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직접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주연 PD를 만나러 가는 길. 서도현이 나를 데리러 와준 덕분에 조수석에 앉은 상태였다.
사실 어제 서도현을 만나서 크리스 앤더슨 감독의 전화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회사에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만나질 못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지. 배우 차서준의 소속사 대표 서도현에게 있어. 다른 그 어떤 소식들보다 훨씬 기쁜 소식일 테니.
“삼촌,”
“응?”
“어제 크리스 앤더슨 감독님에게 전화가 왔었는데요.”
“어제? 크리스 앤더슨 감독한테?”
갑작스러운 내 이야기에 서도현의 고개가 갸웃한다. 당장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나에게 직접 전화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단순한 안부 전화였다면 내가 서도현에게 연락이 왔다고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거고.
“혹시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니?”
“아뇨. 특별히 무슨 일이 생기거나 그런 건 아닌데. 새해가 밝으면 미국으로 한 번 오라는데요? 친구들끼리 모임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다들 절 보고 싶어 한다면서요.”
내 말에 서도현의 고개가 이쪽을 향해 홱 돌아선다. 이 삼촌 보소. 아무리 놀라도 그렇지. 운전할 때에는 앞을 봐야지.
순간 운전 중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구름엑터스 대표 서도현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긴 했다.
크리스 앤더슨 감독의 친구들 모임이 어떤 곳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운전할 때에는 항상 정면주시를 해야 하는 법이다.
“삼촌! 앞에!”
“미안. 삼촌이 갑자기 너무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서.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말한 모임이 그 감독들 모임 맞지?”
다른 배우도 아닌 직접 키우다시피 한 차서준에 관한 일이었다. 서도현이 작품을 선택할 때 단순히 대본, 시나리오만 보는 게 아니었다.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또 작가는 어떤 스타일인지. 제작사에 잡음은 없는지. 그 모든 것들을 꼼꼼하게 따져 검토를 마친 뒤에 나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서도현이었다.
과거 ‘디멘션 소서러’ 캐스팅 디렉터를 만난 순간부터 크리스 앤더슨 감독에 대한 정보들을 모두 알아보았을 것이다.
“맞아요. 할리우드 내에서도 꽤나 유명한 모임이라고 하더라고요. 할리우드 거장들의 만남이라고 기사도 자주 난데요.”
“그렇지. 할리우드의 거장들이 모이는 자리이니까. 그런 자리에 단순히 얼굴을 보자고 서준이 널 불렀을 리는 없을 텐데.”
배우 차서준이 박우형, 김정범, 김우승과 같이 연사모라는 모임을 만들었다면.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들이 새해 1월마다 만난다는 걸 알고 있는 서도현이었다.
그 자리가 단순하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서로 시나리오도 주고받고. 결정적으로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기도 한다는 것.
“아마 이유가 있는 거 같아요. 크리스 앤더슨 감독님이 꼭 저를 보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다고 했거든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한번 서도현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다행히 이번에는 운전 중임을 잊지 않고 정면을 다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도현의 귀가 쫑긋 나를 향했다. 배우 차서준을 꼭 보고 싶어 하는 감독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아마 내게 스케줄이 있었더라도 어떻게든 조정해서 가자고 했겠지. 그런데 때마침 지금 스케줄도 없다?
“그러면 무조건 가야지.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가야 할 판에. 마침 서준이 네가 쉬는 타이밍이니.”
“안 그래도 감독님에게 삼촌에게 말하고 답변한다고 했어요.”
“잘했다.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야 월드 스튜디오와의 계약이 남았지만. 서준이 널 보고 싶어 하는 다른 감독들에겐 이유가 있을 거다. 날짜 말해주면 삼촌이 바로 티켓 예약하마.”
서도현은 당장이라도 회사에 연락해 비행기부터 예매할 기세였다.
“비행기 티켓은 여기서 함께 올 인원만 말해주면 크리스 앤더슨 감독님이 보내준다고 했어요. 따로 숙소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요.”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서도현의 눈빛이 빛난다. 마치 소속사 대표로서 끝내주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표정이었다.
왜 모를까.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들이 모이는 자리에 배우 차서준을 보고 싶다는 말이 나왔단다. 거기에 모든 비용까지 지원을 하겠단다.
이건 단순히 안면을 트자는 게 아니라. 누군가 배우 차서준을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이거. 내년에 또다시 차 배우의 해가 찾아올지도 모르겠는데.”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서도현의 입가가 기대감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이주연 PD와의 미팅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어차피 조율이야 어제 두 사람이 만나면서 끝난 상태였다.
“PD님. 혹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도 괜찮을까요?”
“우리 차 배우의 아이디어면 무조건 환영이죠. 어떤 좋은 생각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해온 아이디어 모두 듣는 그 순간.
“좋은데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메모하기 시작하는 이주연 PD였다. 그만큼 내가 방금 말한 아이디어가 제법 마음에 들었던 모양.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지방 관광지 여행이라. 오히려 기존 협찬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겠네요.”
“아무래도 이번 프로그램의 취지가 힐링과 가족이잖아요. 지금 타 방송사에서 하고 있는 프로그램과 차별성을 조금 주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내가 제시한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협찬, 광고 등의 비싼 키즈카페, 테마파크가 아니라. 주말에 가족들이 함께 떠날 수 있는 관광지를 보여주자고.
후발주자라 시청자들의 관심이 적을 수도 있겠지만. 배우 차서준이 출연을 결심한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무조건 성공할 테니까.
어떻게 아냐고? 김도경 시절에 성공했던 포맷이거든. 당시에도 후발주자로 스타트한 가족 예능이었는데. 기존 박탈감을 주던 예능들과의 차별성을 두어 꽤나 사랑을 받았었다.
“일반적인 연예인 가족 출연자였다면. 아무래도 주목을 받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우리 서준이가 출연한다는 소식이 나가자마자 시선이 집중되겠죠.”
“서 대표님 말씀이 맞아요. 사실 우리 차 배우가 출연한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광고들이 물밀듯이 밀려올 테니까요.”
역시 CBS 예능국의 에이스라 불리는 이주연 PD다웠다. 아이디어 제시만으로도 괜찮은 스토리를 뽑아내는 걸 보니.
이번 만남은 아무래도 성공적인 것 같다.
*
올해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내일부터는 11살이 아닌, 12살의 차서준이 된다는 뜻.
그리고.
“형아! 최고!”
“엉아! 체고!”
연말을 맞이하여 동생들을 위한 깜짝 선물 하나를 준비했다. 원래 약속했었던 주말마다 놀러 가기를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에 준비한 파티.
하준이와 하윤이의 절친들을 초대해서. 우리집에서 작은 연말 파티를 열었다. 일명 ‘연말 대게 파티’.
사실 연말 파티라고 해봤자 특별한 건 없었다. 하준이, 하윤이와 친구들이 좋아하는 대게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아쉽게도 오늘은 평일인지라 아빠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겨울방학이라 애들과 엄마들만의 연말 파티인 셈.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우리 서연이가 유치원만 다녀오면 그렇게 하준이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어머? 서연이네 엄마도 그랬어요? 우리 은서도 얼집만 다녀오면 하윤이와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말해주던데.”
배우 차서준의 집에 초대받은 엄마들의 표정이 기쁨으로 넘쳤다. 다른 연예인도 아닌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탑급 연예인이 집으로 초대했으니까.
가족들, 특히 동생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유명한 배우 차서준으로 알려졌기에. 오늘 연말 파티 초대의 의미가 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오늘 우리집에 온 어른들까지 다 먹고도 포장해가야 할 만큼 많이 준비된 대게들은 덤이었다. 아빠들도 챙겨야지.
“어서 오세요. 연말에 불쑥 초대를 했는데.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우리집에 처음 손님을 받는 엄마의 표정이 밝았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아들이 워낙 유명한 연예인인지라 함부로 초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배우 차서준의 방이 현관 근처에 있는지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엄마들을 밖에서만 만났던 엄마였다.
오늘 이후로 편하게 친해진 분들을 집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안녕하세요. 차서준입니다. 동생들에게 서연이, 은서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놀이터에서 종종 만났거든요.”
여기서 퀴즈 하나. 배우 차서준의 집에서 나를 만난 엄마들의 가장 첫 행동은 무엇일까?
바로.
“브이!”
“브이!”
나와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놀이터에서 만났을 때 애들과는 사진을 찍어줘도. 단둘이 사진을 요청하긴 쉽지 않았으니까.
내가 흔쾌히 서연이와 은서를 깜짝 파티에 초대한 것도. 놀이터에서 몇 번 만나본 결과 사람들이 제법 좋았기 때문이었다.
“어머? 정말요? 우리 서준이 팬이에요?”
“네. 우리 차 배우잖아요. 사실 집에서도 비밀인데 차 배우 작품 다 챙겨봤어요.”
대화를 조금 나눠보니. 두 분 다 내 작품들을 모두 챙겨볼 정도로 팬이었단다.
그런 어른들의 세계와 다르게.
“께!”
“깨!”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대게들을 마주한 아이들은 기쁨의 덩실덩실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나 출연료로 용돈을 모아 대게를 사주고 싶다던 하준이의 표정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서연아. 이거 이렇게 먹으면 돼.”
“고마워.”
그런 동생과 친구들의 모습을 나는 카메라에 담아두었다. 나중에 형이 얼마나 잘해줬는지 증거 남겨둬야지.
새해를 앞둔 11시 55분.
낮에 깜짝 파티에 체력을 모두 쓴 하준이와 하윤이는 이미 코오 잠든 지 오래였다.
“서준이는 안 졸리니?”
“네. 괜찮아요. 제야의 종 칠 때 소원만 빌고 잘 거예요.”
새해 소원은 빌어야지. 작년에 기도한 소원이 모두 이루어졌으니까.
12살이 될 차서준이 바라는 새해 소원은 하나였다.
- 10, 9, 8···3, 2, 1, 0.
“우리 가족 새해에도 행복한 일 년 보내게 해주세요. 하준이, 하윤이가 건강하게 쑥쑥 자라게 해주시고요.”
어? 나도 모르게 소원을 말한 모양.
“우리 서준이도 엄마랑 같은 소원 빌었네?”
여기까지는 훈훈했다. 저기 옆에서 아빠가 이런 나를 동영상으로 찍고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
12살의 새해부터 미국을 찾은 나였다.
“오는 동안에 불편한 데는 없었고?”
“네, 삼촌. 잠도 쿨쿨 자면서 왔어요.”
할리우드 거장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서도현 역시 함께 왔다. 단순히 얼굴을 보기 위해 불렀을 리는 없을 테니.
특별히 크리스 앤더슨 감독을 만나는 일을 제외하곤. 말 그대로 새해 휴가 같은 느낌의 방문이었다.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말한 모임은 이틀 뒤였다. 허나 미국 땅을 밟자마자 누군가를 만나야만 하는 나였다.
“저쪽에서 어지간히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보자고 하는 걸 보니.”
“그러게요. 크리스 앤더슨 감독님이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성질 급한 친구 하나가 자꾸 재촉한다고요.”
내 말에 서도현이 웃음을 터트린다. 할리우드에서 크리스 앤더슨 감독과 친분이 깊으면서. 또 성질이 급한 감독.
이 조건들이 가리키는 감독은 딱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이거. 생각보다 훨씬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는걸.”
“맞아요. 그 감독님이 슬슬 다음 작품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했었대요.”
오스카의 남자라고도 불리는 감독.
세르지오 디난테.
그 이름을 떠올린 서도현과 나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할리우드의 명감독이 하루라도 빨리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만나보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