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아침부터 아주 눈물바다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예 현관에 드러눕기 시작한 하준이 때문에.
“엉아! 엉아! 흐어어엉.”
“하, 하준아? 형이랑 우리 어제 약속했잖아.”
분명 어젯밤까지만 하더라도 의젓하게 ‘엉아, 다녀아!’ 하고 말하던 하준이는 아침이 되자마자 온데간데없어졌다.
형 옆에서 자겠다며 같이 잔 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만 하더라도 날 보며 방긋 웃었는데.
커다란 캐리어를 가지고 열 밤만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하는 날 보자마자 드러누운 것이다.
“안대! 가디마!”
하준이는 현관 앞에서 결사반대를 외치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아예 형이 나가지 못하도록 문 앞에 누워서 말이다.
“하준아. 형이 어제 말했잖아. 열 밤만 자고 돌아올 거야. 우리 하준이 의젓하게 울지 말고 형 잘 배웅할 수 있지?”
“시러!”
“흐응.”
큰일 났다. 하준이가 서럽게 운 탓일까. 옆에서 꺄하! 하고선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주던 하윤이까지 울먹울먹하기 시작한다.
만약 여기서 하윤이까지 울기 시작하면. 오늘 내로 집을 나서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준이 이리 와. 하윤이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신발을 벗은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아직 비행기 시간까지 넉넉하게 남았으니 괜찮다.
혹시나 하준이가 아침에 형이랑 떨어지기 싫다고 엉엉 울까 몇 시간 전부터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하준이는 형이랑 떨어지기 싫어? 딱 열 밤만 자고 돌아올 건데?”
“응! 시러!”
“엉!”
어느새 내 무릎에 앉은 하준이와 하윤이가 고개를 젓는다. 이대로 절대 보낼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너무나도 좋아하고, 따르는 그 모습에 마음이 살짝 흔들린 건 사실이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동생들이 통통해진 눈으로 가지 말라 하는데 어쩌겠어.
아빠는 출근해서 없지만. 엄마는 그런 동생들과 내 모습이 귀여웠는지 열심히 촬영 중이셨다.
“대신 형이 열밤 지나고 나서. 하준이가 좋아하는 레고 있지? 저번에 가지고 싶다고 했었던 마왕의 성 세트. 그거 사서 같이 조립하자.”
“징짜?”
단순히 마왕의 성 세트를 사준다고 해서 하준이가 좋아할 리가 없다. 형인 내가 같이 조립 놀이를 하자는 말에 반응한 것.
세상에서 형과 함께하는 레고 조립이 가장 즐겁다는 하준이었으니까.
“자, 형이 손가락 걸고 약속할게. 그리고 어제 영상 통화 해봤잖아. 밤마다 자기 전에 형이랑 영상 통화하는 거야. 알았지?”
“응!”
휴. 30분은 더 하준이, 하윤이와 놀아주고 나서야 빠빠이 인사를 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방긋방긋 웃으면서.
“엉아! 다녀아!”
“빠아!”
“우리 서준이. 잘 다녀오렴.”
아쉽게도 동생들 때문에 공항까지 마중 나오지 못한 엄마였다.
이미 월드 코믹스 영화 촬영을 위해 출국 사실이 알려졌을 테니. 기자들과 팬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다녀올게요!”
엄마, 하준이, 하윤이 볼에 뽀뽀 인사를 해주고서야 집을 나선 나였다.
- 차서준. ‘디멘션 소서러’ 촬영을 위해 출국 “잘 다녀오겠습니다.”
- 첫 미팅 당시 차서준의 연기력에 반한 크리스 앤더슨 감독?
- 처음으로 아직 어린 배우를 위해 촬영 스케줄까지 조정한 월드 스튜디오. “차서준은 디멘션 소서러에 꼭 필요한 배우.”
- ‘월드 코믹스 합류’ 차서준, 이제는 할리우드의 차 배우로 거듭나나.
└ 미쳤다!!! 진짜 월드 코믹스 영화 찍으러 가는구나!!!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차 배우를 위해 일정 조정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 사실임. 원래 월드 스튜디오에서 페이즈2 공개할 당시 연말 촬영이 예정이었는데. 우리 차 배우가 초등학교 다녀야 한다는 거 알고 여름 방학 시즌으로 촬영 당김.
└ 엌 ㅋㅋㅋㅋㅋ 우리나라 아역 배우 클라스 보소. 월드 코믹스 영화에 주연 악당으로 출연도 놀라운데. 감독의 사랑까지 받네. ㅋㅋㅋㅋ
└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처음엔 탐탁지 않았는데. 우리 차 배우를 직접 만나보고 홀딱 반했다는 소문이 있음.
└ 공항에 응원하기 위해 따라간 팬이 올린 영상이 있는데. 동생들이랑 헤어지는 게 너무 힘들었다네요. ㅠㅠ
└ ㅋㅋㅋㅋㅋ 항상 시상식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잊지 않고 언급했던 것이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인데. 특히 동생들 이야기. 난리가 났었겠네요.
*
할리우드의 라이징스타로 떠오른 배우 데이븐은 기분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심지어 지금 월드 코믹스 영화 ‘디멘션 소서러’의 대본리딩을 하러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데이븐. 또 왜 그렇게 심술이 났어.”
“내가 지금 기분 안 상하게 생겼어?”
데이븐이 어릴 적부터 너무나도 좋아하던 월드 코믹스 만화였다. 그런 히어로 영화에, 그것도 주인공으로 출연해달라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차원을 넘나드는 마법사, 디멘션 소서러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데이븐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었다.
행복했다가 아닌 과거형이 된 이유는 간단했다.
“아니. 지금까지 월드 코믹스 영화에서 악당은 죄다 명배우들을 썼잖아. 그런데 왜 우리 영화만 이런데.”
지금까지 월드 스튜디오가 보여준 행보와 다른 캐스팅을 보여준 ‘디멘션 소서러’ 때문이었다,
아무리 데블 오리엔트의 설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처음 들어보는 동양의 어린 배우를 최종 캐스팅해버리다니.
지금까지 월드 스튜디오에서 보여주었던 악당 계보에 있어. 벌써부터 팬들의 비교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데이븐. 그 동양의 어린 친구가 베를린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던 거 몰라? 너도 베를린 나중에 꼭 한번 가고 싶다고 했잖아.”
당연히 데이븐의 매니저는 그런 그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월드 코믹스에 출연한다는 것은 최소 몇 년의 흥행이 보장된다는 뜻. 특히 페이즈2를 통해 세이버스의 메인이 될 히어로 디멘션 소서러가 아니던가.
“혹시 월드 스튜디오에서 우리 영화는 벌써부터 기대치를 낮추기라도 한 거 아닐까?”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 디멘션 소서러 감독이 누구인지 몰라?”
“알지. 아니까 더 이해를 못 하겠다고.”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누구던가. SF 영화 하면 가장 떠오르는 거장 중 한 명이었다.
특히 CG 기술을 활용한 전투 장면의 정수라고 불릴 만큼. 크리스 앤더슨이 만든 영화들은 눈이 호강한다는 평가가 뒤따르곤 했다.
그런 크리스 앤더슨의 배우 고르는 눈이 깐깐하다는 건 할리우드에 널리 알려진 사실. 데이븐이 오디션 끝에 디멘션 소서러가 되었을 때 기뻐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일단 오늘 첫 만남이잖아. 그 동양의 어린 배우도 올 테니까. 너무 기분 나쁜 티 내지 말고 잘하고 와.”
“오케이. 나 프로야. 여기서나 내 감정 표출하는 거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배우 데이븐이라고.”
다행히 데이븐의 프로 정신은 매니저조차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촬영 시작 전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카메라가 돌아가면 배역에 몰입했으니까.
*
월드 코믹스 영화 ‘디멘션 소서러’의 대본 리딩을 위한 자리였다.
“서준이 덕분에 처음으로 해외, 그것도 미국에 오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아.”
“누나가 쉬는 날에도 절 엄청 챙겨주셨잖아요. 그리고 앞으로 해외에 자주 나가게 될지도 몰라요.”
“알았어. 열심히 영어 공부할게.”
영어는 조금 부족하지만. 데뷔 이후부터 나와 함께한 매니저 수진 누나가 멘탈 케어 겸 미국으로 따라왔다. 월드 스튜디오 측에서도 사람을 붙여줬고.
본격적인 대본 리딩이 시작되면 보안을 위해 여기서 나가야 할 테지만. 그래도 직접 보게 된 할리우드 배우에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수진 누나였다.
“세상에. 저기 저 배우를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누나. 앞으로 촬영장에서 계속 볼 거예요.”
“맞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할리우드에서 찬란하게 빛날 우리 차 배우가 옆에 있는데.”
미국에서 처음 경험하는 대본 리딩을 앞두었다고 생각한 탓일까.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까지 던지는 수진 누나였다.
방금 전의 호들갑도 혹시나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날 걱정하며 한 행동들일 터였다.
전혀 긴장 안 했는데.
“차 배우! 시차 적응은 괜찮나?”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 모습에 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던 할리우드 배우들이 깜짝 놀란다. 크리스 앤더슨 감독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할 테니.
심지어 저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동양의 어린 배우를 부르는 호칭이 ‘차 배우’가 아니던가. 화들짝 놀란 시선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네! 컨디션이 최고예요! 당장 촬영에 들어가도 좋을 만큼요.”
“하하. 좋아좋아. 안 그래도 차 배우에 대한 말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내가 단독 인터뷰라도 할까 하다 참았네.”
“잘하셨어요. 배우는 연기력으로 증명해야 되는 법이잖아요.”
“뭐? 으하하. 맞는 말이지. 배우라면 당연히 연기력으로 논란을 잠재워야지.”
예상치 못한 내 대답에 웃음을 터트리는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었다.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처음 미팅 때 나를 보던 시선을 생각한다면.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잠시 웃음을 터트리던 크리스 앤더슨 감독이 조용히 내 귓가에 중요한 말을 속삭인다.
“오늘 제대로 보여줘야 할 거야. 안 그래도 동양의 어린 배우에게 너무 특혜를 주는 거 아니냐는 불만들이 나오고 있거든.”
예상한 부분이었다. 아무리 ‘디멘션 소서러’의 주연이자 메인 악당인 데블 오리엔트라지만. 동양의 어린 배우에게 촬영 스케줄을 맞춘다는 건.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곳이 다른 곳도 아닌 별들 중의 별들이 모인 할리우드. 그것도 월드 코믹스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라면 더욱더.
“걱정 마세요. 제가 오늘 제대로 보여줄게요.”
“기대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최근 할리우드에서 핫한 배우로 떠오른 데이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인공답게 가장 마지막에 나타난 데이븐은 감독과 인사를 나눈 뒤 나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데블 오리엔트?”
“네. 한국에서 온 차서준이라고 합니다. 이번 촬영 동안에 잘 부탁드려요.”
“기대가 커.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역시나 크리스 앤더슨 감독의 말처럼 첫 만남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디멘션 소서러’의 주인공인 데이븐조차 동양에서 온 어린 배우에게 촬영 스케줄을 맞춰야만 했으니.
월드 스튜디오의 힘이 아니었더라면. 데이븐이 제법 크게 불만을 터트렸을지도 몰랐다.
같은 악당으로 캐스팅되었음에 호감을 느낀 것일까. 데블 오리엔트의 부하 역으로 캐스팅된 제니퍼가 속삭인다. 데이븐에게 들리지 않게.
“이해해. 데이븐이 어릴 때부터 월드 코믹스 만화의 열렬한 팬이었거든. 특히 디멘션 소서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해.”
“정말요?”
“응. 다른 블록버스터 다 거절하고 디멘션 소서러를 선택했는데. 메인 악당을 보고 기분이 좀 상한 거지. 지금까지 월드 코믹스 영화 악당들이 좀 대단했어야지.”
이런. 그렇다면 제대로 보여줘야겠네.
“시작합시다.”
크리스 앤더슨 감독의 말과 함께. 월드 코믹스 영화 ‘디멘션 소서러’의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외부에 그 어떤 소리도 흘러나가지 않는 철저한 보안 속에서.
*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데이븐의 매니저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또 심술이 나서 올 데이븐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에 빠진 것.
드르륵. 차 문이 열리고 대본 리딩을 마친 데이븐이 차에 오르자. 매니저는 호들갑을 떨면서 선수를 쳤다.
차에 오른 데이븐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
“오늘 분위기는 어땠어? 역시 데이븐이라는 말 또 나왔지?”
“···.”
허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오늘 대본 리딩 현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걱정이 드는 그 순간.
“오늘부터 촬영 끝날 때까지 다른 스케줄 같은 거 잡지 마.”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한 채로 데이븐이 말했다.
데이븐의 저 눈빛이 나오는 건 보통 엄청난 자극을 받았을 경우밖에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매니저가 되물었다.
“뭐?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광고 하나 더 하고 싶다면서.”
“자칫했다간 존재감에서 잡아먹히겠어. 영화를 본 관객들이 디멘션 소서러가 아니라, 데블 오리엔트를 더 기억할지도 모른다고.”
“뭐?”
매니저가 다시 되물었지만. 말없이 대본을 펼치는 데이븐이었다.
데이븐은 보았다. 대본 리딩에서 말도 안 되는 데블 오리엔트 그 자체를 보여주는 차서준의 연기. 그리고 그걸 보며 감탄하는 감독과 작가들의 모습을.
그 반응들을 보았을 때. 데블 오리엔트의 분량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아, 그리고 내일부터 그 어린 배우랑 연습 좀 할 거야. 그 친구 아주 물건이더라고.”
“왓?!”
대본 리딩 전과 완전히 달라진 데이븐의 태도에 경악하는 매니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