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첫 촬영이었다. 배우 차서준이, 그것도 할리우드에서 월드 코믹스 영화 주연으로의 첫 촬영.
“서준아. 오늘 첫 촬영인데 컨디션은 어때?”
“최고예요. 삼촌이 미국까지 안 오셔도 괜찮았는데. 요즘 삼촌 엄청 바쁘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다른 배우도 아니고 우리 서준이가 할리우드에서 하는 첫 촬영인데. 당연히 삼촌이 와야지.”
혹시나 내가 달라진 환경에 중압감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되었는지. 서도현이 비행기를 타고 한걸음에 날아왔다.
내가 알기론 한국에서 바쁜 일정이 많다고 들었는데. 모든 스케줄을 딜레이시킨 채 나를 위해서 온 셈이다.
자신의 손으로 설득해서 데뷔시키고. 또 각종 성적으로 증명, 결국 할리우드 진출까지. 가끔 서도현이 날 바라보는 눈빛이 아빠와 비슷해서 흠칫 놀랄 때가 있었다.
삼촌도 짝을 찾아서 보내야 하나.
“윌리엄 씨랑 통화를 했는데. 대본 리딩 때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면서?”
“아무래도 동양에서 온 어린 배우라 그런지. 선입견들이 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대로 보여줬어요.”
대본 리딩 현장에서 모두에게 말해주었다. 배우는 연기로 말하는 법이라고. 인종? 피부색? 나이? 모두 상관없었다.
배우라면 오직 카메라 앞에서 연기로 말해야만 하는 법이니까. 보여줘도 삐딱한 것들은 진정한 배우가 아니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디멘션 소서러’의 감독이 크리스 앤더슨이 있으니까. 대본 리딩이 끝나자마자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촬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었다.
대본 리딩에서 제대로 보여준 탓인지.
“누구야?”
“데이븐이요.”
“데이븐? 지금 디멘션 소서러로 서준이 너와 호흡을 맞출 그 데이븐?”
“네. 잠시만요. 안 받으면 또 문자를 계속 보내서.”
처음 삐딱한 시선으로 날 보던 데이븐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약간의 부작용이라면 변해도 너무 변해버렸다는 점에 있었지만.
- 준. 지금 어디야?
“가고 있어요. 거의 다 왔으니 금방 도착할 것 같아요.”
- 나도 곧 도착이니까. 같이 들어가자.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라이징스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잘생겼다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었다.
감독들이 탐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연기력이 반드시 뒤따라야만 했다. 그런 연기력을 쌓기 위해선 뒤에서의 피나는 노력은 당연한 것.
그렇게 만든 연기력을 토대로 쌓은 필모그래피와 성적은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번 ‘디멘션 소서러’를 통해 만난 데이븐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기에 미친 배우. 그것도 할리우드에서도 반짝이는 재능을 가진 연기에 미친 배우인 셈.
“삼촌. 데이븐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요.”
“누군데?”
“우형이 형이요.”
“뭐? 연사모의 박우형?”
“네. 데이븐도 쉬는 날에는 월드 코믹스 만화를 보거나, 대본만 뒤적거린대요. 파티도 싫어한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에서 박우형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왔더니. 미국판 박우형을 만난 셈이다.
나로서는 매우 좋은 일이었다. 선입견 같은 편견 따위는 일절 가지지 않은 채. 오직 연기력만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배우를 만났다는 뜻이니까.
“헤이, 준! 오늘 촬영 끝나면 일정 있어?”
“따로 없어요.”
“그러면 나와 함께 저녁 먹으면서 대본 이야기 좀 하자고. 대신 내가 아주 제대로 된 저녁을 대접할 테니까. 어때?”
“좋아요.”
특히나 주연 배우들의 호흡이 잘 맞는다면. 긍정적인 시너지가 발생해 좋은 결과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
첫 촬영을 진행 중인 크리스 앤더슨 감독은 지금 마른 입술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디멘션 소서러’에서 데블 오리엔트로 캐스팅된 차서준의 학업 때문에. 영화 중간 이후부터 촬영이 시작된 상황.
차서준의 연기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대본 리딩에서 검증까지 마치지 않았던가.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걱정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CG 촬영에 대한 이해도가 빠르게 올라올 수가 있을까.’
CG 촬영 기법에 대한 배우 차서준의 이해도와 적응 능력에 관한 것.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알기론 차서준은 이런 촬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디멘션 소서러’는 마법사들의 마법 전투가 난무하는 영화.
배우의 자연스러운 모션과, 완벽한 시선 처리가 나오질 않는다면. 스크린에서 장면을 마주할 관객들은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본 촬영이 시작됨과 동시에. 크리스 앤더슨의 걱정이 섣부른 우려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가능한가? 시작부터 이미 익숙한 모습을 보인다고? 왓 더···.’
모니터 너머 데이븐과 함께 데블 오리엔트를 연기하는 차서준을 보며. 크리스 앤더슨 감독은 입을 멍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러운 동작과 손놀림. 그리고 크리스 앤더슨 감독조차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시선 처리까지. 촬영 전 디렉팅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 차서준이었다.
분명 처음 입고 촬영하는 모션 캡쳐 슈트임에도 불구하고. 차서준의 연기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런 촬영 경험이 많은 베테랑 배우처럼.
“차 배우. 혹시 한국에서 이런 촬영 경험이 있었나?”
그렇기에 크리스 앤더슨 감독은 쉬는 시간에 차서준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니요! 대신 지난 몇 달 동안 공부를 엄청 많이 했어요.”
돌아오는 차서준의 대답은 놀라울 뿐이었다. 크리스 앤더슨 감독의 그런 놀람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배우들이라 하더라도. 영화 중반부부터 촬영이 시작된다면 감정선을 잡는 것이 쉽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디멘션 소서러를 연기하며 차서준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데이븐의 연기를 확인한 순간. 다시 한번 놀라고만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었다.
‘데이븐의 연기력이 저 정도로 뛰어났었나?’
아니었다. 분명 최선을 다하진 않았겠지만, 대본 리딩 때에도 다소 아쉬움이 느껴졌었던 데이븐이었다. 물론, 그 아쉬움의 기준은 크리스 앤더슨 감독의 기준에서였지만.
그렇기에 첫 촬영은 제법 NG의 연속일 거라 예상했는데. 정작 본 촬영이 시작된 이후, 저 두 배우들 때문에 감독의 입에서 NG가 나온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배우들 때문에 아쉬움을 애써 넘기면서 ‘다시!’를 외쳐야만 했을 정도.
‘사람이 달라진 것 같군.’
허나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정작 본 촬영이 시작되자 달라졌다. 어찌하여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배우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
그리고.
본 촬영 시작 20분 만에 크리스 앤더슨 감독의 그 마법의 비결을 알아낼 수 있었다.
‘차 배우 때문이군.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출 때 오히려 데이븐의 연기가 살아난다.’
“오케이!”
CG 작업으로 무너진 도시와 사람들이 생길 초록벽을 바라보는 데이븐. 그리고 그런 디멘션 소서러를 보면서 이죽이는 데블 오리엔트까지.
깐깐하기로 유명한 크리스 앤더슨 감독조차 한 번에 오케이를 외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이야, 준이 때문에 더 긴장해야겠는데.”
“아니에요. 저야말로 데이븐 때문에 깜짝 놀랐어요.”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데이븐과 차서준을 보면서.
“지져스. 이번 영화가 제대로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만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었다.
*
[지금 촬영에 한창인 ‘디멘션 소서러’의 배우 데이븐 인터뷰 뜬 거 봄?]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차 배우가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월드 코믹스 영화를 찍고 있잖아.
그 디멘션 소서러가 된 배우 데이븐 인터뷰가 떴는데.
나는 무슨 한국에 있는 연사모 형들이 할리우드까지 가서 인터뷰한 줄 알았음.
한국에서는 차 배우, 차 배우 했는데. 미국에서 라이징스타로 뜨거운 데이븐이 준, 준 이러고 있네. ㅋㅋㅋㅋ
└ 보안상 이유로 촬영 내용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진 않았는데. 같이 촬영하면서 정말 깜짝 놀란 배우가 있다고 하네요. ㅋㅋㅋㅋ
└ 준이라고 자꾸 언급하기에 누구지? 했는데 우리 차 배우였네요. ㅋㅋㅋ 감독은 차 배우라고 부르는데. 데이븐은 준이라고 부르고.
└ 호칭이 뭐가 중요하겠음. 중요한 건 처음 미국에 진출한 우리 차 배우가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는 거지. 촬영장에 데이븐이랑 차 배우 같이 출퇴근하는 사진도 찍힘. ㅋㅋㅋㅋ
└ 뭐지? 미국판 연사모의 탄생인가? 심지어 엊그제에는 데이븐 가족들이랑 식사했던 거 같은데. 파파라치가 공개한 사진에는 레스토랑에도 같이 갔던데요?
안 그래도 미국에서도 데이븐의 저 인터뷰 때문에 난리가 난 참이었다.
가뜩이나 ‘디멘션 소서러’의 데블 오리엔트로 처음 들어보는 동양의 어린 배우가 캐스팅되어 말이 나오는 상황인데.
감독에 이어 할리우드의 스타 배우인 데이븐까지 차서준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대체 차서준이 누구야?’ ‘얼마나 연기력이 뛰어나기에 다들 극찬을 아끼지 않는 거지?’ 이런 반응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문제는.
- 흐어엉! 거짓말!
“미안해. 하준아, 형 여기 있잖아. 안 볼 거야? 형은 하준이가 너무 보고 싶은데.”
- 미어!
매일매일 영상 통화로 ‘엉아! 보고시퍼!’라고 활짝 웃던 하준이가 엉엉 울고 있다는 점이었다.
떠나기 전에 열 밤만 자고 돌아오겠다는 형의 말을 믿고선. 밤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기다렸던 하준이었다.
- 하준아. 형이 미국에서 촬영 때문에 그렇대요. 형도 아빠처럼 출근해서 못 오는 거야. 우리 하준이는 형을 이해할 수 있지?
- 몰라!
그런데 그 믿음을 배신하고 열 밤을 기다렸는데에도 형이 돌아오지 않은 것.
어린 동심에 배신감을 느낀 하준이가 영상 통화를 걸었음에도 등만 보여주고 있었다. 엄마가 달래도 요지부동으로 꿈쩍도 않고선.
“하준아. 대신 형이 여기서 하준이랑 하윤이에게 줄 선물 잔뜩 샀는데.”
- 징짜?
선물이라는 말에 그제야 두 눈 그렁그렁 눈물을 단 채 돌아서는 하준이었다.
“이거 봐. 세이버스 레고 조립 세트인데. 한국에 없고 미국에만 있다고 해서. 형이 하준이 생각이 나서 샀어. 그리고 이건 하윤이거. 저 뒤에도 엄청 많지?”
- 우와!
- 우아!
핸드폰을 움직여 동생들을 위해 사둔 선물을 보여주자. 방금 전까지의 울음바다를 잊고선 눈이 동그래진 동생들이었다.
“아, 그리고 엄마.”
- 응?
“전화 걸기 전에 아빠랑 이야기를 했는데요. 도현 삼촌이랑 함께 이번 여름휴가는 미국으로 오면 어때요?”
- 정말이니? 아빠가 시간이 되신대?
안 그래도 아빠의 연차 일정 때문에 엄마에게는 말을 꺼내지 않았었다. 혹시나 말을 먼저 꺼냈는데 안 된다고 하면 실망할 것 같아서.
그런데.
아빠가 회사에 여름휴가로 아들을 보기 위해 미국을 잠깐 다녀와도 되겠냐는 말과 꺼냄과 동시에.
“뭐? 우리 차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혼자 촬영하고 있다면서. 그러면 가족이 가서 힘내라고 응원해야지. 다녀와, 다녀와.”
순식간에 보고가 사장까지 도달해 승인이 떨어졌다고 했다. 회사에서 누구보다 큰 관심을 받는 아빠였으니.
배우 차서준의 아빠가 다니는 회사라면서. 대외적인 회사 이미지가 급상승했단다.
거기에 올 초엔 아들인 차서준이 사준 아파트를 선물 받았다는 기사까지 나온 상황.
회사에서 놓칠 수 없는 인재가 된 아빠가 금전적인 자유를 찾아버렸다. 당연히 대우가 더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라고 기자들과 인터뷰도 했었으니까.
“아빠가 방금 흥분해서 전화했었어요. 사장님이 특별히 일주일 동안 미국에서 머물다가 와도 된다고요.”
- 어머. 엄마에게 준비한다는 깜짝 선물이 이거였구나.
이런. 아빠가 이미 슬쩍 엄마에게도 넌지시 운을 띄워둔 모양이었다.
“아까 아빠랑 통화하고. 삼촌이랑도 전화해서 일등석으로 비행기표 끊어놨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 엉아! 체고!
- 엉아! 에고!
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덩실덩실 몸을 흔드는 동생들이었다.
엄마와의 전화를 끊은 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비벼야만 했다. 이제 가족들이 미국에 오면 동생들과 통화하기 위해서 새벽에 잠깐 일어나지 않아도 되겠네.
다시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내가 깨어난 건.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온 데이븐 때문이었다.
“데이븐? 오늘도 촬영장 같이 가자고요? 알았어요. 그리고 다음 주에는 같이 다니기 힘들 것 같아요. 한국에서 가족들이 휴가를 써서 보러 오겠다고 했거든요.”
내 말을 들은 데이븐이 흥분한 목소리로 무언가 말한다. 그 내용을 들은 나는 묘한 표정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데이븐이 직접요?”
할리우드 스타가 몸소 할리우드를 구경시켜 주겠다니. 또 한국에서 난리가 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