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촬영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자. 누군가가 나를 격하게 반긴다. 바로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우리 가족. 하준이, 하윤이었다.
“엉아!”
“엉아!”
도도도. 하준이가 짧은 다리로 달려오더니 내 품에 안겼다. 그에 질 수 없다는 듯 하윤이도 안아달라며 소리친다.
“우리 하준이, 하윤이. 엉아가 보고 싶었어요?”
“응!”
“엉!”
잠시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얼굴을 비비던 하준이었는데.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흥! 하면서 고개를 홱 돌린다.
자신과 손가락까지 걸고서 약속한 열 밤을 지키지 않은 것이 떠오른 모양.
“엉아! 열 밤이라면서!”
“하하. 미안해 하준아. 형이 여기서 촬영이 길어져서. 대신 저쪽 방에 하준이랑 하윤이에게 주려고 산 선물들이 있는데.”
“선물! 엉아 체고!”
“꺄하!”
선물이라는 말에 삐진 것도 잊은 채. 하준이와 하윤이가 격하게 좋아한다.
그런 동생들에게 방문을 열어주며 선물들을 보여준 뒤. 나는 뒤에서 미소 지은 채 우리를 찍고 있던 엄마, 아빠를 향해 다가갔다.
“엄마, 아빠.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엄마도 우리 서준이 많이 보고 싶었어.”
“아빠도. 우리 아들 한번 안아보자.”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나를 꽈악 안아주는 아빠였다. 그런 아빠에 이어 엄마가 나를 안아주면서 걱정이 되었는지 묻는다.
“혼자 여기서 지내면서 힘든 건 없었니?”
“전혀 없었어요! 여기 집 한 채를 다 숙소로 쓰고 있어요. 그리고 수진 누나랑 회사에서 직원들도 같이 지내고. 또 여기서도 사람을 보내줬거든요.”
“정말?”
“네! 그리고 감독님이랑 배우들도 엄청 잘해줘요.”
내 씩씩한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엄마가 안도의 숨을 내쉰다.
아무리 매일 같이 영상 통화를 한다 하더라도. 홀로 미국에서 지내고 있을 아들 걱정이 되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테니.
심지어 직접 확인한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는.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머물러도 괜찮을 만큼 좋은 곳이었다.
“혹시 비행기에서 하준이나, 하윤이가 울지 않았어요?”
안 그래도 비행기 표를 예약하면서도 걱정이 되긴 했었다. 아무리 일등석을 타고 온다고 한들, 장기간의 비행은 아기들에게 힘들었을 테니까.
그런 내 걱정이 우려였다는 듯이. 엄마가 비행기에서 코오 잠이 든 동생들의 영상을 보여준다.
“하나도 안 울던데? 우리 서준이 보러 간다고 하니까. 오히려 신이 나서 흥얼거렸어.”
“정말요?”
“그러엄. 동생들이 우리 서준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다만 돌아갈 때는 잘 모르겠네.”
아, 그게 남아 있었구나. 하지만 괜찮다. 일주일 정도 미국으로 여름휴가를 온 우리 가족이었으니까.
촬영 때문에 일주일 내내 같이 있지는 못하더라도. 촬영 외의 시간 동안에 함께 시간을 보내면 될 것이다.
데이븐 덕분에 가본 식당들 중에서 가족들과 함께 가고 싶은 곳들도 있었고.
“제가 계속 같이 있지는 못해요. 지금도 촬영 스케줄이 빡빡하게 잡혀 있어서요.”
“엄마, 아빠는 괜찮아. 대표님이 가이드 해주실 분을 보내주신다고 했어.”
서도현이 신경을 써준 모양이었다. 아마 미국에서의 바쁜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서도현도 같이 따라다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였다.
“헤이! 준! 나 왔어!”
열려 있던 문을 두들기며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어?”
“응?”
갑작스럽게 나타난 할리우드 스타의 등장에. 엄마, 아빠가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낯선 우리 가족을 마주한 데이븐 역시 마찬가지.
“누구?”
“엄마, 아빠요. 한국에 있다가 절 보기 위해서 오셨어요.”
“왓? 반갑습니다. 우리 준과 함께 디멘션 소서러 촬영하고 있는 데이븐이라고 합니다.”
분명 뉴스로만 보던 할리우드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데이븐은 내 가족이라는 말에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직 영어가 어색한 엄마, 아빠가 그런 데이븐과 인사를 주고받고.
“준의 동생들이라고?”
하준이와 하윤이를 본 데이븐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봐도 너무나도 귀여운 동생들이었으니까. 특히 하윤이가 데이븐의 인사를 잘 받아주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여기에 왔으면 내가 맛있는 곳을 대접해야지. 저녁 아직 안 먹었지?”
“네. 안 그래도 근처 식당에 주문하려고 했어요.”
“노노. 기다려 봐. 내가 괜찮은 곳을 지금 바로 예약할 테니.”
말을 마친 데이븐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내게 걱정 말라는 듯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면서.
잠시 후.
우리 가족은 데이븐을 따라 최고급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님들. 지금 데이븐 SNS에 올라온 거 보셨어요? ㅋㅋㅋㅋㅋㅋ]
아니. 우리 차 배우 지금 미국, 그것도 할리우드에 가 있는데.
어째서 느낌은 한국에서 연사모 형들이랑 지낼 때와 비슷하게 느껴질까요. ㅋㅋㅋㅋ
혼자 외국에서 촬영하고 있을 차 배우 때문에 가족들이 여름휴가 겸 미국으로 간 거 같은데.
왜 할리우드 스타 데이븐의 SNS에서 만나 볼 수 있는 거냐고요. ㅋㅋㅋㅋ
└ 심지어 저녁 먹고서. 데이븐이 차 배우 동생들에게 선물도 잔뜩 사줬나 봄. ㅋㅋㅋ 아기들이 너무 귀여워서 행복했다고 하던데.
└ 우리 차 배우 동생들이 천사 같긴 하죠. 그나저나 촬영 잘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는데. 올라온 사진이랑 글을 보니까 안심이 되네요.
└ 월드 스튜디오의 철저한 보안 때문에 소식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그 소식을 다른 배우도 아닌 할리우드 스타에게서 들을 수 있을 줄이야. ㅋㅋ
└ 차 배우가 엄마, 아빠, 동생들 편하게 오라고. 왕복 모두 퍼스트 클래스로 끊었다네요. ㄷㄷ 저게 플렉스지. ㄷㄷㄷ
└ 나라도 어린 동생들이 보고 싶다며 미국으로 온다면. 없는 돈이라도 모아서 했을 듯. 특히 우리 차 배우의 가족사랑은 유명하잖아요.
그리고.
데이븐의 개인 SNS에 올라온 배우 차서준의 소식에 한국에서도 난리가 났다.
*
“자! 오늘 매우 중요한 촬영이니까. 다들 집중합시다.”
‘디멘션 소서러’의 감독 크리스 앤더슨이 본 촬영이 시작되기 전 모두를 격려했다.
오늘 찍을 분량은 위기에 빠져 절체절명의 순간에 몰린 디멘션 소서러가. 각성을 통해 진정한 히어로로 거듭나는 순간.
그 과정에서 이중인격을 가진 데블 오리엔트가 충격적인 정체를 드러내며. 디멘션 소서러를 함정에 빠뜨려야만 했다.
“준. 컨디션은?”
“최고예요. 지금 가족들이 응원하러 왔으니까요.”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주연 배우의 가족들이라고 한들. 촬영장에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 촬영은 영화 ‘디멘션 소서러’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장면. 특히나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떤 촬영보다 데블 오리엔트 배우에겐 어려운 장면이었다.
그렇기에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특별히 허락했다. 정확히 엄마, 아빠. 그리고 하준이, 하윤이까지만 구경을 허용한 것.
우리 가족의 옆에는 한국어가 가능한 월드 스튜디오 직원이 같이 있었다. 하준이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친절히 답변을 해주면서.
“감독님. 허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니야. 우리 차 배우가 더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감독이 환경을 만들어줘야지. 대신 연기로 보답해야 돼.”
“걱정 마세요!”
내 당찬 포부에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웃음을 터트린다.
“자, 시작합시다!”
간단한 리허설과 크리스 앤더슨 감독의 디렉팅이 있은 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스승님이 데블 오리엔트였다고?’
디멘션 소서러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자신을 소서러의 길로 이끈 스승의 정체가 바로 거대한 악의 존재 데블 오리엔트였던 것.
이중인격을 지닌 데블 오리엔트의 선한 인격인 소서러 오리엔트가. 지구를 데블 오리엔트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후계자로 디멘션 소서러를 선택한 것이었다.
“하.하.하. 고작 이런 풋내기 소서러 하나로 나를 막아서겠다라. 어때? 내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소감이.”
목소리에서부터 광기에 휩싸인 거대한 악의 존재. 데블 오리엔트가 디멘션 소서러의 목을 마법으로 붙잡았다.
“커헉.”
서서히 조여 오는 숨통. 스승의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히어로들을 함정에 빠뜨려 전멸시켜버린 데블 오리엔트.
이대로라면 저 거대한 악의 존재에 지구가 멸망해버릴 것이다. 서서히 디멘션 소서러의 의식이 흐려지려는 순간.
“커헉!”
데블 오리엔트가 거친 고통을 토해내며 디멘션 소서러를 집어던진다.
털썩 주저앉았다가 일어난 데블 오리엔트의 눈빛에 광기가 사라졌다. 다른 인격인 소서러 오리엔트가 몸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
“내 말하지 않았느냐. 거대한 악을 상대함에 있어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고. 네가 지켜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거라.”
마치 유언을 남기듯 말하며. 자신의 손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건네는 소서러 오리엔트.
“스, 스승님!”
그 반짝이는 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디멘션 소서러는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그 빛은 자연스럽게 디멘션 소서러의 몸에 흡수되는데.
“크하하! 드디어 완전히 사라졌구나! 지긋지긋한 수백 년의 시간이었다.”
이중인격 중 선한 인격이자, 원래 몸의 주인이었던 소서러 오리엔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디멘션 소서러에게 전해주고 소멸해버린 것.
잠시 눈을 감고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진 스승님의 정수를 받아들이는 디멘션 소서러.
잠시 후.
디멘션 소서러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눈동자는 수많은 별들의 은하수로 번쩍이고 있었다.
“오케이!”
크리스 앤더슨 감독은 두 배우의 연기를 모니터로 보면서 짜릿함을 느꼈다.
방금 장면은 할리우드의 그 어떤 명배우를 데려다 놓더라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었다.
광기에 찬 눈빛에서 다시 현기가 도는 눈빛. 그리고 인자한 천사 같은 미소에서 순식간에 다시 일그러지는 악에 받친 표정.
마치 변검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얼굴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표현해야 하는 극악의 난도를 자랑하는 연기인 셈이었다. 그것도 이 장면을 오직 단 한 테이크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고작 9살의 나이로 저걸 소화할 수 있다고? 대체 정체가 뭐야.”
“미쳤어! 저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의 연기력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대체 어디 있겠냐고.”
“내가 할리우드에서 작업하면서 수많은 배우들을 만나봤지만. 저런 미친 재능은 단 한 번도 못 봤어.”
“수많은 재능들을 봤지만. 저 정도로 반짝이는 재능은 없었는데.”
지켜보던 배우들은 물론, 스태프들까지 그저 입만 벌어지게 만드는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한 차서준이었다.
이미 ‘디멘션 소서러’가 어떤 내용으로 전개되는지는 만화책으로 모두 공개가 된 상황이었다. 관객들은 이 반전을 미리 알고 있는 셈.
하지만.
그렇게 내용을 알고 있는 이들조차 이 장면을 스크린에서 마주한다면 어떨까?
‘전율을 느끼겠지.’
소서러 오리엔트가 데블 오리엔트로 돌변하는 순간. 관객들이 경악에 빠질 표정들이 크리스 앤더슨의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이미 만화 때문에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소서러 오리엔트를 보고서 누가 데블 오리엔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어.’
그만큼 배우 차서준이 보여주는 연기력에 소름이 돋았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감독인 자신이 보더라도 전율을 느낄 만큼.
이걸 완벽하게 작업을 끝낸 영상으로. 그것도 대형 스크린과 웅장한 사운드로 만난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짜릿해지는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었다.
“차 배우. 괜찮나? 방금 전까지 감정적으로 너무 몰입해서 힘들면 쉬었다 해도 괜찮아.”
“아니에요! 바로 다음 장면 촬영도 가능해요. 감독님. 방금 어땠어요?”
“최고였지. 데이븐도 최고였어.”
크리스 앤더슨 감독은 자기는 어땠느냐고 쳐다보는 데이븐의 칭찬도 잊지 않았다.
크리스 앤더슨 감독의 머리에는 방금 촬영에 대한 완성본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허기가 졌다. 한시라도 빨리 그 장면을 직접 보고 싶었으니까.
*
사실 걱정이 되긴 했다. 말 그대로 천사에서 악마로 돌변해버리듯 이중인격을 넘나드는 장면의 촬영이었으니까.
그 변화무쌍한 변화의 표현이 어렵다는 게 아니라. 이 장면을 멀리서 구경하고 있을 가족에 대한 걱정이었다.
혹시나 동생들이 내 연기에 충격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조금 들었었다. 거대한 악의 존재 그 자체인 데블 오리엔트였으니까.
하지만.
“엉아! 체고!”
“꺄하!”
촬영을 마치고 다가가자. 하준이와 하윤이가 너무나도 좋았다는 듯이 활짝 웃는다. 옆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엄마, 아빠는 덤이었다.
“우, 우리 서준이가 누굴 닮은 거지?”
“서준아. 너무 잘해서 엄마, 아빠가 깜짝 놀랐어. 오늘도 촬영하느라 고생했어. 힘들었지?”
내 연기를 직접 보고선 충격에 빠져 있는 아빠. 그리고 모션 캡쳐 슈트를 입고 촬영하느라 고생한 나를 안아주는 엄마였다.
엄마는 충격적인 내 연기에 감탄하면서도. 쉽지 않은 내 촬영 환경에 걱정부터 한 것이다.
“엄마, 아빠. 그리고 하준이, 하윤이가 직접 와서 응원해준 덕분에 더 잘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내일은 내 촬영 분량이 없으니 가족들이랑 모처럼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를 위한 깜짝 선물도 준비해두었고.
“서준아. 내일 어디 갈지 정했니?”
“엉아! 어디가?”
형과 놀러 간다는 사실에 기쁜지 하준이와 하윤이가 방방 뛴다.
“생각해둔 곳이 있어요. 엄마, 아빠. 그리고 하준이, 하윤이도 좋아할 그런 곳이요.”
“그런 곳이 있어?”
“네!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