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우리 동네 변호사’의 연출을 담당하고 있는 김주용 PD는 지금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었다.
“차서준 측과 연락은 됐어?”
“네. 정범 씨가 차서준이랑 같은 소속사잖아요.”
“알지. 저번에 연사모 형들을 응원한다고 밥차랑 후식까지 풍성하게 보냈잖아.”
배우 차서준이 누구던가. 6살의 어린 나이에 아역 배우로 데뷔한 이후. 말도 안 되는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이제는 탑급 배우로서 인정을 받는 친구였다.
고작 9살의 어린 나이에 거머쥔 연기대상은 또 어떻고. 심지어 그 공동 연기대상이 NBC 창립 이래 최초라는 건 설명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었다.
“진짜로 분량 좀 있어도 괜찮대?”
“네. 오히려 차서준 본인이 분량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역시 차 배우야. 배우가 그런 분량 욕심이 있어야 성공하는 거지. 거기에 형들을 위해 우정 출연하는 의리까지. 성공하는 배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사실 김주용 PD가 성공을 말할 수준이 아니긴 했다. 왜냐고? 오직 연기력 하나만으로 다른 곳도 아닌 할리우드에 캐스팅된 배우가 차서준이었으니까.
심지어 단역, 조연도 아닌 메인 빌런인 주연이란다. 미국에서 ‘디멘션 소서러’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차서준에 대한 기사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배우 차서준을 향한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그 열기를 지금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드라마 ‘우리 동네 변호사’에서 이어받을 수 있게 되다니.
“미국에서 엊그제 돌아와서 피곤할 거야. 괜히 배우 심기 건드리는 일 같은 건 발생하지 않게 잘 관리하고. 알았지?”
“넵! 아, 저기 오네요.”
다 같이 김정범의 차를 타고 왔는지. 박우형, 김정범, 차서준이 함께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배우 차서준입니다. 오늘 카메오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려 할리우드까지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소문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차서준의 행동에 모두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
연예인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일까. 바로 초심을 지키는 것이다.
성공 가도를 달려 훨훨 날다 보면. 어느새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낮게 보이는 법이었다. 그렇게 데뷔할 때의 다짐을 잊고 변하는 이들이 이 바닥에 한 트럭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고작 10살의 나이에 할리우드에서 주연으로 영화까지 찍고 온 차서준은 어떨까? 사람들이 요즘 나를 향해 가장 많이 던지는 시선이 저것이었다.
“서준아. 아마 너는 그대로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주변에서 널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을 거다.”
“다른 곳도 아닌 할리우드를 다녀왔으니까요?”
“그래. 심지어 최근 가장 잘나간다는 월드 코믹스 영화에서. 그것도 할리우드 스타 데이븐과 함께 나란히 주연에 이름을 올렸으니까. 거기에 데이븐과 친해진 건 이제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고. 그래서 더 조심해야 돼.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물어뜯으려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르니.”
역시 박우형이었다. 내가 걱정되었는지 차에 올라탄 이후로 쉬지 않고 어떤 부분을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해 열심히 말한다.
내가 변했을까 우려하는 것이 아닌. 똑같은 나를 두고도 다르게 볼 사람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다.
“어우. 형, 쟤 저래 보여도 6살 데뷔 이후로 스타의 길만 걸어왔던 애야.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더 잘할걸.”
그 연설에 김정범이 그만하라는 듯 박우형을 말린다. 두 형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만 미소가 지어지고 말았다.
말은 저렇게 하더라도. 모두 다 내가 걱정되어 하는 말이라는 게 느껴졌으니,
“알겠어요. 우형이 형 말을 가슴에 잘 새겨둘게요.”
“나는 서준이 쟤를 보면 꼭 인생 2회차 같단 말이지. 그 있잖아. 막 배우로 정상을 찍었던 사람이 과거로 돌아와서 다시 인생을 살아가는 그런 거.”
흠칫.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김정범의 예리한 말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 형이 평소에 허당 같은 면모가 있어서 그렇지. 지금처럼 예리한 구석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정범이 넌 서준이가 얼마나 이를 악물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는지 봤으면서도 그런 말을 해? 말 잘했다. 너 왜 어제 도망쳤어. 분명 내가 오늘 있을 장면에 대해서 잠깐 맞춰봐야···.”
물론, 그런 어그로 때문에 다시 박우형의 타깃이 되어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지만 말이다.
잠시 후.
형들과 함께 촬영장에 도착하니 많은 시선들이 느껴졌다.
‘쟤가 할리우드 다녀왔다면서. 그것도 주연 배우로 월드 코믹스 영화 촬영까지 마치고.’
‘학업 일정 때문에. 감독이 촬영 스케줄까지 조정해줬대. 월드 스튜디오 최초라던데?’
‘소문은 진짜 많이 듣긴 했는데. 정말 안 달라졌을까? 이 바닥 변하는 거 한순간인데.’
정확히 들리지 않더라도 알 수는 있었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안녕하세요! 배우 차서준입니다. 오늘 카메오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일단 가장 먼저 감독님을 찾아 인사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으론 배우들과 스태프들까지.
“어? 여기서 또 만나네요. 이번에는 카메오로 짧은 출연이긴 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에 차 배우의 밝은 목소리를 듣네. 이제야 촬영장에 온 기분이야.”
“그죠? 역시 제가 없으면 허전하다고 하더라고요.”
같이 촬영을 한 적이 있는 스태프와 농담을 주고받자. 날 처음 보는 이들의 신기하단 시선이 느껴진다.
괜찮다. 어차피 이런 행동은 가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항상 촬영장에 도착할 때마다 했었던 습관과도 같은 행동이었으니까.
“차 배우. 그러면 바로 촬영 들어가도 괜찮죠?”
“네! 준비 다 되었어요.”
촬영 시작은 순식간이었다.
*
김주용 PD는 모니터 너머로 보고 있었다. 오늘 차서준이 카메오로 맡은 역할은 슬픈 사연을 가진 어린 의뢰자.
끼이익.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고. 그 삐걱거리는 문 사이로 꼬질꼬질한 아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저. 혹시 여기가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곳 맞나요?”
다 떨어진 운동화.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것 같은 옷. 집에서 가위로 잘랐는지 엉망인 머리. 마지막으로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그저 지문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라는 한 줄이었지만. 지금 차서준이 보여주는 건 억울한 사연의 주인공 ‘김유준’ 그 자체였다.
‘이래서 할리우드까지 갈 수 있었구나.’
단 한 번의 등장 씬이었지만. 김주용 PD는 짜릿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작가에게서 대본을 받은 뒤. 읽자마자 김주용 PD가 떠올렸던 그 장면 그대로를 보여주는 배우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심지어.
“꼬마 친구. 그래 어떤 일을 의뢰하고 싶어서 왔지?”
“내가 알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있어서겠지.”
대사를 주고받는 박우형과 김정범은 또 어떻던가. 왜 감독들이 최근 연사모, 연사모 하고서 노래를 불렀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냥 저 배우들의 대화만으로 한 화를 다 이끌어간다 하더라도 끝내주는 장면이 뽑힐 테니.
만약 저 배우들을 한 작품에 담을 수 있다면 어떨까. 불가능한 가설을 떠올려보는 김주용 PD였다.
“도와주세요···. 엄마가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수임료는?”
“너는 또 그런다. 돈이 있었으면 여기까지 왔겠어? 일단 여기 앉아 봐요.”
날카로운 눈빛에 움츠러드는 어깨. 낡은 변호사 사무실 안조차 부담스럽다는 듯 움찔거리는 눈동자까지.
너무나도 냉혹한 현실에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를 차서준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이렇게 된 거래요. 그런데 아무도 엄마를 도와주지 않겠대요. 분명 증언만 해주면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 보호해주겠다고 하고선.”
억울함, 분노,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감정이 범벅된 아이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오케이!”
김주용 PD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치고 말았다.
허나 그런 김주용 PD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똑딱이 스위치라도 달린 듯. 감독의 오케이 사인을 듣자마자 활짝 웃는 차서준을 보면서. 그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뿐.
“와.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진짜 차원이 다르구나. 10살 맞아? 진짜?”
“괜히 9살에 연기대상 받고. 10살에 할리우드 진출했겠어. 그냥 천재야, 천재.”
“나는 그냥 첫 등장 때부터 확 느낌이 오던데. 누가 보면 진짜 사연 있는 아이 데려온 줄 알 걸.”
“저번에 누가 연기 똑딱이 스위치 있는 거 같다고 농담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방금 이해했네.”
그렇게 지켜보던 모든 이들을 놀라게 만든 차서준이었지만.
“형. 방금 마지막에 감정 괜찮았어요?”
“좋았다. 특히 마지막에 그 시선 처리와 한 방울의 눈물이 정점이었던 거 같은데. 서준이 네 연기가 전보다 훨씬 발전한 것 같은데. 그러면 이제 다음 장면에서···.”
“맞아요. 여기선 제가 이렇게 시선을 던지면. 형이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정범이 형이랑···.”
정작 본인은 다음 장면을 위해 박우형, 김정범과 열띤 대화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런 세 사람을 보던 카메라 감독이 말했다.
“감독님. 이거 나가면 시끌시끌하겠는데요?”
*
‘우리 동네 변호사’에 카메오로 출연한 내 분량이 나간 뒤. 시청률이 더 껑충 뛰었다며 좋아하는 형들이었다.
[역시 차 배우는 차 배우네요. 할리우드에 다녀오더니 연기력이 더 미쳤네요.]
바나나 우유로 사건을 의뢰하는 장면을 보다가. 저 정말 펑펑 울었어요.
어떻게 대사 몇 마디 없이. 행동, 눈빛, 작은 손 떨림만으로도 사람을 이렇게 울컥하게 만드는 걸까요.
진짜 차 배우 미쳤어요. ㅠㅠ
└ 저도 엄마랑 보다가 대성통곡을 해버렸네요. 엄마도 비슷해서 둘이서 휴지를 한 통 다 써버렸어요.
└ 우리 회사 직원들 출근하자마자 어제 우동변 봤어요? 하고 난리도 아니었음요.
└ 진짜 너무 짠했어요. 우리 차 배우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저런 아픈 사연 있는 아이 데려와서 찍은 거 아니야? 하고 걱정할 뻔했어요. ㅠㅠ
└ 괜히 할리우드 스타인 데이븐이 우리 차 배우에게 홀딱 반한 게 아니에요. 진짜 저게 10살의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감성이 맞는 건지. ㄷㄷ
└ 지금 차 배우 모시고 싶어서 안달인 감독들이나 작가들이 한둘이 아님. ㅋㅋㅋ 대본 수정까지 해서라도 차 배우 모시려고 한다는데.
역시나 방송이 나가고 반응들은 뜨거웠다. 엔딩 OST가 나가기도 전에 ‘우리 동네 변호사’가 실시간 검색어를 점령해버렸을 정도.
심지어 아직 다음 주까지 내 출연 분량이 남았기에. 본방 사수를 하겠다며 난리가 났다고 들었다.
“삼촌. 찬찬히 살펴봤는데. 이거 2개가 좋을 거 같아요.”
“그래? 잘 생각했다. 삼촌은 내년에 디멘션 소서러가 개봉하고 나면. 서준이 네 몸값의 앞자리 숫자가 달라질 거 같다고 생각하거든.”
일단 광고는 들어온 제안들 중 괜찮아 보이는 2개를 선택했다.
나머지는 내년에 ‘디멘션 소서러’가 개봉하고 들어오는 것들 중 골라도 될 테니. 서도현의 말처럼 내 몸값 자체가 달라질 터였다.
“아, 그리고 서준이 네게 정말 괜찮은 대본이 하나 들어왔는데.”
“드라마요?”
“그래. 올해는 차기작을 시작할 수 없으니. 딱 마침 이것도 내년 디멘션 소서러 개봉 이후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란다.”
나는 서도현이 건네주는 것을 받아 읽어보았다.
“삼촌. 이거 OTT네요?”
“맞아. 서준이 네가 디멘션 소서러에. 그것도 주연으로 캐스팅된 이후 저쪽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인 것 같더라.”
“아무래도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을 순 없으니까요?”
“그렇지.”
철저한 보안에 신경 쓰는 월드 스튜디오이기에 영화 내용이 유출되긴 힘들었다.
하지만.
어떤 배우가 정말 끝내주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더라. 이 정도의 소문은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가 없었다.
당장 촬영장에서 감탄을 멈추지 못한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의 입에서 칭찬 세례가 이어졌을 테니까.
“봤으면 알겠지만. 올해 시작도 아니고 내년 디멘션 소서러가 개봉한 이후에 예정이니. 감독, 작가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상황이고. 서준이 너만 하겠다고 하면 제작 확정을 하겠다는데.”
이런. 김도경 시절보다 해외 OTT의 한국 드라마 제작 진출이 훨씬 빨랐다.
만약 내가 하게 된다면. 아직 증명되지 않은 시장에 과감하게 도전하게 되는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도현이 내게 이렇게 추천하는 이유는.
“재밌네요?”
“그렇지? 준비 단계서부터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먹힐 수 있을지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것이니까.”
“그것도 한국적인 매력을 가장 잘 살려서요.”
한국의 것을 세계에서 통하게 만든다. 이 말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실현될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