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사전 제작이라 하여 대본 수정이 없을 수는 없었다. 박정아 작가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촬영장을 찾곤 했었다.
‘저번에 보니까. 조인규의 김정범 분량은 조금 더 늘려도 괜찮을 것 같고. 예상보다 주정혁이 좀 부족하다고 느껴지네. 약간 줄여야겠어.’
‘왕자의 난’을 쓴 작가인 박정아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그림과. 실제 배우들이 연기해서 완성된 장면은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배우의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 배우와 함께 호흡을 맞추다 보면 존재감에서 밀리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
특히나 권력을 향해 거침없이 욕망을 드러내는 이들의 전쟁을 다룬 ‘왕자의 난’에 있어. 시청자가 그 부분을 느끼는 순간 긴장감이 탁 풀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박정아 작가가 본격적인 촬영 전부터 걱정한 부분이 딱 하나가 있었다.
“감독님.”
“응? 박 작가, 왔어? 아직 준비 중이니까. 저쪽에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봐.”
바로 박우형과 차서준에 관한 것이었다. 두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박우형은 ‘폭군의 세자’로 신드롬까지 일으켰던 배우였고. 차서준은 고작 10살의 나이에 연기력 하나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배우였으니까.
다만.
오늘 박정아 작가가 촬영장에 방문한 이유는. 어제 김주철 감독과 나눈 통화내용 때문이었다.
“감독님. 잠깐 통화 가능해요?”
- 당연하지.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감독님께 하나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 뭔데?
“차서준이랑 박우형. 두 사람이 나란히 샷에 잡혔을 때 어땠나요? 감독님이 봤을 때?”
‘왕자의 난’ 회차가 거듭할수록 왕과 세자인 두 사람이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야 했다. 거기에 서서히 야욕을 드러내는 대신들을 상대하기까지.
이번에 개봉한 월드 코믹스 영화의 악역처럼 일방적인 악의를 드러내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괜찮다.
하지만.
왕과 세자의 대립은 표면적이 아닌 내적인 긴장감을 부여해야만 했다. 그 말은 고작 11살인 차서준의 존재감이 박우형과 맞먹어야 한다는 뜻.
- 왜 물어보는지 알겠네. 저번에 촬영장에서 보고 주정혁 분량 줄인 것 때문이지?
“맞아요. 저번에 보니까 생각보다 주정혁이 화면에서 밀리는 것 같더라고요. 주정혁이야 분량 수정이 조금 들어가도 괜찮은 역할이라지만. 차서준은 그게 안 되잖아요.”
- 마침 잘 됐다. 내일 촬영장으로 와. 내가 말로 하는 것보다 박 작가가 직접 확인하는 게 낫지 않겠어?
이상했다. 분명 작가인 그녀가 중요한 질문을 던졌는데. 수화기 너머 김주철 감독에게선 ‘별거 아니네?’ 이런 반응이 돌아왔으니.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찾은 촬영장이었다. 이미 배우들은 리허설까지 마쳤는지 카메라 앞으로 가고 있었다.
“지금부터 찍을 장면이 박 작가의 고민을 해결해줄 부분이었거든. 내 옆에 앉아서 같이 보자고. 오케이?”
“···알았어요.”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감독인 김주철이 저렇게 나온 이유가 있을 테고. 문제가 조금 있다 하더라도 해결할 자신이 있는 박정아 작가였으니까.
그런 말이 있지 않던가.
영화는 감독 놀음. 드라마는 작가 놀음. 그 둘 모두 최고가 모인 ‘왕자의 난’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잠시 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사관은 잠시 물러가거라. 내 긴히 세자와 할 말이 있으니.”
평소라면 사관의 역할에 한 번 더 재고를 읍했어야 할 사관들조차.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세자. 그래 말해 보거라. 요즘 세자가 대신들과의 만남이 잦다는 걸 들었으니.”
“아바마마. 다른 것이 아니오라. 최근 궐 안팎으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 불렀던 것이옵니다.”
“허어. 무슨 소문이기에 세자까지 나섰단 말이더냐.”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세자는 그저 지그시 왕을 바라보고 있을 뿐.
“세자.”
“예. 말씀하시면 경청하겠습니다.”
“내 먼저 떠난 경이에 대해 언급을 하지 말라 한 이유는 아직 그 짐이 덜어지지 않아서이다. 어찌 자식을 먼저 보낸 아비의 슬픔만큼 커다란 것이 있겠느냐.”
세자를 조심히 달래보려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꺼내려는 세자.
그런 왕과 세자를 연기하는 두 배우를 바라보는 박정아 작가의 눈이 깊어진다.
이제부터 중요했다. ‘왕자의 난’이라는 작품이 분위기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이었으니까.
2년 전 발생했던 석연치 않은 세자의 죽음. 그리고 별다른 조사 없이 장례를 마친 왕.
“아바마마. 형님께선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사옵니다. 헌데 갑작스럽게 시름시름 앓다 보름 만에 떠나버리었습니다. 과연 이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시옵니까? 그렇다면 어이하여 어의는 유배를 보내지 않으신 것입니까.”
차서준의 대사, 표정, 눈빛을 본 박정아 작가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였구나. 감독님이 직접 와서 보라고 한 이유가.’
저기 있지 않은가. 그녀가 막연히 떠올리던 왕에 대한 의심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 세자의 모습이.
세자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과연 제 형님의 죽음에 왕의 연관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미끼를.
그리고.
“세자! 지금 세자가 생각해야 할 것은. 먼저 떠난 네 형이 아니라. 네가 앉아있는 그 자리임을 정녕 몰라서 하는 말이더냐! 제 형에 비해 부족하다는 말이 파다한 것을. 내 친히 네게 그 부족함에 대해 말을 해주어야만 알겠느냐!”
또다시 건드린 역린에 평정심을 잃고 만 왕의 분노. 그 모습을 확인한 세자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마는데.
‘그렇지! 여기서 세자가 알게 되는 거지. 제 아비가 형의 죽음과 무언가 연관이 있구나. 저걸 완벽하게 표현할 줄이야.’
차서준의 그 표현을 확인한 순간. 박정아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오케이! 하고서 외칠 뻔했다.
“오케이!”
다행히 박정아가 이성을 잃고 외치기 전. 김주철 감독이 배우들의 연기에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오케이 사인을 외쳤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본격적인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다툼은.
왕과 세자의 대립. 그리고 이 씨가 왕조를 세웠듯 조 씨의 나라를 꿈꾸는 사대부들의 움직임까지. 본격적인 혼란과 피바람이 몰아칠 조정의 모습이었다.
“어때? 내가 왜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지?”
“···.”
김주철 감독이 자신만만하게 박정아 작가를 향해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박우형과 차서준을 바라볼 뿐.
‘또 시작됐구만.’
일 년에도 수없이 데뷔하는 드라마 작가들 중에서. 몇 년을 살아남아 스타 작가의 자리까지 오르는 이들에게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박정아 작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주철 감독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박정아 작가는 정신없이 방금 본 두 배우의 연기를 곱씹고 있었다.
저기 있었다. 그녀가 머릿속으로만 완성시켰던 왕과 세자의 완벽한 대립이.
고성을 치고. 또 물건을 던지며 분노를 표하는 연기는 쉽다. 허나 저렇게 날을 세운 대화만으로 듣는 이를 쫄깃하게 만드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어때?”
다시 한번 묻는 김주철 감독의 말에.
“감독님. 나 뭔가 좀 떠올라서 작업실로 좀 바로 갈게요. 배우들에겐 다음 촬영장에 올 때 끝나고 식사라도 같이하자고 좀 전해주세요. 나 급해서 먼저 가요.”
떠오른 영감이 사라지기라도 할까. 김주철 감독이 잡을 새도 없이 달려가는 박정아 작가였다.
*
드디어 그날이 왔다.
“형아! 얼른!”
“엉아!”
하준이, 하윤이가 빨리 준비하라는 듯 나를 재촉했다. 그러고는 안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엄마에게도 빨리! 라고 외친다.
벌써 시간이 된 것이다. 히어로 솔로 무비 최초 천만 관객을 돌파한 ‘디멘션 소서러’가 극장에서 슬슬 내려갈 시기가.
방금 전에도 좌석 예매 상태를 확인해봤는데. 평일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우리 가족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일명 ‘좌석 전세 내기’를 해버린 셈.
“오늘 오전, 오후 촬영이 없어서 다행이네.”
동생들이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세자에겐 저녁 촬영만 있는 오늘이 아니었더라면 저 모습을 못 볼 뻔했다.
“서준아. 준비 다 했니? 엄마가 하준이, 하윤이 재촉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결국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방방 뛰다가 엄마에게 꾸중을 듣고만 하준이, 하윤이었다.
엄마에게 혼이 나 잠시 시무룩해졌지만. 내 양손을 각각 잡고 집을 나서자마자 다시 신이 났는지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형이랑 같이 나오니까 좋아?”
“응! 좋아!”
“엉! 저아!”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들을 보니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최근 ‘왕자의 난’ 촬영에 바쁜지라. 오늘처럼 동생들과 함께 밖으로 나올 시간이 별로 없었으니까.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동생들과 놀아주긴 했지만. 나와 함께 놀이터에서 놀고 싶다며 가끔 칭얼거릴 때가 있었다.
“우와!”
“우아!”
영화관에 도착하니. 처음 보는 풍경들에 하준이와 하윤이가 입을 벌린 채 감탄사를 터트린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에 담아두었다. 하준이, 하윤이의 귀여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맛있는 냄새!”
“마이써!”
처음 온 영화관에 감탄하던 하준이, 하윤이의 코가 벌렁거리기 시작한 것은. 달콤한 팝콘 냄새가 코를 간질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영화관에 가득 찬 달달한 팝콘 냄새에 홀리듯 바라본 뒤. 둘이서 무언가 속닥속닥하더니 내게 다가온다.
“형아.”
“엉아.”
이제는 제법 영리해진 동생들이었다. 엄마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할지 모르니까. 나에게 먼저 다가와 콕 찌르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올려본다.
“오늘 영화 다 보고 나서. 엄마랑 뭐 하기로 했는지 기억나?”
“응! 께!”
“엉! 께!”
이런. 다른 건 몰라도 대게 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최근 저 대게 사랑꾼들이 안 먹은 지 2주일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으니.
벌써부터 점심이 기다려지는지 침까지 꼴깍 삼키는 동생들이었다.
“엄마. 오랜만에 영화관에 왔으니까. 팝콘이랑 콜라 먹는 거 어때요?”
“그럴래? 사실 엄마도 영화관에 정말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저 냄새에 살짝 생각이 많이 났어.”
그럴 만도 한 것이. 하준이가 태어나고, 1년 뒤에 하윤이가 태어났다. 엄마 껌딱지인 동생들 때문에 몇 년 만에 영화관에 오신 셈.
내가 동생들의 손을 잡고 기다리는 동안. 엄마가 동생들이 마실 것과, 콜라, 팝콘 작은 것을 사서 왔다.
“하준이, 하윤이. 궁금한 게 있으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했지?”
상영관에 들어온 뒤 내가 동생들에게 묻자. 어린이 쿠션 위에 앉은 하준이, 하윤이가 조심스럽게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정답이야. 이렇게 형의 옆을 콕콕 찌르면. 궁금한 부분을 알려준다고 했지?”
“응!”
“엉!”
다행히 ‘디멘션 소서러’가 내려갈 때쯤이 되어 영화관을 찾은 터라. 100석이 조금 넘는 작은 상영관 안에는 엄마, 그리고 동생들과 내가 전부였다.
“엄마. 여기 콜라 드세요.”
“고마워 서준아. 오늘 이거 보고서 점심 먹을 거니까. 팝콘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하준이, 하윤이도 알았지?”
엄마의 말에 하준이, 하윤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정말 오랜만에 오는 영화관인지라 정말 즐거워 보이셨다. 특히 나랑 동생들까지 데리고 왔으니.
광고 타임이 모두 지나가고.
엄마, 나, 하준이, 하윤이만 앉은 상영관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두둥!
“우와.”
“우아.”
상영관의 웅장한 사운드에 잠시 놀란 하준이, 하윤이었지만. 이내 초롱초롱한 눈으로 스크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손에 들고 있던 팝콘조차 입으로 가져가는 걸 잊어버린 채 말이다.
잠시 후.
영화과 모두 끝나고 상영관에 불이 들어왔다.
“···.”
“···.”
처음 상영관에서 본 영화 때문에 놀랐음일까. 내가 걱정이 되어 동생들을 건드리려는 순간.
“나빠!”
“나빠!”
동생들이 나를 보며 흥! 하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이런. 가끔 악역을 연기한 배우들이 말한 고충을 갑작스럽게 여기서 경험하게 될 줄이야.
방금 전까지 주인공을 괴롭히던 데블 오리엔트 때문에 동생들이 화가 난 모양. 주인공을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몰아갔던 악당이었으니.
하지만 괜찮다.
혹시나 이런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대책을 생각해둔 나였으니까.
“어쩌지. 나쁜 사람은 하준이, 하윤이이게 대게를 안 사준다고 하던데.”
“아, 아냐! 나쁜 사람 아니야.”
“으응. 아니야!”
효과는 매우 훌륭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울먹울먹한 눈으로 나쁘다고 소리치던 하준이, 하윤이었는데.
나쁜 사람은 대게를 안 사준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생들이었다.
‘대게 사주는 사람 = 정말 좋은 사람’ 이 공식이 머릿속에 저장된 하준이, 하윤이었으니.
“영화 재밌게 봤니? 이제 점심 먹으러 나갈까?”
그런 나와 동생들을 미소 지은 채 바라보던 엄마가 묻자.
“네! 대게!”
“네! 대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게를 외치는 동생들이었다.
동생들의 양손을 잡으며 상영관을 나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과연 하준이, 하윤이의 꿈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