이 우리 차 배우라고? ㄷㄷㄷ]
└ 다른 감독도 아닌 세르지오 디난테잖아. 같이 작품 한 번 하고 싶어 하는 배우들이 엄청 많음. 눈도장 제대로 찍으면 친분 있는 감독들이 불러주기도 하니까.
└ 촬영장에서 장난 아니라고 소문이 가득하던데. 실제로 대본 리딩하다가 마음에 안 든다며 교체당한 배우도 있었잖아.
└ 그 배우 결국 대사 몇 줄 조연 전전하다가 할리우드에서 사라졌잖아. 생각보다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배우 보는 눈이 엄청 정확함. ㄷㄷ
└ 와. 저런 화려한 라인업의 가장 앞에 우리 차 배우가 있다는 사실에. 정말 가슴이 웅장해진다. ㅋㅋㅋㅋ
└ 가르시아 알렌, 제임스, 루카스 에드워드. 할리우드에서 연기력으로 이름 날리는 배우들이 다 저기에 있네. ㅋㅋㅋ
오디션 끝에 최종 캐스팅된 배우들의 이름을 보고서 이런 반응들이 터졌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영화 ‘라이프’ 대본 리딩을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대본 리딩장에 도착하자마자 강렬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쟤가 걔야?’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 작품의 주인공 자리를 얻었지?’
‘넷티비 드라마 안 봤어? 재능 자체가 말이 안 될 정도던데. 그냥 연기 천재야, 연기 천재.’
‘지금 골든 글로브, 에미상까지 언급되고 있는 판이긴 한데. 혹시 알아? 운이 좋아 인생 캐릭터를 연달아 만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어?’
‘뭐. 오늘 직접 확인해보면 알겠지.’
이런 수군거림은 당연한 순서일 정도.
그렇게 증명하고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나를 향한 의문을 담은 시선들이 느껴진다. 뭐, 그건 여기가 할리우드이니만큼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이번 대본 리딩은 월드 코믹스 영화 ‘디멘션 소서러’ 때와는 아예 상황이 달랐다. 배우들도, 분위기도.
“서준아. 괜찮아?”
“네. 누나도 많이 봤잖아요. 데뷔 때부터 무수히 겪었던 시선들이잖아요. 이제는 정말 괜찮아요.”
매니저인 수진 누나가 그 시선들에 걱정이 되었는지 물었지만. 난 정말 괜찮았다.
다른 감독도 아닌 오스카의 남자라고 불리는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의 영화였다.
이 자리에 앉은 배우들 하나하나가 모두 깐깐한 오디션을 통과했을 정도로. 연기에 진심인 배우들만 모여 있는 상황.
본인의 연기력에 누구보다 자부심이 강한 이들이기에. 저런 시선을 보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눈앞에서 증명하면 저 시선들도 달라지겠지.
잠시 후.
할리우드 내에서도 소문이 무성하던 ‘라이프’의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헤이, 제이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나 혼자 조난을 당했을 때 방향을 찾는 법을 가르쳐주지.”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는 법이요? 그런 방법이 있어요?”
뭐지? 너무 평범한데? 나를 향한 이런 시선들이 느껴진다.
몇 년 동안 묵혀두었다던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 작품의 주인공을 따낸 배우가 나였다.
거기에 ‘왕자의 난’을 통해 올해 각종 시상식을 점령하다시피 하는 배우 차서준에게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평범한 연기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평범한 소년 설정인 제이스기에. 지금 내가 하는 연기가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 생각한 정답에 가까울 터였다.
당장 흡족한 얼굴로 보고 있는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
나를 향한 기대치가 워낙에 높았기에 어쩔 수 없는 시선들이었다. 괜찮다. 조금 있다가 제대로 보여주면 될 테니.
*
가르시아 알렌은 대사를 치는 차서준을 보면서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주변에서 몇몇 배우가 실망인데? 하는 눈빛을 보낸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님의 표정을 봐야지.’
저 흡족한 표정을 보라. 만약 차서준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대본 리딩을 중지하고 한마디를 했을 감독이었다.
지금처럼.
“잠깐만. 방금 그 장면에서 그런 표현이 맞다고 생각하나?”
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슬슬 편안한 분위기에 적응하던 이들조차 허리를 다시 꼿꼿이 세운다.
“저번 오디션 때 보여주었던 연기보다 더 형편없어진 것 같은데.”
독설이지만 냉철한 지적이었다. 실제로 저 배우가 대사를 칠 때마다 흐름이 뚝뚝 끊긴다는 느낌을 다들 받았을 테니.
저 배우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다. 다른 대본 리딩 자리였다면 괜찮았을지 모를 연기가. 이 자리에 있는 배우들 사이에선 확연히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잠시 후.
맞닥뜨린 자연재해. 그로 인하여 조난당해버린 사람들. 최악의 상황에 서서히 하나둘 사라지고.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되는 거 아니겠어?”
“어떻게 당신이···”
마치 물컵에 스포이트로 물감 한 방울을 톡 떨어뜨리면 저러할까.
방금 전까지 신뢰 가득하던 차서준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 배신감 등의 복잡한 감정들이 퍼져나간다.
‘이거였구나.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님이 저 배우에게 반한 이유가.’
저게 어떻게 11살의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표정 연기란 말인가.
대사를 치고 있는 가르시아 알렌도. 생각보다 별로인 것 같은데? 이런 시선을 보내고 있는 배우들도. 어느새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로 차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제 진짜 혼자네?”
믿었던 이의 배신으로 조금밖에 남지 않았던 식량까지 모두 강탈당한 제이스. 그 절망의 끝자락 순간에서.
‘웃어?’
차서준은 웃고 있었다.
과거 가르시아 알렌이 저 감정을 표현할 때에 어떻게 했던가. 끝없는 좌절, 절망. 그리고 포기. 침전하는 조약돌처럼 한없이 가라앉는 표현을 했었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어린 배우가 가르시아 알렌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순간에 지은 저 알 수 없는 미소가. 주인공이 처한 이 상황에서 이보다 더 완벽한 표현은 없을 거라고.
지금 대본 리딩을 하는 도중임에도 소름이 쫙 돋을 정도인데. 저 모습을 영화관 대형 스크린으로 마주하게 될 관객은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상상을 떠올리고 만 가르시아 알렌이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왜 세르지오 디난테 감독이 12살의 어린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는지 증명하는 시간이.
*
몇 시간에 걸친 대본 리딩이 끝났다.
처음 막 시작되었을 때의 못 미더운 시선들은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장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사람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정식으로 인사하지. 가르시아 알렌.”
“차서준입니다. 편하게 준이라고 불러주세요.”
내 대답에 알겠다는 듯 가르시아 알렌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용건이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혹시 오늘 시간 괜찮나? 대본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으면 어떨까 싶은데. 괜찮다면 식사도 하면서.”
“네. 내일 아침 비행기니까 오늘은 시간 괜찮아요.”
“그러면 오늘은 아무래도 어색함이 있는 첫 만남의 자리니까. 가볍게 아까 주인공이 홀로 남겨졌을 때 왜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싶어.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몇 년 전에 그 배역을 따기 위해 도전했던 적이 있었지만 미끄러졌거든. 그때 감독님이···.”
응? 분명 나는 오늘 가르시아 알렌을 처음 만났다. 대본 리딩 전이야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대화를 나눈 건 지금이 처음이라는 뜻.
그런데.
왜 익숙한 느낌이 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