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배우 차서준의 팬클럽에 재밌는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미국에서 보내는 차 배우의 하루.]
과연 ‘디멘션 소서러’를 촬영할 때를 제외하고. 배우 차서준이 미국에서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냈을까.
팬들이 가장 궁금해하던 것에 대한 영상이 팬클럽에 공개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공개된 영상 안에 담긴 내용은 모두의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우리 차 배우의 미국에서의 할리우드의 멋진 일상을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대체 영상의 저 모습은 뭔가요? ㅋㅋㅋㅋㅋㅋ
└ 보면 모르겠음? 여름방학이니까 숙제하는 거지. ㅋㅋㅋ 다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차 배우 아직 10살이에요.
└ 맞네. 미국에 가서는 할리우드 스타 데이븐과 친하게 지내서 몰랐는데. 아직 우리 차 배우 초등학생이었네요. ㅋㅋㅋㅋㅋㅋ
└ 여름방학 숙제 하는 모습이 정말 귀엽네요. 심지어 사총사 친구들과 어디까지 했는지 물어보면서 하네요. 저게 어떻게 월드 코믹스 영화 찍고 있는 배우의 일상이냐고!
└ 우리 차 배우의 귀여운 모습이 진짜 최고네요. 팬들을 위해서 방학 숙제하는 영상 찍어놨다가 공개한 것 같아요. ㅋㅋㅋ
당연히 반응은 좋았다. 누구보다 배우 차서준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팬들인데. 거기에 신중한 얼굴로 방학 숙제를 하고 있는 모습이 올라왔으니.
심지어 이 영상이 공개되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진 차서준의 미국 일상은 할리우드 스타 데이븐의 개인 SNS에서였다.
같이 근처 근사한 레스토랑을 간다거나. 또 촬영장을 함께 다니면서 할리우드 스타 데이븐과 깊은 친분을 보여주는 사진들.
그런데.
정작 공개된 영상은 여름방학 숙제를 하는 귀여운 차서준의 모습이었던 셈이다.
“서준아. 어제 올라온 영상 봤는데. 엄청 귀엽던데?”
“그래요? 사실 수진 누나가 방학 숙제할 때마다 귀엽다며 찍은 건데.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단순히 초등학생이 여름방학 동안에 숙제하는 영상의 반응이 그렇게나 좋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짤방으로 각종 커뮤니티에 퍼지고 있는 상황.
“서준이 네가 카메오로 출연했던 김유준의 모습과 너무 갭차이가 느껴져서 더 귀엽다고 아주 난리가 났더라.”
김정범의 말처럼 그랬다. 오늘 밤 ‘우리 동네 변호사’에 배우 차서준이 카메오로 출연한 덕분에 많은 이들이 본 상황.
숙제 영상의 초등학생 차서준과, ‘우리 동네 변호사’의 슬픈 사연의 의뢰자 김유준. 두 캐릭터의 비교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 그리고 대표님께 약속 하나 했다면서?”
“응?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떻게 알긴. 엊그제 저녁에 한잔하는데 감동받았다면서 말하던데.”
미국에서 ‘디멘션 소서러’ 촬영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나는 서도현에게 선물을 주었었다. 명품과 손편지.
지금 김정범이 말하는 건. 내가 서도현에게 쓴 손편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크. 대표님이 그동안의 고생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라더라.”
“삼촌이 저를 위해 정말 많이 노력하셨잖아요.”
“맞지. 고작 6살 어린 배우를 데뷔시키기 위해 설득하고. 또 데뷔 이후 오디션 자리마다 따라다녔으니. 다른 사람도 아닌 구름엑터스 대표가 말이야.”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오늘날의 배우 차서준이 있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서도현 덕분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평생 소속사 대표로서 배우 차서준과 함께해달라.
여기서 말하는 ‘평생’이 구름엑터스에서 계속 서도현 대표와 함께하고 싶다는 배우 차서준의 약속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서준이 너 미국에서 러브콜이 엄청 쏟아진 걸로 아는데.”
“맞아요. 이번 영화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려면 자기들과 하는 게 좋다고 꼬시더라고요.”
월드 스튜디오의 철저한 보안 덕분에 촬영 현장의 모습이 유출될 리는 없었으나. 입소문이 퍼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거 들었어? 그 동양에서 온 어린 배우의 연기력이 그렇게 끝내준다는데?”
“심지어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아주 끔뻑 죽는다고 하더라. 촬영장에서 가장 아끼는 배우라고.”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그 사람 연기력 안 되면 스타고 뭐고 가차 없잖아. 저번 영화 촬영 때 배우 하나도 연기력 부족이라고 갈아치웠었지?”
“그러니까. 거기에 데이븐도 그 어린 배우의 연기력에 반해서 같이 다니고 있다잖아. 이번 영화로 제대로 눈도장 찍을 거라는 소문이 자자해.”
이렇게 배우 차서준에 대한 이야기가 할리우드에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할리우드의 대형 에이전시뿐만 아니라. 심지어 개인 에이전트들까지 내게 찾아와 건넨 명함이 한가득이었다.
매니저인 수진 누나랑 있을 때에도 받은 적이 많았으니. 서도현이 그 소식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낭만적이네.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대표님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하다니.”
내가 할리우드의 러브콜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도현과 평생을 함께하자고 한 셈이다.
“정범이 형.”
“응?”
“그런데 형이 우리 회사에 온 이유 중에는. 나중에 저랑 같이 작품도 하고 싶어서도 있다면서요.”
“그렇지.”
“근데 제가 미국으로 소속사를 옮기면. 한국에서 활동을 안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정범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깨닫게 된 모양.
“아, 안 되지. 너 이거 계약 위반이야! 나랑 한 작품. 아니지. 몇 작품은 하고 미국으로 가야 된다고. 맞다! 너 아직 학교 다녀야 하잖아. 한국인은 한국에 살아야 돼. 서준아. 형이랑 여기서 잘 지내보자.”
당황한 김정범이 횡설수설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한 적도 없는 계약 위반이라는 말까지 하면서.
특히나 이번 ‘우리 동네 변호사’에서 같이 촬영할 때.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어 누구보다 즐겁다는 표정을 지었던 김정범이었으니.
“그래서 여기 남으려고요. 소속사 대표인 삼촌도 좋고. 또 형도 이제 같은 식구잖아요.”
무엇보다.
꽤나 재밌는 제안을 본 참이니. 굳이 할리우드 진출에 목멜 필요는 없다.
김도경 시절에는 한국에서 만든 한국적인 작품으로도. 충분히 세계에서 통한다는 걸 보여준 것들이 많았으니까.
그때였다.
“다들 모여 있었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서도현이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하하. 대표님 오셨어요? 서준이랑 어제 공개된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도 반응이 꽤나 좋던데.”
역시 김정범이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기술은 나조차도 감탄이 나오게 만들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저랑 서준이를 보자고 하신 건지.”
오늘 대표실에 김정범과 함께 있었던 이유는 서도현이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야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김정범은 아직 영문도 모르는 상황.
“일단 이것부터 보고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서도현이 내게 보여주었던 그걸 가지고 왔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든 목적임을 알아차린 김정범의 눈빛이 흥미롭다는 듯 빛난다.
지금 서도현이 건네는 것이 대본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으니까.
“대표님. 이거 8부작이네요? 그 말은 TV에서 방송될 게 아니라는 건데.”
평소에는 흐물흐물 지내는 김정범이었지만. 역시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배우답게 예리했다.
8부작 편성이라는 걸 보자마자 TV 편성을 노린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으니까.
“온라인 스트리밍 공개입니다. OTT라고 하죠. 최근 한국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넷티비요. 제작 예정은 내년 중순이고.”
현재 ‘우리 동네 변호사’를 촬영 중인 배우에게 벌써부터 차기작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말하는 사람이 서도현 대표라면.
“내년에 시작될 작품을 벌써부터 말씀하신다라. 뭔가 더 흥미로운 것이 있다는 말씀이신데. 맞습니까?”
단순히 대본이 좋아서. 또 좋은 기회라서 제안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서도현은 말 대신 시선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응?
서도현의 시선을 따라가던 김정범의 눈빛이 서서히 커진다. 왜냐고? 그 시선의 끝에는 내가 있었으니까.
“어어? 지금 이거 서준이도 고려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서준이는 이미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거기 주연 캐릭터 중 좌의정이 정범 배우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추천도 했고요.”
이럴 수가. 내가 먼저 추천했다는 말에 김정범의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영화 ‘금괴소동’ 이후 같이 작품을 하자고 그렇게 노래를 불러도 기회가 없었는데. 오히려 내가 먼저 같이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고 했으니.
“정범이 형. 거기에 한 명 더 있어요.”
“한 명 더?”
서도현이 가지고 온 넷티비 편성을 노리는 작품에는 3명의 주인공이 있었다.
왕, 왕자, 그리고 권력을 탐하는 좌의정. 김정범에게 좌의정의 역할을 추천하고 싶다고 했으니. 당연히 왕자는 배우 차서준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남은 건 왕이었다. 과거 차서준과 함께 ‘폭군의 세자’에서 신드롬까지 일으켰던 배우 하나가 김정범의 머리에 서서히 떠오를 거다.
“맞습니다. 우리 동네 변호사의 세 사람의 호흡을 보고선. 오히려 넷티비 측에서 먼저 의견을 꺼내더군요.”
‘우리 동네 변호사’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는 김정범과 박우형. 그리고 카메오로 출연했던 차서준. 이 셋의 조합을 본 넷티비 측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다.
이 세 사람을 주연으로 캐스팅해서 추진하고 싶다고. 서도현이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이다.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순간.
“콜! 이거 무조건 합니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김정범이 소리쳤다.
이제 남은 건 박우형인데.
딱히 고민할 필요가 있으려나.
*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차기작을 내년 ‘디멘션 소서러’ 개봉 이후 생각 중이라는 말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 말할 수 없는 상태지만. 엄마, 아빠는 혹여나 기사로 뜨기 전에 알고 계셔야지.
“서준아. 아빠가 듣기론 이번에 우리 아들이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할리우드에서도 관심을 많이 보였다던데. 사실이니?”
“네. 일단 에이전시 제안도 많이 받았고. 또 크리스 앤더슨 감독님이 확신하더라고요. 이번에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무조건 작품 제안들이 들어올 거라고.”
할리우드에서 관심을 가진다는 소문을 들은 아빠가 물었다.
많은 배우들의 꿈이 무엇이던가. 바로 해외 진출이었다. 아시아에서 작은 인기를 얻어도 소속사에서 ‘월드스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도 그것이었고.
그런데 배우 차서준에게는 그 기회가 지금 코앞까지 다가온 셈. 아마 아빠 회사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엄청 나왔을 것이다.
“엄마는 우리 서준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응원하는데. 혹시 엄마, 아빠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니?”
엄마는 혹여나 내가 엄마, 아빠 때문에 미국 진출을 포기하고. 차기작을 한국에서 하기로 결정한 게 아닐까 걱정하신 모양.
“학업 문제가 있잖아요. 이번에도 촬영 때문에 여름 방학이 끝나고도 계속 미국에 있어야만 했었으니까요.”
내 설명에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엄마, 아빠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겨우 10살인데. 벌써부터 해외에 진출하려면 학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면 학업 같은 건 상관없겠지만. 현재 나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꽤나 즐거운 상태였다. 사총사들과 함께하는 추억들이 쌓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사실 엄마, 아빠와 떨어지기가 너무 싫었어요. 이번에 미국에 있는 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 몰라요.”
정말로. 사실 집에서 지낼 때는 몰랐는데. 미국에서 두 달 동안 지내다 보니 너무나도 그리웠다. 엄마, 아빠의 따스한 품이.
그리고.
“엉아! 나도!”
“엉아! 나도!”
지금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하준이, 하윤이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이 사랑스러운 동생들을 두고서 어찌 몇 달씩 해외에 나가 있겠어.
심지어 내가 혹시나 다시 떠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지. 요즘 잠을 잘 때에도 엄마, 아빠를 찾는 대신 내 옆에서 코오 자는 하준이, 하윤이었다.
“할리우드는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하고 싶은 작품이 생길 때 진출해도 괜찮아요.”
왜냐고?
차기작을 통해 한국 드라마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될 테니까.
“서준아. 아우들이랑 할지도 모른다는 작품 제목이 뭐라고 했지?”
“왕자의 난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