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몇 달 전 ‘왕자의 난’을 준비할 당시. 김주철 감독에겐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아무래도 직접 비교선상에 놓고 보면 아쉽겠지?”
“흐음. 그렇긴 하죠. 아무리 승마 전투를 멋지게 만들어보려고 해도. 해외에서 제작되고 있는 것들에 비하면 부족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 그래서 고민이란 말이야. 안 그래도 박 작가도 그 부분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하더라고.”
TV 채널을 통해 공개가 될 상황이라면 아무런 고민도 없었을 것이다.
회당 35억이라는 제작비는 보는 이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아니, 국내를 한정해서 보자면 끝내주는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게 할 테니까.
문제는.
“넷티비는 전 세계 사람들이 본단 말이지. 저들의 눈을 확 사로잡을 수 있는 전투씬이라. 어떤 느낌으로 가야 할까.”
‘왕자의 난’이 넷티비를 통해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된다는 점이었다.
당장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드라마들만 보더라도. 한 편 한 편이 ‘저거 영화 아니야?’ 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퀄리티를 뽑아내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이건 성적보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아무리 제작진이 ‘우와! 대박!’ 하며 촬영해봤자. 해외 시청자들의 눈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때였다.
며칠을 고민하던 김주철 감독의 머리에 엄청난 아이디어가 스쳐지나간 것은.
“아직까지 해외에서 터진 우리 사극이 없었지?”
“네. 아시아 시장에선 인기를 좀 얻은 것이 있긴 했는데. 서양까지 이름을 알린 작품은 없었습니다.”
“그거야!”
거기까지 들은 김주철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핸드폰을 재빨리 꺼내 박정아 작가에게 전화를 건채로.
“박 작가. 지금 혹시 바빠? 우리 작품에 관한 매우 중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하는데.”
박정아 작가에 이어 김주철 감독이 전화를 건 곳은.
“예. 대표님. 지금 바로 회의가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기로 오시죠.”
제작사인 파란꿈나무 대표 박중수였다. 만약 김주철 감독 본인이 생각한 방향으로 결정이 된다면. 제작사의 역할 역시 중요할 테니.
그렇게 갑작스러운 열린 회의는.
“오케이. 그러면 그렇게 가는 걸로 결정합시다.”
“좋네요. 역시 감독님이야.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어요?”
“저는 여기 감독님, 작가님만 믿고 열심히 준비해보겠습니다.”
무려 4시간이 넘는 열띤 토론 끝에 끝이 날 수 있었다.
*
“크. 이거지.”
김주철 감독은 아직 본 촬영이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배우들의 분장을 담당한 스태프들 역시 마찬가지.
이유는 간단했다.
제작사 대표인 박중수까지 발이 땀이 차도록 뛰어다닌 결과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서준아. 이거 완전 그림이 나오겠는데?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어.”
“정말요? 여기서 이렇게, 또 이렇게 움직이려고 하는데. 카메라에는 괜찮게 잡힐까요?”
“물론이지. 그 부분은 내가 동선 확실하게 잡아서 찍어줄 테니까. 방금 리허설처럼만 하면 돼.”
어렵게 수소문한 장인에게 요청한 의복과 소품들이 그 값을 톡톡히 보여주고 있었다.
차서준의 체형에 맞게 제작된 의복과 도포.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리 위에 올려진 갓. 드라마의 주인공인 만큼 특별히 고증에서 약간 벗어나더라도 도포와 갓을 입힌 것이다.
흔히 말하는 한복의 미를 담은 차서준의 복장은. 저 모습을 처음 보는 서양인들이라면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서준이 전생에 왕족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저리 귀티가 잘잘 흐르지?”
“카메라로 담기 전 실물로도 감탄이 나오는데. 아마 화면으로 보면 눈을 뗄 수가 없을걸.”
“아까 연습할 때 보니까. 도포가 펄럭이면서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더라고요. 이거 먹히겠다. 이 생각이 절로 들더라니까요.”
스태프들 역시 그런 차서준의 모습을 보면서 수군거림을 멈추질 못했다.
“자, 차 배우. 마지막으로 손발 맞춰보게 최종 리허설 한 번만 가보자고.”
“네! 감독님!”
본 촬영이 시작되기 전. 무술 감독의 요청에 따라 스턴트 배우들과 차서준의 마지막 점검이 이루어졌다.
잠시 후.
“자, 시작합시다!”
김주철 감독의 외침과 동시에 본 촬영이 시작되었다.
대규모 인원들이 난전을 펼치는 장면이었다. 먼저 정체를 숨긴 세자 근처에 10여명의 호위들이 뒤를 따랐다.
‘그렇지. 이런 그림이 나와야지.’
세자인 차서준의 뒤를 따르는 호위들의 복장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고증은 지키되 서양인들의 눈을 확 사로잡을 수 있는 퀄리티의 의복들을 만든 것이다.
“누구냐!”
호위대장이 나무숲을 향해 고성을 지르자. 그 안에서 검은 복면을 쓴 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와 동시에 황급히 세자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속삭이는 호위대장. 저 대사는 후시작업으로 따로 목소리를 딸 예정이었다.
세자에게 물러남이 좋을 것 같다고 고하는 호위대장.
“세자 저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것으로 보아. 좋지 못한 의도로 나타난 이들 같사옵니다. 일단 몸을 피하셔야 하옵니다.”
하지만.
호위 병력보다 3배는 더 되어 보이는 복면인들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입꼬리를 씰룩였다.
갓 아래 슬쩍 비치는 세자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다. 이미 저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서 온 듯싶구나. 과연 어떤 불순한 종자가 나에게 검을 겨누는 것인지. 내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스릉. 그와 동시에 뽑혀져 나오는 검. 팔의 움직임에 펄럭이는 도포까지.
호위들이 세자를 따라 검을 뽑는 순간. 살기를 품고 달려드는 복면인들.
차창. 창. 난전이 펼쳐진 상황 속에서.
“과연 사대부들 중 어느 누가 내게 네놈들을 보냈는지 확인해봐야겠구나.”
흐트러진 갓을 살짝 매만지며 잔혹한 미소를 짓는 세자. 그리고 적을 향해 도포를 펄럭이며 달려들며 검을 휘두르는데.
그런 세자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복면인들과. 어떻게든 세자를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막아서는 호위들의 죽고 죽이는 싸움.
몇 분 뒤. 세자의 지시에 따라 뒤를 밟던 호위들이 추가로 도착하며 결국 정리되는 복면인들. 생포한 복면인은 고작 넷.
“자, 말해 보거라. 누가 네놈들을 세자인 나를 죽이라며 보냈느냐.”
대본 속 글자로 본다면. 그저 범인을 추궁한다는 평범한 대사 한 줄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대사를 내뱉는 세자의 무심한 눈빛. 뒤틀린 입매. 마지막으로 걸음을 따라 핏물이 가득한 바닥에 끌리는 검.
모든 상황을 카메라 너머 모니터로 보고 있던 김주철 감독은 마른 입술을 느끼며 입을 달싹였다.
‘크. 마지막에 목을 찌르며 고개를 들이미는 연기 좋고.’
이 장면을 넷티비를 통해 볼 시청자들의 철렁이는 심장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것 같은 김주철 감독이었다.
결국.
“오케이!”
김주철 감독이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오케이 사인을 외쳤다.
*
확실히 김주철 감독은 한국 사극이 어떤 방향으로 해외 시청자들에게 어필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구구. 나 죽는다.”
“에이, 정범이 형. 그걸로 엄살 부리면 안 돼요. 아까 저 찍는 거 못 보셨어요?”
“봤지. 넌 어떻게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냐. 나는 이것만으로도 죽겠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특히 김주철 감독의 액션에는 리얼리티가 있었다. 슥슥 푹 하면서 적을 일방적으로 도륙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죽고, 죽이는 처절한 전투를 원했다.
방금 전에 찍었던 습격으로 인한 전투씬에서도. 일방적으로 복면인들을 도륙한 것이 아니라. 세자를 지키기 위해 호위들의 몸을 던진 희생이 있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무술감독님이 함박미소를 지은 것으로 보아. 연습 때보다 더 좋은 장면이 나온 모양.
거기에 이제 후반 작업과 CG 처리를 통해 최종 마무리가 되고 나면. 정말 넷티비에 올라온 서양 대작들에 꿇리지 않는 장면이 완성될 터였다.
“아까 서준이 너 액션 씬 보니까. 와, 이런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 그거 연습하느라 힘들었겠던데?”
“스턴트 형들이 잘해줘서 괜찮았어요. 오히려 저보다 격하게 몸을 날려야 하는 형들이 더 힘들었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내 말을 들은 김정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만큼 아까의 촬영이 격렬하면서도 박진감이 넘쳤으니까.
주변에서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면. 최종 완성될 결과물은 기대해도 괜찮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끝내주는 촬영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쉬움 점이 하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아닐지 몰라도. 특히 세자 역을 연기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 느껴지는 커다란 아쉬움이.
“근데 서준아. 너 어쩌냐. 아까 전투 장면을 보니까 아예 확신이 서던데.”
“형도 느꼈어요?”
“당연하지. 이거 등급 심사 받으면 빼박 청소년 관람불가 뜰 거 같다.”
“하아, 그러게요. 저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바로 시청등급에 관한 부분이었다.
‘왕자의 난’이 확실하게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선. 리얼리티 넘치는 연출이 필수였으니까.
국내 TV 채널에서 방송될 때처럼 전투 장면을 스무스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R등급이 나올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만 했다.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왕자의 난 내용 자체가 그렇잖아요.”
“맞지.”
권력을 향한 탐욕스러운 욕망. 그 욕망에 아스라이 쓰러져 가는 목숨들. 본격적인 전개가 시작된 이상. ‘왕자의 난’의 수많은 캐릭터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불나방인 줄 알면서도. 권력이라는 불길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이다.
‘승리’가 아니면 ‘죽음’뿐.
이걸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선 시청 등급이 자연스럽게 청소년 관람불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죠. 안 그러면 김 빠진 콜라가 될 테니까요.”
“아쉽네. 대신 나중에 형이 보고서 어떤지 말해줄게. 우승이, 우형이 형이랑 같이 보면 정말 재밌을 텐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괜히 그랬다가 기사 떠요.”
정말로 아쉬운 건지. 아니면 배우 차서준에게 드디어 인간적인 면모를 찾아 즐거운 건지. 김정범이 너무 안타깝다며 나를 위로했다.
나를 볼 때마다 ‘쟤 11살 아닌 것 같아. 저 안에 30대 있는 거 아니야?’라고 농담을 던지던 김정범이었다.
저 싱글벙글한 표정과 씰룩이는 입꼬리나 감추고서 말하지.
자신의 표정이 들켰음을 알아차린 것일까. 김정범이 재빨리 화제를 전환한다.
“그나저나 시간이 참 빠르네. 정말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게요. 분명 대본 리딩을 하던 날이 엊그제 같고. 또 첫 촬영을 시작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버렸네요.”
정말 그랬다.
5월에 있었던 ‘디멘션 소서러’ 개봉 이후 시작된 촬영이 어느새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사전제작인 만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찍지 않아 몰랐는데. 어느새 남은 촬영 일정을 확인해 보니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던 셈이었다.
“형이 봤을 땐 어떨 거 같아요?”
“우리 드라마?”
“네. 이번 드라마는 특히나 기존에 했었던 작품들과 다르잖아요. 흥행 기준도 시청률이나 이런 국내가 아니고요.”
“글쎄. 넷티비에서 공개되는 건 또 처음이라 정확히 가늠이 되질 않지만.”
말은 저렇게 하지만. 김정범의 표정엔 확신이 있었다.
“일단 촬영 기간 내내 느낀 건데 말이지. 우리 드라마 진짜 대박이 날 것 같아.”
“형도 그렇게 느꼈어요?”
“당연하지! 여태까지 배우 차서준이 선택한 작품 중에서 실패는커녕 모조리 대박이 났는데.”
거기에 나도 있잖아! 라고 외치는 김정범에게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좌의정 조인규의 역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 배우가 정범이 형이었으니까.
“야야. 너 섭섭하게 그러면 안 된다. 나중에 넷티비로 우승이랑 우형이 형이랑 보고 소감 말 안 해준다?”
그나저나 큰일이긴 했다. 내가 찍은 드라마를 정작 본인이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얼른 나이가 먹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