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윌리엄은 얼마 전 차서준과 처음 만났을 당시를 떠올렸다.
차서준의 긍정적인 답변으로 성사된 자리였다. 정확하게는 캐스팅 디렉터인 윌리엄이 데블 오리엔트 비공개 오디션을 하는 자리.
“혹시 우리가 준비한 대본을 보고서 즉흥 연기가 가능합니까?”
“물론이죠!”
영어로 능숙하게 인터뷰를 잘하는 것과, 아예 감정을 실어 연기를 하는 건 엄연히 다른 분야였다.
그렇기에 월드 스튜디오 캐스팅 디렉터로서 윌리엄은 차서준의 연기를 직접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우리 월드 스튜디오와 계약을 한다 해서 할 대본은 아니지만. 데블 오리엔트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 위해 만든 대본입니다.”
지금까지 데블 오리엔트 배우를 찾기 위해 윌리엄이 만났던 후보들에게서 나온 공통적인 반응이 하나 있었다.
바로 대본을 살펴본 뒤에 윌리엄에게 준비할 시간을 요청한 것. 심지어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아역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윌리엄은 눈앞의 차서준 역시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준비는 1시간이면 되겠습니까?”
그만큼 저 대본에 담긴 이중인격 연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월드 스튜디오에서 완벽한 데블 오리엔트 배우를 찾기 위해 만든 시험지나 마찬가지인 대본이니.
거기에 아직 어린 배우들인지라 월드 스튜디오 영화 오디션이라는 상황에 중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5분. 대사가 아주 많지 않으니 5분이면 충분해요.”
차서준은 단 5분의 시간만을 요청했다. 심지어 다음 날 준비를 해오면 안 되겠냐는 요청도 들었었는데.
그 말에 윌리엄은 당연하다는 듯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5분이라니. 대사를 외우기에도 촉박한 시간이 아니던가.
“대본을 보면서 할 생각입니까?”
“노. 배우가 대본을 보면서 연기할 수는 없잖아요.”
언빌리버블. 이보다 더 적절한 윌리엄의 현재 심정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그제야 자신이 차서준과 능숙하게 영어로 대화하고 있음을 상기했다.
‘정말 그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하다고?’
바쁘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대본을 훑는 차서준을 보면서도. 윌리엄은 저 호언장담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서준이 말한 5분의 시간이 정확히 지난 순간. 차서준이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덮었다.
“준비됐어요.”
“바로 시작합시다.”
옆에선 윌리엄을 따라온 월드 스튜디오 직원이 작은 캠코더를 꺼냈다. 차서준이 지금부터 보여줄 연기력에 대해 사장인 릭카니도 확인해야 될 테니까.
차서준이 윌리엄의 시작하잔 말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흠칫. 그 눈동자 안에 담긴 광기에 윌리엄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하하하. 세상을 구한다라. 그렇게 목숨까지 걸고 지키고 나면 누가 알아주지? 손가락질하던 인간들? 저기 뒤에서 등에 총질을 하려고 하는 위선자들?”
차서준이 첫 웃음 세 글자를 내뱉는 순간. 지금이 테스트 중인 것도 잊은 채 합격을 외칠 뻔했다.
보인다. 차서준의 시선 너머로 비열한 계획을 준비 중인 위선자들의 모습이. 그곳을 바라보는 차서준의 입가가 삐뚜름해진다.
그때였다. 마치 몸을 빼앗겼던 영혼이 다시 육신을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광기로 번들거렸던 눈에 서서히 총기가 차오른다.
그 눈동자 속에 담긴 변화를 보면서 윌리엄은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돌변이 아닌 서서히 변하는 모습이라니!
“무슨 소리! 누가 알아주지 않다 하더라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면 나서야지!”
마치 세상을 구해야만 하는 사명감을 가진 히어로가 된 차서준을 보면서.
‘브라보!’
윌리엄은 더 이상 데블 오리엔트에 차서준을 제외한 그 누구도 떠올릴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미팅이 있었던 날로부터 며칠이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원래 더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윌리엄은 한 가지 소식을 듣고선 체류 기간을 연장했다. 바로 차서준의 액션 촬영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
“액션 신을 찍는다고?”
“예. 범인에게 달려들어 제압하는 장면이라는데. 생각보다 더 격렬한 장면 같습니다.”
“그렇다면 보고 가야지.”
차서준이 나이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대역에 대한 고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대역 배우들이 존재하는 곳이 할리우드였으니까.
하지만.
한국 나이로 이제 10살을 앞두고 있는 차서준의 액션을 대신할 스턴트 배우를 찾는다는 건. 지금까지 데블 오리엔트의 배우를 찾던 것만큼 어려울 일일 터였다.
만약 차서준이 일정 부분 이상의 액션을 소화할 수만 있다면. 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있어 한결 더 수월해질 것이 분명한 상황.
“소속사 대표 반응은 어떤가? 보통 자신들의 배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자신 있으니 꼭 보고 가라고 했습니다. 회사와 계약한 이후부터 언어와 몸을 쓰는 것에 대한 준비를 오랫동안 해왔다면서 말입니다.”
“그래? 그러면 그것까지만 확인하고 돌아가지.”
덕분에 예정되었던 일정보다 훨씬 뒤에 돌아가게 되었다. 월드 스튜디오의 사장 릭카니 역시 그 소식을 듣고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도착한 ‘타임슬립’의 촬영 현장. 차서준을 위해 만든 간이 건물을 보고선 내심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 높이라면 볼 것도 없겠는데.”
너무 낮다.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촬영할 때에 배우의 부상을 염려해 CG 처리를 하긴 했지만.
차서준의 액션 촬영을 보기 위해 한국에 더 남기로 결정까지 한 윌리엄의 입장에선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음?”
감독의 사인과 동시에 차서준이 통통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윌리엄의 눈을 사로잡은 것.
‘몸이 가볍다.’
일반 배우와 스턴트 배우의 차이는 몸을 얼마나 쓸 수 있는지에 있었다.
특히 할리우드 스타 배우 중 대역 없이 모든 액션 신을 소화하기로 유명한 배우가 있었다. 그 배우는 감독조차 우려를 표하는 장면조차도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윌리엄은 그 배우를 볼 때면 몸이 참 가볍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지금 눈앞에서 뛰고 있는 차서준이 보여주는 움직임처럼.
“윌리엄. 저 정도라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습니다.”
“그렇군. 생각보다 더 많은 액션들을 소화할 재능이 있는 것 같···.”
윌리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차서준을 위해 낮게 만들어둔 지붕이었지만. 마치 파쿠르 선수처럼 차서준이 날랜 동작으로 넘어갔으니까.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왓 더···.”
다음 촬영에서 차서준이 범인을 향해 몸을 날렸을 때. 윌리엄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조차 툭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
“오케이! 차 배우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오케이를 외친 김학영 PD가 황급히 달려온다. 방금 범인 역의 스턴트 배우와 한데 엉켜 바닥을 굴렀기 때문.
혹시나 지켜보던 이들이 걱정할까. 나는 스프링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이상 없음을 보여주었다.
“네! 정말 잘 받아주셔서 충격이 하나도 없었어요. 고맙습니다.”
“아, 아냐. 나도 서준이가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는걸. 연습 때보다 더 호흡이 잘 맞았던 거 같은데.”
내가 꾸벅 인사를 하자. 범인 역으로 어린아이가 된 강록에게 제압당한 스턴트 배우가 손을 젓는다.
흔히 말하는 환상적인 호흡으로 손발을 맞췄으니. 처음 걱정하던 김학영 PD가 방금 찍힌 장면을 돌려보고선 감탄을 멈추질 못한다.
“액션도 소화가 된다고? 너 저거 할 수 있어?”
“되겠냐? 무술 감독님이 왜 자신만만했는지 직접 보니까 알겠네.”
“방금 공중에서 달려들 때 움직임 봤어? 어디서 체조라도 배웠나?”
“체조는 아니고 무술을 배우긴 했대요. 아까 걱정하면서 물어봤는데. 걱정 말라고 웃으면서 말해주더라고요.”
배우 차서준으로서 처음 찍은 액션 신에 지켜보던 이들이 감탄을 멈추질 못했다.
저 반응을 보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 장면을 TV로 처음 접할 시청자들의 반응이. 아마 난리가 나겠지.
그 전에 해야 할 일도 하나 있었다. 엄마, 아빠가 화면에서 처음 보고 놀라지 않도록 미리 안심시켜 드려야 한다.
“서준아. 연습 때보다 훨씬 잘하던데?”
“고맙습니다. 다 감독님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에요.”
무술 감독이 엄지손가락을 올리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 이 장면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누구보다 반대했던 사람이 무술 감독이었다.
아직 어린 배우이기에 혹여나 순간 망설인다면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하지만.
“내가 서준이가 자신 있다고 했을 때. 처음 테스트 하자마자 깜짝 놀랐다니까.”
“정말요?”
“만약 서준이가 배우가 아니라 엑스트라로 온 알바였으면. 무조건 스턴트 배우의 길로 가야 된다고 도시락 싸들고 따라다녔을 텐데.”
무술 감독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나를 본다.
확실히 차서준의 몸이 김도경 시절보다 훨씬 더 가진 재능들이 뛰어났다. 가끔은 나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차 배우. 이거 나가면 또다시 사람들 난리 나겠어.”
방금 전 장면을 다시 한번 모니터링 하던 김학영 PD가 활짝 웃었다.
*
차서준 팬클럽에 팬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글 하나가 올라왔다.
[우리 조카가 차 배우랑 같은 초등학교 다니는데. 지금 차 배우 학교에서 영화 찍는다는데?]
└ 그게 무슨 소리임? 지금 차 배우 타임슬립 한창 촬영 중인데.
└ 말이 됨? 타임슬립의 주인공인 차 배우가 어떻게 동시 촬영을 함. 드라마 촬영 일정도 조금 빡빡한 걸로 아는데?
└ 맞아요. 이런 루머가 다른 곳도 아닌 차 배우 팬클럽에서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다른 곳에 헛소문이 퍼지기 전에 지우세요.
└ 근데 이 사람 차 배우의 찐팬으로 알고 있는데. 지난번에 차 배우 팬미팅도 신청해서 다녀왔을 텐데. 심지어 지방이라서 몇 시간씩 기차 타고 다녀왔었음.
└ 뭐지? 차 배우가 우리도 모르는 깜짝 촬영이라도 있는 걸까요? 여기 영화나 드라마 쪽에서 일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 누구 아시는 분 없나요?
당연히 팬들의 반응은 말도 안 된다는 것들이었다. 당장 ‘타임슬립’ 촬영장에 매일 같이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차서준이었으니까.
순식간에 저 글이 팬클럽 인기글에 올라가고. 댓글이 수백 개가 달리자. 글을 썼던 주인이 정확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까 차 배우 이야기 올렸던 사람인데. 여기 분들이 하도 뭐라 해가지고 조카에게 다시 정확하게 물어봐서 옴.]
모두에게 혼란을 줘서 먼저 미안하단 말부터 할게.
정확히 어떤 촬영이냐고 조카에게 물어보니까. 차 배우에게 유치원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총사 친구들 있는 거 알지?
그 사총사 중 한 명이 어린이 감독 영화제에 도전하려나 봐. 그래서 우리 차 배우랑 아역 배우가 된 김도윤이라는 친구가 그 친구를 돕기로 한 거 같아.
정식 영화는 아니고. 어린이 영화제 찾아보니까 20분 정도의 애들이 찍는 영상 같은 거라더라고.
학교 쉬는 시간이랑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찍는다고 하네.
└ 와. 그러면 우리 차 배우가 친구의 꿈을 도와주기 위해서 손수 나선 거네? ㄷㄷ 우리 차 배우 인성 미쳤다!
└ 그래. 이거면 말이 되지. 그나저나 우리 차 배우가 바쁜 일정 중에도 시간을 쪼개서 친구를 도우려나 보네요.
└ 차 배우 인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죠. 한 작품이 끝나고 나면 스태프들이나 단역들에게서 미담도 엄청 나오고.
└ 기대가 되네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총사들이 만드는 영화라니. ㅋㅋㅋ
└ 저 어린이 감독 영화제? 저거 언제 하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한 번 보러 가고 싶은데.
차서준의 팬클럽에 올라온 사총사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서서히 ‘어린이 감독 영화제’로 관심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
“하아. 큰일인데.”
‘어린이 감독 영화제’의 관계자들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날수록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지고 있었다. 처음 몇 년간 반짝 관심을 받아 후원사도 제법 붙었는데.
어느새 기사 몇 개가 전부일 정도로 어린이 참가자들은 제법 있지만, 대중적인 주목도가 떨어지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후원사들도 내년부터 고민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올해도 바짓가랑이 붙잡는 수준으로 애원해서 간신히 받은 건데. 이러다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느껴지면 후원사들도 외면할지도 모르는데. 어쩌지?”
“솔직히 현실적으론 어렵겠지만. 뭔가 빵 하고 터져주지 않는다면. 내년엔 정말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만약 여기서 반전이 터지지 않는다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수많은 소규모 영화제들 중 하나처럼 막을 내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어어? 전화가 일제히 들어오는데요?”
“무슨 사고라도 터졌어? 왜 갑자기 전화가 폭주해?”
갑작스럽게 문의 전화가 폭주하기 시작한 것은.
잠시 후.
상황을 파악한 직원이 멍하니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