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고작 9살의 나이에 연기 대상을 거머쥔 배우 차서준. 그 어린 배우를 향해 유명 감독들의 시나리오가 쏟아져 들어갔다는 건 꽤나 유명한 소문이었다.
그런 차서준의 차기작 소식이 겨울을 지나 봄이 왔음에도 들리지 않는 탓에. 팬들은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차서준이 아역 배우로 데뷔한 이후 이렇게까지 긴 공백기를 가진 적이 없었으니까.
[혹시 우리 차 배우 차기작 관련 소식 좀 들으신 분 있나요?]
└ 조금 쉬었다 가려는 거 같아요. 솔직히 6살에 데뷔해서 소처럼 일했잖아요. 아직 어린 배우이니만큼 휴식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ㅇㅈ 9살에 연기 대상까지 탔는데. 너무 달리다 보면 목표 의식이 사라져서 무너질 수도 있음. 물론 우리 차 배우가 그럴 리는 없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잖아.
└ 1월에 새집으로 이사 갔다곤 하더라고요. 차 배우가 엄마, 아빠, 동생들을 위해 집을 사드렸다는데. ㄷㄷ
└ 솔직히 차 배우가 여태까지 번 돈이 얼만데. 아직 어려서 돈을 쓸데가 많이 없으니. 효도할 만하지. ㅋㅋ
└ 그래도 대단하네요. 탑스타가 되었음에도 평소에는 가족들이랑 시간 보내고. 또 연사모 형들을 만나는 것을 제외하면 구설수 하나 없잖아요.
그런 팬들의 반응을 읽고 있던 김정범이 나를 보며 물었다.
“서준아. 너 미국에 정확히 언제 간다고 그랬지?”
“일단 다음 주말에 가서 미팅 한 번 가질 것 같아요. 월드 코믹스 측에서 감독과 미팅을 갖자고 했거든요.”
내 말에 듣고 있던 박우형이 슬쩍 끼어든다.
“아마 할리우드에 진출하고 나면. 서준이 네가 6살에 데뷔했던 때에 받았던 시선들을 받을 수밖에 없을 거다. 아무리 한국에서, 그리고 베를린에서 인정을 받았다지만. 저들에게 있어서 서준이 너는 그저 쌩신인이나 마찬가지거든.”
“안 그래도 삼촌에게 그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리고 우형이 형이 전에 제게 그랬잖아요. 배우에게 있어 새로운 도전에는 언제나 검증론이 뒤따른다고.”
박우형이 열심히 강조했던 말을 꺼내자. 그 말을 들은 박우형의 입가에 만족스럽다는 미소가 걸린다.
“이야. 우리 서준이가 드디어 할리우드까지 진출하다니. 이거 기사 나가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나겠네.”
“형도 나중에 같이 가야죠.”
내가 할리우드에 같이 진출하자는 말을 꺼내자. 김정범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손을 내젓는다.
“어우. 말도 꺼내지 마. 서준이 너야 유창한 영어가 된다지만. 난 완전 콩글리시 그 자체거든. 서양 애들이 빨리 말하면 입력이 안 되더라. 난 한국이 좋아.”
김정범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굳이 한국이라는 배우 김정범에게 있어 최고의 무대를 놔두고선. 미국이라는 낯선 무대 진출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실제로 김도경 시절에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들이 세계에서 선전하는 수준까지 발전하기도 했었다. 아직 이쪽 세상에선 몇 년 더 남은 이야기겠지만.
“맞아요. 사실 꼭 해외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 도전하는 것보다. 우형이 형이 전에 했던 말처럼 우리나라 작품으로 세계에 도전하는 게 더 멋지다고 봐요.”
“지나가듯 말했던 건데. 그것도 기억하고 있었어?”
“네! 그 말을 하는 우형이 형이 너무 멋졌거든요. 우리 작품으로 세계에서 통하게 만들자.”
과묵한 사람이 하하 하고선 웃음까지 터트린다.
아마 한국 드라마, 영화가 세계에서 먹히기 시작하는 날이 온다면. 그 스타트를 끊을 사람이 눈앞의 박우형이 아닐까.
“우승이 이건 이제 참석도 안 하네. 아주 사람이 변했어. 에잉.”
“아까 출발한다고 했잖아요. 조금 늦는다고 미리 말하던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 왔어. 뭐야, 정범이 형 표정은 또 왜 저래?”
김우승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 우승이 형은 김청아와 연애 사실을 인정하고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김정범이 저렇게 툴툴대는 것도 마냥 김우승이 부러워서가 아닐까. 데이트 때문에 안 놀아준다고 나쁜 놈, 배신자, 이렇게 작게 혼잣말하는 걸 본 적이 있거든.
“서준아.”
“없어요.”
“쓰읍.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애가 완전 단호박이야.”
헛소리는 사전에 차단해야지. 어쨌거나 다음 주에 미국에 다녀오기로 결정된 나 때문에 모인 형들이었다. 잘 다녀오라는 응원을 직접 해줘야 한다면서.
“올 때 선물 잊지 마.”
“정범이 형. 서준이 나이 아직 어리잖아. 돈도 많이 버시는 분이 애한테 면세점에서 술 선물 가지고 오라고 하지 말고. 그냥 돈 주고 사.”
“아니! 넌 꼭 내가 선물을 술을 바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냐. 그냥 길에서 파는 이국적인 열쇠고리 이런 것도 난 만족한다니까.”
정말? 그럴 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걸 받고 싶다며 넌지시 흘린 사람이.
“진짜요?”
“···.”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하는 김정범의 행동에 잠시 웃음이 터졌다.
“서준이 너 그러면 형 섭섭해. 여기서 누구보다 서준이 널 생각하는 사람이 나인데.”
김정범이 그렇게 말하며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낸다. 그런데 그 두께가 제법 묵직하다.
“형. 이게 뭐예요?”
“용돈. 미국에 가서 쓰라고. 며칠 다녀오는 거라 사실 서준이 네가 미국에서 현금을 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형이라면 챙겨줘야지.”
이런. 감동이다. 저 봉투 안에 담긴 달러의 금액보다. 김정범이 담은 마음의 크기 때문에.
“저거로 술 사 오라는 뇌물이구만.”
“아니라고!”
잠시 투닥투닥거리는 김정범과 김우승을 뒤로한 채. 나는 대본을 읽고 있는 박우형을 바라보았다.
“형. 뭘 보고 있어요?”
“응? 대본. 엊그제 들어온 건데 생각보다 재밌네.”
뜻하지 않게 나만큼 긴 공백 기간을 가지게 된 배우가 박우형이었다.
사실 전에 인연이 있던 감독님과 함께 차기작을 하기로 했는데. 시나리오 문제로 대대적인 수정 작업에 들어간지라 공백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저도 봐도 돼요?”
“당연하지.”
박우형이 건넨 1화 대본을 천천히 보던 중. 나는 왜 우형이 형이 여기까지 저 대본을 가져와서 살펴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대본 속의 주인공 하나를 본 순간. 어? 이 배우가 하면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어? 우형이 형. 이거 정범이 형이랑 하면 괜찮을 거 같은데요?”
“그렇지? 서준이 너도 그렇게 느껴지지?”
나와 박우형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김정범의 고개가 이쪽을 향한다.
“뭐? 우형이 형이 나랑 하고 싶은 대본이 있다고?”
김정범이 구름엑터스로 둥지를 옮긴 이유가 무엇이던가. 전 소속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다시 한번 나와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내가 월드 코믹스 영화를 앞두고 있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나만큼 매력적인 배우인 박우형이 같이 하자는 말을 먼저 꺼내고 있는 상황이니.
“만약에 이거 형들이 같이 하게 되면 처음 아니야?”
“맞지. 한 번도 우형이 형이랑 같은 작품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대체 무슨 내용인데?”
“읽어봐.”
박우형이 가지고 온 대본은 법정물이었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대기업을 상대로도 기꺼이 나서는 두 변호사의 이야기.
“이야. 이거 재밌는데?”
박우형이 같이하자는 말 때문에 호기심으로 대본을 펼쳤지만. 두 변호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점차 빠져드는 김정범이었다.
“어때? 배우 김정범의 색다른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일 거 같은데?”
“와. 잠깐만. 이거 자칫하면 우형이 형이랑 제대로 비교당하겠는데.”
엄살을 떠는 김정범이었지만. 그 두 눈만큼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연사모의 형들은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들이 모인 곳이었으니까.
이거 아무래도 박우형과 김정범이 차기작을 같이 할 듯싶다.
*
모두가 애타게 기다리던 배우 차서준과 관련된 소식이 올라왔다.
- 배우 차서준, ‘디멘션 소서러’ 합류설? 할리우드 진출하나.
- 출국을 위해 공항을 찾은 배우 차서준. ‘월드 스튜디오’와의 미팅을 위해서?
- 배우 차서준, 월드 코믹스에 합류? “다른 스케줄 때문에 다녀오는 거예요.” 출국길에서 말을 아껴.
- 차서준의 출연 이야기가 나오는 월드 코믹스 영화 ‘디멘션 소서러’는 어떤 영화?
└ 미쳤다!!! 우리 차 배우가 진짜로 할리우드로 진출한다고?
└ 아직 모르는 거임. 그냥 다른 스케줄 때문에 공항에 온 거라잖아.
└ ㄴㄴ 얼마 전에 월드 스튜디오 캐스팅 디렉터가 차 배우 촬영장을 찾았었음. 그것도 몇 번이나. 거기에 디멘션 소서러에 나오는 악당이 동양계 어린아이 몸에 갇힌 마법사임. ㄷㄷ
└ 차기작 소식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정말 깜짝 선물을 가지고 왔네요. 다른 곳도 아닌 월드 코믹스 영화라니.
└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로는 차 배우의 월드 코믹스 합류가 확정이나 마찬가지네요. 디멘션 소서러 제작 일정이 언제라고 했죠?
배우 차서준의 월드 코믹스 영화 출연설이 뜨겁게 타오르는 이유는. 출국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차서준 때문이었다.
*
영화가 아무리 감독 놀음이라지만. 월드 스튜디오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조금 달랐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제작사의 입김이 강했다.
그 때문에 월드 코믹스 영화 ‘디멘션 소서러’의 감독으로 확정된 크리스 앤더슨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지금 동양의 그 어린 배우를 데리고서 데블 오리엔트를 촬영하라고?”
“예. 캐스팅 디렉터 윌리엄 씨가 코리아까지 직접 찾아가 발굴한 배우입니다.”
“코리아고 나발이고. 지금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겁니까?”
일반적인 영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크리스 앤더슨도 그 동양의 어린 배우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는 건 들었으니까.
문제는.
“이거 촬영 내내 CG 작업이 이어지는 영화인 걸 잘 알면서. 거기에 고작 8살. 아니, 9살이 되는 어린 배우를 데리고 촬영을 하라고?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전투 장면이 그렇게나 많은데?”
이번 크리스 앤더슨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가 말 그대로 CG의 향연이나 다름없는 ‘디멘션 소서러’의 감독이라는 점이었다.
세상이 변했다. 과거 상대 배우의 얼굴을 보며 대사를 치던 촬영은 사라지고. 어느새 초록 배경의 세트장 속에서 테니스공만 보면서 연기를 펼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연기 경력이 오래된 할리우드 배우들조차 처음 경험하는 CG 촬영에 애를 먹는데. 고작 동양의 어린 배우를 데리고선.
“디멘션 소서러의 성공 핵심 키워드나 다름없는 데블 오리엔트를 찍으라고? 허, 참.”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는 크리스 앤더슨이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예상했음일까.
“감독님. 너무 노여워 마시고 일단 배우를 직접 만나보고 결정하시죠. 만약 확인 후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때 감독님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배우를 만나보고 결정하라는 월드 스튜디오 측의 제안에 화가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직접 확인하고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때 원하는 배우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실어준다지 않던가.
“크흠. 그러면 직접 보고 확인합시다. 그래서 그 동양의 어린 배우는 언제 온답니까?”
크리스 앤더슨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심플했다.
“지금. 지금 올 겁니다.”
*
이 분위기는 충분히 예상은 했다. 아무리 배우 섭외에 있어 권한이 막강한 캐스팅 디렉터 윌리엄의 선택이었다지만.
실제 영화 촬영이 시작되고 나면. 촬영장에서 가장 강한 입김을 낼 수 있는 건 감독이었으니까.
당연히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알린 감독의 입장에선. 갑작스럽게 동양에서 데려온 어린 배우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왜? 검증되지 않았으니까.
“안녕하세요. 배우 차서준입니다.”
“반가워요.”
역시나 감독의 반응이 떨떠름하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월드 스튜디오의 사장인 릭카니와 윌리엄도 도착한 상태.
“감독님. 배우 연기부터 보고 결정하시죠.”
윌리엄이 삐뚜름한 크리스 앤더슨 감독을 살살 달랬다. ‘일단 한 번 잡숴봐’ 이런 느낌으로.
그렇다면.
보여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