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이 되면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일이 시작되었다.
“뭐야? 또 하는 거야?”
“쉿!”
“맞다. 조용히 해야 된다고 했지?”
“시끄럽게 하면 우리 목소리가 저기 녹음되어서 안 된대.”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은 이내 촬영 중임을 깨닫고선 헙! 하고선 입을 막았다.
눈앞에서 촬영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유명 연예인인 차서준과 김도윤이기 때문이었다.
수, 목 밤마다 TV에서 드라마에 나오는 차서준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연기하고 있었다.
장난기가 많은 친구들조차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를 이기지 못하고 조용해질 정도.
그런 상황 속에서 울려 퍼진 건.
“오케이!”
최지환의 만족함이 가득 담긴 오케이 외침이었다. 확실히 나를 따라 촬영장에 자주 다녔던지라 PD들처럼 찰지게 소리쳤다.
“서준아! 대박대박! 어떻게 거기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는 거야?”
최지환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후다닥 내게 달려온다. 방금 카메라 너머로 본 연기에 감탄한 모양.
주변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이야 잘하네? 이렇게 느꼈겠지만. 직접 이 장면을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썼던 최지환에겐 깜짝 놀랄 만한 연기였겠지.
“휴우.”
나와 대사를 주고받던 김도윤이 그제야 오늘 촬영 분량이 끝났음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러더니 최지환을 향해 방금 자신의 연기에 대해 모니터링을 요청했다.
“지환아, 나는 어땠어? 방금 어땠는지 한번 보고 싶은데.”
“당연히 도윤이 너도 끝내줬지! 지금 여기서 볼까?”
“응. 만약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한번 해보고 싶어. 서준아, 그래도 괜찮지?”
끄덕. 내 대답을 본 김도윤이 최지환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향해 재빨리 다가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외쳤다고 해서 넘어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연기가 만족스러운지 확인하려는 자세를 보여주었기 때문.
물론 아역 배우나 조연들이 그런 요청을 할 수 있을 리는 없다. 김도윤이 이번 작품에서 주인공이니 보여줘야 할 자세인 셈이다.
“···이거 마셔.”
저쪽에서 애들을 통제하고 있던 하지우가 다가와 물을 건네준다.
그랬다.
지금 우리 사총사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최지환의 ‘어린이 감독 영화제’에 출품할 영화를 찍고 있었다.
감독 최지환, 배우 차서준, 김도윤. 그리고 스태프로 열심히 뛰는 하지우까지. 나름 그럴싸하게 분업까지 완성된 우리였다.
잠시 방금 찍은 장면을 모니터링하던 김도윤이 잠깐 멈춰 달라 요청한다. 그러더니 다시 반복해서 그 장면을 보더니 날 부른다.
“서준아.”
“어?”
“혹시 다시 한번만 가도 될까? 방금 보니까 아쉬운 부분이 느껴져서.”
합격. 방금 전 나와 대사를 주고받던 김도윤의 호흡이 살짝 흐트러진 적이 있었다.
전이었다면 모니터링을 한다 하더라도 몰랐을 것이나. 조연으로 한 작품을 찍으며 성장한 덕분에 알아차린 모양.
배우가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재촬영을 요청하는데. 그것도 더 좋은 연기를 선보이기 위해 하는 요청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좋아. 그러면 다시···.”
아쉽게도 촬영은 여기서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벌써 끝나버렸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으니까.
나는 잠시 핸드폰을 꺼내 스케줄을 확인했다. 보자, 이번 토요일이 마침 촬영 일정이 없다.
“지환아. 우리 촬영 언제까지 마쳐야 한다고 했지?”
“이제 거의 다 됐어! 이번 주말까지만 찍으면 될 것 같아!”
“그러면 내가 토요일에 스케줄이 없으니까. 그때 마무리 촬영까지 다 해보자. 알았지?”
“응!”
최지환의 첫 단편 영화이자, 우리 사총사들의 첫 작품이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
‘타임슬립’ 8화는 김우승의 집에서 형들과 함께 보기로 결정되었다. 심지어 그 제안을 먼저 꺼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김우승이었다.
“서준이 먼저 와 있었네?”
“네! 우승이 형이 아까 데리러 왔었어요.”
“그래? 우승이 쟤 요즘 수상해.”
김정범이 마치 명탐정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예리한 눈으로 집 안을 훑는다. 마치 범죄 현장에서 작은 실마리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얼굴로.
그런 김정범을 보면서도 김우승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한다.
“왜? 오늘 내가 먼저 우리집에서 보자고 했잖아.”
“그렇긴 한데. 오늘따라 널 보니 살랑살랑하면서도 낯선 뭔가가 느껴진단 말이지.”
꽤나 날카로웠다. 사실 오늘 8화도 김청아의 마지막 출연분이나 마찬가지인지라 당연히 같이 볼 줄 알았는데.
이대로라면 명탐정이 된 김정범에게 김청아와의 미묘한 무언가를 들켜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김우승 역시 배우였다. 고작 의심 단계의 추궁 정도는 능숙하게 넘겨버릴 수 있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
“환기 좀 시킨다고 저쪽에 창문 열어놨는데.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응? 그런가? 어쩐지 평소보다 썰렁하긴 하더라. 추우니까 닫자.”
“오케이. 오늘 한 잔 콜? 마침 형이 좋아하는 술 구했는데.”
명탐정이 아니라 헛탐정이었구만. 술 한 잔 하고 자고 가라는 김우승의 말에 김정범이 활짝 웃는다.
김우승이 건네는 양주를 받아 신이 나서 거실로 김정범이 달려가고. 나는 안줏거리를 꺼내는 김우승에게 다가가 슬쩍 물었다.
“형.”
“응?”
“오늘 왜 청아 누나랑 안 봐요?”
내가 김청아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화들짝 놀란 김우승이 재빨리 주변을 살핀다.
혹여나 김정범이라던가, 김정범이 듣지 않을까 걱정한 얼굴로. 괜찮다. 이미 김정범은 박우형에게 붙잡혀 심도 깊은 대화에 끌려간 걸 확인하고 말을 걸었으니.
“오늘 청아 씨가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이랑 보고 온다고 하더라고.”
아하. 어쩐지 이 형이 먼저 8화를 다 같이 보자고 해서 의아했는데. 김청아가 고향에 내려가는 바람에 졸지에 홀로 남은 김우승이 우리를 부른 셈이다.
응? 듣고 나니 좀 이상하다. 아직도 호칭이 청아 씨라니. 분명 내가 김청아와의 접점을 만들어준 뒤. 저번에 단둘이 저녁까지 먹었던 거로 아는데.
“요즘 어때요?”
“으, 응? 뭐가?”
“뭐긴요. 청아 누나랑 어떤지 궁금해서요. 청아 누나도 촬영장에서 형 이야기를 자기도 모르게 툭툭 꺼내던데.”
“정말?”
내 말에 김우승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이걸로 아직 두 사람은 썸 단계인 걸 확인. 오랫동안 솔로로 지내느라 연애 세포가 다 죽어버린 모양이다.
어쩔 수 없군. 오작교를 놓아준 내가 도와줘야지.
“형. 인연은 때와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된대요.”
“···.”
대답이 없다. 왜 반응이 없지? 이런 생각으로 김우승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든 순간.
“표정이 왜 그래요?”
“아, 아냐. 서준이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뭐랄까.”
뭐랄까?
“서준이 너 혹시 주변에서 시선이 가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요즘 들어 자꾸 나한테 연애 관련 이야기를 자주 꺼내길래. 혹시 연애 상담 필요하면 언제든지 형에게 말해. 형이 고민을 잘 들어줄 테니까. 알았지?”
에휴. 말을 말아야지. 그냥 그때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채팅창에서 놀아줄 걸 그랬나 보다.
저 형이 김청아와 잘 되어가더니 쓸데없는 자신감이 붙었다. 뒤에서 전적으로 서포트해 준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왜 한숨을 쉬고 그래?”
“아니에요. 이제 곧 드라마 시작할 텐데. 얼른 가요.”
그렇게 김우승과 안주를 가지고 거실로 가자. 박우형에게 붙잡혀 반쯤 넋이 나간 김정범을 볼 수 있었다.
어? 그 두 사람에게서 다시 김우승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한 가지 달라진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시 헛탐정이 되어 추리를 시작한 김정범 역시 마찬가지.
“누구랑 그렇게 연락을 해?”
“응?”
“저번에도 TV 보는 내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질 않더만. 오늘은 드라마 시작도 안 했는데 누구랑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는 건데?”
김우승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정범에게 들킨다면 얼마나 시달릴지 뻔히 보일 테니.
이대로 김청아와의 썸이 들키나 싶었는데. 역시나 연예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아이돌 출신답게 재빠르게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소하 작가님. 슬슬 내년에도 계속 출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거든. 형 생각은 어때?”
저런 말 돌리기가 통할까.
“솔직히 소하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멤버가 너 아니야? 너도 꽤나 만족하면서 계속 촬영하고 있잖아.”
통했네? 정확하게는 김우승이 잔에 채워주는 양주에 시선을 뺏긴 것이지만. 어쨌거나 김우승의 화제 돌리기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래? 그러면 형이 계속하라니까 더 해야겠네.”
“역시 우승이를 생각하는 건 나밖에 없다니까. 그렇지?”
“드라마 시작했어.”
두 사람의 콩트 아닌 콩트를 보는 사이. 어느새 ‘타임슬립’의 8화가 시작되었다.
사실 오늘 연사모 형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이게 된 이유는.
“오늘 서준이 첫 액션 신이 나온다고 했지?”
“어. 진짜 잘했다던데.”
“우형이 너도 못 봤어?”
“나 그때 스케줄이 있어서.”
박우형도 촬영장에서 보지 못한 내 액션 신을 다 같이 보기 위해서였다.
광고 스케줄 때문에 직접 보지 못하고 워낙 끝내줬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박우형도 궁금했던 모양.
“형도 한 잔 줘?”
“나 내일 새벽부터 촬영 있어서 안 돼.”
김정범과 김우승이 한잔만 하자며 살짝 꼬셨지만. 내일 새벽 촬영을 위해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박우형이었다.
덕분에 오늘 밤은 집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박우형이 집으로 가는 길에 태워다 주기로 했으니까.
“어어? 여긴가 보다.”
그리고.
촬영장에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던 그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범인의 뒤를 쫓아 CCTV 없는 건물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는 어린아이가 된 강록.
-저 가방 안에 지금까지 저지른 범죄 도구가 들어있다.
경찰 신고는 늦다. 지금까지 놈이 잡히지 않은 이유도 신출귀몰한 행적을 보여주었기 때문. 옥상에 오른 범인이 다른 옥상으로 뛰어넘어가고.
그걸 보며 잠시 고민하다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리는 어린 강록.
-어쩌지? 기회는 저기에서 단 한 번뿐인데.
범인이 옥상에서 담으로 내려와 마당 안으로 들어간 순간. 잠시 고민하던 강록은 이내 망설임 없이 범인의 머리 위를 향해 몸을 날리고.
어린아이의 몸이라 부족한 힘을 공중에서 떨어지는 체중을 이용하여 범인을 제압하는 강록. 그 모습이 마치 특수요원을 연상시켰다.
형들의 입이 떡 벌어진다. 다른 이들도 아닌 배우인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저 장면 촬영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겠지.
“어어? 진짜로 저 장면 대역 없이 한 거야? 서준이가?”
“뭐야. 운동 꾸준히 배웠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진짜 잘하는데?”
“대박.”
오늘 저 장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떤지 찾아보지 않아도 미리 알 수 있을 것 같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나를 바라보는 형들을 보니.
정신을 차린 김우승이 김청아와 연락하는 줄 알았는데.
“벌써 사람들 반응 난리가 났는데?”
궁금했는지 사람들의 반응을 찾아본 모양이다. 김우승이 빠르게 댓글이 달리고 있는 글 하나를 보여주었다.
[우와! 방금 우리 차 배우 액션 봤어요?]
└ 저도 보면서 입틀막 했음. 진짜 저거 우리 차 배우가 실제로 몸을 날려서 찍은 건가요?
└ 지금 기사도 떴어요. PD가 원래 이 장면을 빼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다는데. 차 배우가 강력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네요. ㄷㄷ
└ 하긴. 우리 차 배우가 이제 10살을 앞둔 9살인데. 저 장면을 대신 찍을 대역을 찾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겠네. ㅋㅋㅋㅋ
└ 대체 우리 차 배우가 못 하는 게 뭐지? 연기 잘해, 춤 잘 춰, 노래 끝내줘, 이제는 액션까지. 완전 사키 캐릭터네요.
└ 현장에서도 저 장면 찍고서 감탄을 멈추질 못했다 함. 앞으로 차 배우가 보여줄 연기 중 액션도 기대가 됨
확실히 반응은 뜨거웠다. 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내 이름이 오르고 있을 정도로
하지만.
“형.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더 난리가 나겠죠?”
“당연하지.”
김학영 PD가 준비한 회심의 한 방은 여기가 아니었다. 시청률 40%라는 대기록에 도전하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무기.
그것은 바로 김청아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아영의 죽음과 동시에 조금씩 밝혀지는 미제 사건에 얽힌 거대한 진실.
주인공을 대신하여 목숨을 희생하는 이아영. 과거 시간대의 영향이 아닌 현재의 시간에서 벌어지는 일은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오열하는 강록.
└ 미쳤다··· 화려한 차 배우의 액션부터 눈물을 쏙 빼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번 8화는 정말 짜릿함과 슬픔을 주네요.
그걸 본 시청자들에게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런데.
“응? 우승이 너 울어?”
김청아에게 너무 감정을 몰입하며 보고 있던 김우승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찰칵.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내가 몰래 사진으로 저장했다.
“왜 사진을?”
갑자기 사진을 찍는 내게 묻는 박우형에게 나는 저 두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답했다.
“좋은 일에 쓰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