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느긋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왜냐고?
오늘이 바로 초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이었으니까. 오늘 오후에 있을 촬영 전까지는 휴식인 셈이다.
내가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이불을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우리 서준이 잘 잤니? 오늘 개교기념일이라 학교 안 가는 데에도 일찍 일어났네?”
“이 시간이 되니까 눈이 번쩍 떠졌어요. 엄마, 저도 계란 하나 먹을래요.”
엄마, 아빠에게 아침 인사를 해야지. 엄마를 한 번 꼬옥 안아주고. 다음으론 머리를 말리고 나오는 아빠를 굿모닝 인사와 함께 안아주었다.
같이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아빠의 아침 커피 한 잔 후 출근 시간이 찾아왔다.
“다녀오세요!”
“그래. 아빠 잘 다녀올게. 우리 서준이도 오늘 오후에 있는 촬영 잘하렴.”
오늘도 힘을 내라며 아빠와 내가 서로를 안아주며 출근 인사를 하는 그 순간.
“아빠!”
“아빠아!”
코오 잠이 든 줄 알았던 하준이, 하윤이가 후다닥 달려 나와 아빠를 꼬옥 안아준다. 나와 아빠의 대화에 잠이 깬 것인지 반쯤 감긴 눈을 한 채로.
아직 잠에서 다 깨질 않아 휘청거리는 바람에. 넘어지려는 하윤이를 옆에서 잡아주어야만 했다.
“하하. 다녀올게!”
그런 귀요미 동생들 덕분에. 아빠의 오늘 출근길은 행복한 웃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하준이, 하윤이. 잘 잤어?”
“응!”
“엉!”
아직 눈가에 졸음이 대롱대롱 달린 동생들을 세수시키고 나면.
“우리 하준이, 하윤이. 아침 먹을래?”
“네!”
“네!”
엄마가 하준이, 하윤이의 아침을 준비해서 식탁으로 부른다.
사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아침에 아빠를 배웅하고 조금 더 자거나, 아니면 엄마에게 놀러가자며 조르던 동생들이었지만.
올해는 작년과 달라진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가자, 형아!”
“어머. 오늘은 우리 서준이가 하준이를 데려다줄 거니?”
“네. 개교기념일이잖아요. 처음으로 하준이 통학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오고 싶어요. 오늘은 제가 다녀올게요.”
바로 하준이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 처음에는 엄마랑 하윤이와 떨어지기 싫다고 울었으나. 어느새 친구들과 노는 유치원 생활에 잘 적응한 모양이었다.
지금도 씩씩하게 다녀오겠다며 하는 걸 보니 말이다. 유치원복을 입은 채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는 하준이의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평소에는 저렇게 낑낑거리며 옷을 입던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내가 학교에 간 뒤에 유치원에 갈 준비를 하는 하준이었으니까.
“엉아! 다녀아!”
“하윤이 너도 잘 갔다 와.”
하준이와 하윤이가 서로 잘 다녀오라 하는 인사도 아침에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찰칵.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동영상에 담아두었다.
하루하루 쑥쑥 커가는 동생들을 보고 있으면. 뿌듯하면서도 귀여운 이 시기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간다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하준아. 유치원 생활 재밌어?”
“응! 친구들도 엄청 생겼어.”
정말로 즐거운 건지. 내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도 흥얼거림을 멈추지 못했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아주 친한 친구가 생겼다고 자랑을 하긴 했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산다면서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면서.
아쉽게도 최근에는 내가 촬영에 바빴던지라. 그 친구가 어떤 아이인지 아직까지 만나진 못했다.
같이 통학 버스를 타고 갈 테니. 오늘 만날 수 있으려나?
“형아도 오늘 촬영 잘 갔다 와.”
“알았어.”
이런. 형밖에 없다며 졸졸졸 따라다니는 게 엊그제만 같은데. 어느새 친구들이 생겼다며 유치원을 기다리는 하준이라니.
그렇게 하준이의 손을 잡고선. 아파트 단지 내 유치원 통학 버스를 타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쪽 멀리서 귀여운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하준이를 부른다.
“하준아!”
여기까지는 평범한 상황이었다. 같이 유치원에 다니는 친구가 하준이를 보고선 불렀을 수도 있을 테니.
문제는.
“서연아!”
하준이가 잡고 있던 내 손까지 놓고서 여자아이를 향해 우다다 달려갔다는 점이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휑해져버린 손을 바라보았다. 어디 갔지? 방금 전까지 하준이의 작은 손이 있었는데.
“하, 하준아?”
내가 그런 하준이를 뒤에서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이미 저쪽에서 걸어오는 친구에게 신경을 뺏긴 하준이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
“안녕하세요.”
“하준이는 오늘도 씩씩하구나. 오늘은 엄마랑 같이 안 나왔네?”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서 이쪽을 보더니. 그제야 내가 눈에 들어왔는지 나를 소개한다.
“아, 맞다. 저기 우리 형아야. 형아! 여기는 서연이.”
그제야 내가 함께 나왔다는 사실이 떠오른 하준이었다. 손을 잡은 서연이라는 친구에게 나를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하준이의 형 차서준입니다.”
“어머? 차서준 배우 맞죠?”
“네. 오늘은 엄마 대신 하준이를 데려다주려고 나왔어요.”
서연이라 불린 아이의 손을 잡고 온 엄마가 날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 최근 가장 유명한 연예인이 동생 손을 잡고 나와 있었으니까.
아파트 단지 내에 유명 인사인 나였기에. 소문에 대해 알고는 있었겠지만. 학교에 다니느라 실제로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일 테니.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 머리 예쁘게 잘됐네?”
“응. 엄마가 해줬어. 하준이 너도 오늘 귀여워.”
“헤헤.”
하준이는 서연이라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럴 수가. 동생이 여기서 나를 외면하다니. 심지어 오늘 데려다주겠다고 손까지 잡고 나왔는데.
확실히 서연이라는 아이가 예쁘긴 했다. 손을 잡고 나온 엄마만 하더라도 많은 연예인들을 본 나조차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래도 그렇지.
하준아, 너 어떻게 형을 이렇게···.
“어? 버스 온다.”
형이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하준이가 서연이와 함께 유치원 버스를 보더니 손을 흔든다.
“어머나? 서준아! 동생 배웅하러 나왔네? 초등학교는 잘 다니고 있어?”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학교도 잘 다니고. 작품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조만간 유치원에도 한번 놀러갈게요.”
통원 버스에서 내려 하준이에게 인사를 건네던 선생님이 화들짝 놀란다.
그랬다.
하준이가 다니고 있는 유치원이 바로 내가 다녔던 가람 유치원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버스에서 내린 사람이 사총사 친구들과 보냈던 샛별반 담임 김수아 선생님이었다. 당연히 날 보자마자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오늘은 개교기념일이라서 엄마 대신 동생을 배웅하러 나왔어요.”
“그랬구나. 하준이가 오늘 처음으로 형이 이렇게 데려다줘서 기분이 좋았겠네?”
“네! 너무 좋아요!”
김수아 선생님이 말을 하자. 그제야 날 보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하준이었다. 늦었단다 동생아. 형은 상처를 받았어요.
하지만.
“형아! 다녀올게!”
“다녀와.”
그 상처는 나를 꼬옥 안아준 뒤 버스에 오르며 손을 흔드는 하준이 덕분에 사르르 아물어버렸다.
통학 버스에 오르고서도. 창문 너머로 열심히 형아! 하고 외치는데 어찌 안 풀리겠어.
“다녀왔습니다.”
“하준이는 잘 보냈니?”
“네! 이제 하윤이 차례네. 오늘 하윤이는 엄마랑 오빠랑 같이 가는 게 어때?”
“저아!”
하준이를 데려다주고 나면. 다음은 하윤이 차례였다. 오빠가 유치원에 다니는 걸 보더니. 자기도 어린이집에 가겠다고 결심을 한 것.
다행히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에 등록하고 다니고 있는 하윤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씩씩해진 하준이, 하윤이를 보면서. 대견함과 아쉬움을 느끼셨다고 했다.
“엉아!”
“하윤아. 갈까?”
“응!”
한쪽에는 엄마 손을. 다른 한쪽에는 내 손을 잡고 꺄하! 하며 좋아하는 하윤이를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그때였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몸을 흠칫 떨 수밖에 없었다.
“하윤아. 혹시 하윤이도 어린이집에 친한 친구 있어?”
몇 분 전. 나를 매몰차게 외면했던 하준이의 모습이 떠올랐으니까.
하윤이도?
에이, 설마···.
“엉! 이써!”
뭐? 있다고?
어린이집에 친한 친구가 있다는 하윤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데. 아까 하준이에게 당한 경험의 충격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
“휴우. 다행이다.”
“왜? 무슨 일 있었니?”
“아, 아니에요. 하윤이가 어린이집에 잘 적응한 것 같아서 그랬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린이집 안까지 따라간 나였다. 설마 하윤이도 친해진 남자 친구가 있을까 싶어서.
“하윤아!”
“은서야!”
다행히 하윤이의 어린이집 베프는 남자아이가 아니었다.
뭐. 딱히 간섭하겠다는 건 아니고. 워낙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귀여운 막내 하윤이다 보니. 아직은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준이, 하윤이를 모두 등원시키고 나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엔 조금 아쉬운데.
“엄마. 집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근처에서 맛있는 거 마시고 들어가요. 엄마는 커피, 저는 과일 주스요!”
“그럴래? 저기 앞에 상가에 가게가 새로 생겼거든. 아침이라 사람도 많이 없을 테니까. 잠깐만 갔다가 집에 들어갈까?”
“좋아요! 우리 얼른 가요!”
카페에 갔다 가자는 내 말에 뛸 듯이 기뻐하는 엄마를 보니. 정말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교기념일 덕분에 많은 에피소드가 생긴 즐거운 아침이었다.
*
배우들부터 시작해 막내 스태프까지. 모두의 밝은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진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랬다.
드디어 넷티비 드라마 ‘왕자의 난’ 촬영이 모두 끝난 것이다.
아직 CG 등의 후반 작업이 남아있지만. 현장에서 배우들과 함께하는 촬영은 모두 끝난 셈이었다.
김주철 감독을 비롯해. 박정아 작가, 막내 스태프까지 모두의 표정이 밝았다.
“내가 많은 작품들을 하면서 하나 삘이 올 때가 있거든?”
“무슨 삘?”
“작업이 끝났을 때. 이거 된다! 하는 이런 느낌이 올 때가 있어. 그런데 이번에는 그 느낌이 팍팍 온다니까.”
“너도? 나도 그랬는데. 사실 촬영하면서도 감탄이 나올 때가 많았잖아.”
스태프들끼리 저런 말을 수군수군할 정도로. 이번 ‘왕자의 난’ 촬영 기간 동안 꽤나 좋은 장면들이 많이 뽑혔기 때문.
오죽하면 농담처럼 하루라도 빨리 넷티비에서 공개되었으면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을까. 아직 후반 작업이 남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 다들 드라마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용이 유출되어선 안 됩니다. 아시겠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주철 감독이 재차 다시 한번 강조를 한다.
12월에 넷티비에서 공개될 예정인 ‘왕자의 난’ 내용이 미리 스포되어 버리면 안 될 테니.
그와 함께 ‘네!’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우렁찬 대답이 들려온다.
보안 유지는 공개 전까지는 유지하면 된다. 8화로 편성된 ‘왕자의 난’은 공개일에 1편부터 8편까지 한 번에 올라갈 테니까.
“자자! 아직 모든 작업이 끝난 게 아니니까. 오늘은 아쉽더라도 쫑파티로 만족하고. 다음에 정말 다 끝나면 제대로 된 파티 열어봅시다.”
이번 드라마를 위해 특별 제작된 세트장인 만큼. 이 안에서 가볍게 배달 뷔페와 함께 쫑파티를 준비했다.
“서준아. 많이 먹어.”
“네. 형은 왜 그것밖에 안 먹어요?”
한 그릇을 가져온 박우형이었지만. 그 접시 위에는 빵 몇 개만 있을 뿐이었다.
“형. 이거 오리 맛있어. 가져다 먹지 왜 빵만 가지고 왔어?”
김정범도 그런 박우형의 그릇을 보며 물었지만.
“조금 있다가 약속이 있어서.”
선약이 있어 조금만 먹는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김정범이 무어라 더 말하려는 순간.
“여기들 계셨네. 우리 배우님들. 고생 정말 많으셨습니다.”
제작사 파란꿈나무 대표 박중수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확실히 다른 그 어떤 작품보다 이번 ‘왕자의 난’ 촬영 현장이 편하긴 했다. 넷티비의 과감한 투자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것 외에도 제작 피디가 먼저 나서서 식사부터 사소한 것 하나까지 꽤나 신경을 써주었기 때문.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
박중수 대표의 말처럼 얼마 남지 않았다.
넷티비를 통해 전 세계에 ‘왕자의 난’이 공개될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