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넷티비의 투자를 받은 ‘왕자의 난’ 제작사 파란꿈나무 대표 박중수는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얼마만의 찾은 마음의 평화인지. 3년 전 용감하게 제작사 대표의 길로 뛰어들고 난 뒤. 수북하던 머리가 어느새 듬성듬성이 되어버렸다.
“이제 꽃길만 펼쳐지는 거지. 음, 그렇고말고.”
그렇게 창밖을 보며 커피 한 모금을 후룩 마시고 있던 박중수에게 초를 치는 이가 나타났다.
“대표님. 우리 이거 잘한 선택일까요? 아무리 제작비를 다 지원하고, 수익까지 보장해준다지만. 작품에 대한 권리를 100퍼센트 다 가져간다니요.”
기존과 완벽히 다른 계약 방식에 걱정이 되었는지. 제작 PD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것.
“야, 너 그러면 퓨전 사극을 만드는데 저쪽 투자 안 받고. PPL 다 때려 박아도 좋으니까 나가서 240억 받아올 수 있어? 참고로 제작비만 그 정도야.”
“···어, 없죠.”
“없죠오? 저 정도 투자 안 받으면 애초에 차서준, 박우형, 김정범을 데려오지도 못해.”
심기를 건드리는 제작 PD의 말에 결국 버럭 화를 내고 마는 박중수 대표였다.
아직 신생에 가까운 제작사 파란꿈나무에게 있어. 240억 규모의 초대형 드라마 제작을 시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현대극도 아닌 퓨전이라지만, 사극은 사극이었다. 과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드라마는 광고주들조차 난색을 표하곤 했다.
그런데.
간절히 원하다 보면 하늘이 이루어준다고 했던가. 그 기회가 온 것이다.
비록 기존과 색다른 계약 방식에 고민이 되긴 했지만. 무려 240억이라는 제작비를 투자하겠다는 넷티비가 나타난 것.
“거기에 이미 넷티비 측에서 수익도 보장해준다잖아. 이번에 우리 잘 만들기만 하면 파란꿈나무라는 이름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정말 좋은 기회긴 하죠.”
“그러니까 돈 아끼지 말고 팍팍 제대로 계약해. 물건 같은 것도 품질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클레임 계속 걸고.”
일종의 광고판이 된 셈이다. 그것도 넷티비라는 광고판을 통해 전 세계에 파란꿈나무에서 만든 드라마를 공개할 수 있는 기회.
이미 기사가 나가기도 전부터. 업계의 모든 이들이 파란꿈나무를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드라마. 그것도 퓨전 사극이 서양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
“음. 저들에게 없는 무언가를 보여주면서 빠져들게 만들어야겠죠?”
“정답. 그게 내가 수많은 감독들 중에서 김주철 감독을 선택한 이유야. 미쟝센 하나는 진짜 기깔나게 뽑거든. 특히 색감 표현이 미쳤지. 액션도 잘 뽑기로 유명하고.”
제작비가 아쉬운 상황이었다면 감독이 아무리 끝내주게 장면을 담을 수 있다 하더라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세트장 나무 기둥 하나, 엑스트라가 입는 한복 하나에도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김주철 감독이라는 용에게 여의주를 물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처음 박정아 작가의 대본을 봤을 때. 대규모 전투씬을 보고서 수정 요청부터 할 뻔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마냥 기다려지는 박중수 대표였다.
“거기에 박정아 작가가 몇 년을 깎아서 만든 대본이야. 배우들의 연기력이야 말하려면 입만 아프고. 이거 넘어질 경우의 수는 단 하나밖에 없다.”
어떤 경우일 거 같아? 하고 묻는 박중수 대표의 말에 제작 PD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 듯이.
“어떤 문제가 있을 때일까요?”
“우리가 개판 쳤을 때. 그거 말곤 없으니까 잘해.”
이번에는 자신도 직접 발로 뛰어다닐 생각을 하고 있는 박중수 대표였다.
*
요즘 배우 차서준의 하루 일과는 간단했다. 평일에는 학교에 가고. 돌아와서는 동생들과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것.
특히나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하윤이와 노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였다.
마침 엄마가 하준이를 데리고 병원을 간 참이라. 집에는 나와 하윤이 둘이서 있었다.
“하윤아.”
“응?”
“오늘 놀이터에 놀러 나갈까?”
“시러.”
확실히 말을 떼기 시작하니 자신만의 주관이 또렷해진 하윤이었다.
하준이가 있었으면 같이 좋아하는 술래잡기를 하러 나갔을 테지만. 지금 병원에 가느라 없어서 싫은 모양.
“이고. 일거져.”
최근 내가 목소리까지 바꿔가며 읽어주는 책읽기에 흠뻑 빠진 하윤이었다. 나를 따라 하며 말이 빠르게 늘고 있는 덕분에 나 역시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오빠가 책 읽어주는 게 그렇게 좋아요?”
“엉!”
한 권만 읽어주고 끝날까 봐. 왔다 갔다 하며 3권이나 가지고 온다.
지금 가지고 온 책은 한 100번은 더 읽어준 것 같은데. 그래도 계속 좋은지 항상 읽어달라며 가지고 왔다.
“자, 그러면 저기 누워서 동화책 읽기 할까?”
“엉!”
방긋방긋 웃으며 내 옆에 눕는 하윤이를 보면서. 나는 동화책 읽어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크고 무서운 호랑이가 산속에 살았어요.”
“크엉!”
갑자기 호랑이를 따라 하는 하윤이 덕분에 잠시 웃음이 터진다.
“그 호랑이는 사실 친구가 없어서 많이 외로웠대요. 그러던 어느 날, 언덕을 넘어가던 호랑이는 토끼를 발견했어요. 귀가 긴 친구야, 이리 와보렴.”
내가 마치 호랑이가 된 것처럼 굵고 스크래치난 목소리로 호랑이의 대사를 읽어주자.
“꺄하!”
하윤이가 박수를 치면서 좋아한다. 이럴 때면 내가 배우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뿌듯한 순간이었다.
“나, 나는 토끼라고 해. 무슨 일이니 호랑아? 나는 몸이 작고 살도 없어 맛이 없단다.”
이어지는 겁에 질린 토끼의 대사를 읽어줄 땐, 어떠케 어떠케 하면서 걱정한다.
그렇게 한 권을 다 읽어주고 나면. 하윤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이고!”
다음 책을 읽어달라며 나를 졸랐다. 그렇게 까르륵 웃어가며 3권을 다 읽고 난 뒤쯤이면.
“코오.”
하윤이의 낮잠 타이밍이 왔다. 잠시 하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찾아 거실로 나왔다.
- 서준아!
“응? 지환아. 촬영은 잘 끝났어?”
- 잘 끝났어! 지금 애들이랑 치즈 돈까스 먹으러 갈 건데. 서준이 너도 나올 수 있어?
올해도 찾아온 ‘어린이 감독 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촬영에 바쁜 사총사 친구들이었다.
나는 이번에 작품의 배우로 참가하는 대신. 홍보 대사로 함께하기로 했다. 할리우드까지 다녀온 마당에 배우로 참석하기엔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아쉽게도 지금은 하윤이랑 둘이서 집에 있거든. 하준이가 감기 때문에 엄마랑 병원에 갔어. 그래서 오늘은 못 나갈 거 같아.”
- 어쩔 수 없지. 대신 내일은 학교 끝나고 우리 좀 도와줘!
“알았어. 그건 해줄 수 있지.”
보자. 내일 스케줄은 특별한 건 없었다. 학교 수업이 다 끝나고 나면 박우형의 집으로 가면 끝이었다.
내년에 촬영을 앞두고 있는 ‘왕자의 난’ 대본 연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한두 시간만 좀 늦게 간다고 말하면 되겠지.
그렇게 내일 사총사와의 스케줄 약속을 잡고 나니. 타이밍 좋게 국제 전화가 걸려 왔다.
“감독님?”
- 차 배우. 늦은 시간에 연락해서 미안···. 아, 거기는 아직 오후인가?
“네. 감독님은 이제 잘 시간 아닌가요?”
지금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있는 곳의 시간이 새벽일 텐데. 이 시간에 내게 전화할 이유가.
“아, 감독님. 드디어 내일인가요?”
- 정답이야. 아마 내일 공개가 되고 나면 연락이 많이 갈 거야.
드디어 그날이 왔다. 아직 내년이 되지 않았으니 개봉일이 왔다는 건 아니고.
“1차 예고편이라니.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요.”
‘디멘션 소서러’의 1차 예고편이 공개되는 날이 온 것이다. 보안상의 문제로 나 역시 아직 예고편이 어떻게 뽑혔는지는 모른다.
다만.
- 차 배우에게 놀라지 말라고 미리 연락하는 거라네. 아마 내일 예고편이 공개되고 나면 차 배우에게 관심이 쏟아질 테니까.
“에이. 다른 사람도 아닌 크리스 앤더슨 감독님인데요. 어떤 영상이 나오든 간에 최고의 예고편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해요.”
- 하하. 다행이야. 안 그래도 데이븐도 차 배우와 같은 말을 했거든.
1차 예고편에 데블 오리엔트를 연기한 내 모습을 담기지 않았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새벽 시간에 내게 전화를 할 정도라.
대체 1차 예고편이 어떻게 뽑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디멘션 소서러’의 1차 예고편이 공개됨과 동시에. 당연히 가장 시끌시끌한 곳은 배우 차서준의 팬클럽이었다.
[여러분. 지금 막 공개된 디멘션 소서러 1차 예고편 보셨나요?]
저는 당연히 예고편에 우리 차 배우가 악당인 데블 오리엔트로 임팩트 있는 장면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주인공의 스승이자 다른 차원의 소서러 오리엔트로 나와서 당황했네요.
감독이 다른 사람도 아닌 크리스 앤더슨이니까. 몇 달 뒤에 공개될 메인 예고편에서는 다를 수 있을까요?
└ 저도 보면서 뭐지? 이런 생각부터 했어요. 원래 월드 스튜디오 측에서 샤킹 많이 치는데. 우리 차 배우의 배역이 사실 소서러 오리엔트 아닐까요?
└ 그럴 수도 있음. 다른 차원에서 온 소서러 오리엔트가 제자인 디멘션 소서러와 함께 데블 오리엔트를 막아서는 내용일 가능성도 높음.
└ 이게 월드 코믹스 만화를 원작으로 하면서도. 영화 전개상 달라지는 부분이 있어서 팬들도 확신을 못 하는 거 같아요.
└ 저번 세이버스에서도 만화책 내용이랑 다르게 갔잖아. 이번에도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 배우진 목록에 보면 차 배우가 소서러 오리엔트 역으로 나오고 있기도 하니.
└ 그나저나 우리 차 배우의 영어 연기도 끝내주네요. 저 쟁쟁한 할리우드 배우들 사이에서도 전혀 존재감이 안 밀리는 것 같아요.
└ 솔직히 우리 차 배우의 소서러 오리엔트를 보고 나니까. 아무리 상상해 봐도 우리 차 배우가 악당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가 않네요.
1차 예고편을 확인함과 동시에. 내 배역에 관해 사람들의 의견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데블 오리엔트로 캐스팅된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공개된 1차 예고편에서는 주인공의 스승인 소서러 오리엔트로만 나왔으니까.
이미 1페이즈의 최종장인 영화 ‘세이버스’를 통해서 원작과 다른 전개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월드 스튜디오였다.
특히나 내가 미국에서 지낼 때. 할리우드 스타인 데이븐과 친하게 지낸 것도. 히어로 동료로 촬영을 같이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서준아. 형한테는 알려주면 안 돼?”
“안 돼요. 저 계약할 때 스포에 관해서는 절대 금지하기로 서명까지 했어요.”
안달이 난 김정범이 애타게 요청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나저나 나도 1차 예고편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같은 영화도 예고편 편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보면서 과연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데이븐조차 예고편이 공개된 이후 ‘감독님이 마법을 부렸어.’라며 웃으면서 전화를 했을 정도였으니.
“그나저나 우승이는 갑자기 무슨 중요한 일이 생겼길래 꼭 만나자고 한 거지?”
갑자기 꼭 만나야 할 일이 생겼다는 김우승의 말에. 대본 연습 겸 박우형의 집에 모인 우리였다.
사실 나는 오늘 김우승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어젯밤 김우승이 떨리면서도 신이 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 왔으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김우승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어색하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본 김정범의 눈가가 가늘어진다. 마치 쟤 또 왜 저래? 하는 눈빛으로.
“뭔데. 너가 중요한 용건이라고 해서. 나 미팅도 취소하고 왔단 말이야.”
“미안미안. 대신 이건 다른 그 누구보다 형들과 서준이에게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사과하는 김우승의 말에도 툴툴거리던 김정범의 입이 멈춘 건.
“형들. 그리고 서준아. 나 아빠가 될 것 같아.”
김우승의 입에서 폭탄선언이 터졌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