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처음 NBC에서 차서준과 ‘타임슬립’의 편성을 확정했을 때. 아예 과거 시간대 세트장을 짓겠다는 결정에 우려를 표현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사장조차 ‘그 정도의 투자가 필요하나? 차라리 외주로 넘기지?’ 이런 말을 꺼냈을 정도였으니. 그런 주변의 압박을 견디고 밀어붙인 사람이 임정석 국장이었다.
“국장님. 저만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너만 믿고 이거 시작한 거 아니야. 근데 너 눈빛이 왜 그래. 불손한데?”
“아, 아닙니다.”
김학영 PD 얼굴에 떠오른 묘한 표정에 한마디를 할 법도 했지만. 지금 임정석 국장의 기분은 매우 좋은 상태였다.
드라마국 국장의 자리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과감하게 추진한 드라마가 ‘타임슬립’이었다.
아무리 배우 차서준과 박우형이 있다 하더라도 까봐야지만 알 수 있었다. 그와 비슷한 급의 스타들을 데리고서 물 먹은 드라마가 어디 한둘이던가.
“어제 사장님이랑 한잔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했지. 아주 칭찬 듬뿍 받았다. 덕분에 다음 작품들부터는 한결 수월해지겠어.”
“이제 저희도 그 지긋지긋한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겠네요?”
“그렇지.”
공중파 드라마들에 괜히 러브라인이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빼버렸다가 망해버린 작품들을 반면교사 삼아 윗선에서 반대했으니까.
국장이 과감하게 밀어붙였다가 실패해버린다면? 그 책임은 추진한 국장 역시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처럼 ‘타임슬립’이 초대박을 친 상황이라면? 과거 PD 시절 임정석과 김학영이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하던 웰메이드 드라마 제작도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된 것이다.
“지금 광고주들의 시선도 제법 바뀌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렇겠지. 특히 강록이 입기만 했다 하면 완판 행렬 중이라며?”
“예. 거기에 광고 들어왔던 식품 종류도 매출이 껑충 뛰었다고 하고요. 덕분에 조만간 제작비를 모두 회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타임슬립’에 과감하게 돈을 쏟아붓기로 결정했을 때. 내부적으로도 그 정도의 투자 가치가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시선들이 많았다.
결과는?
“어제 시청률 얼마 나왔다고?”
“33.5프로 나왔습니다. 고작 6화가 나갔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좋군. 아주 좋아.”
1화 스타트 17.3%로 시작하여, 단 3주 만에 시청률 33.5%를 돌파해버렸다. 심지어 다음 주에는 더 높은 시청률이 나올 거라는 예상들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 작품은 해외에서 먹히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추진했던 임정석 국장이었다.
그런데.
“해외에서도 반응이 오고 있다고?”
“예. 어디서들 봤는지 중국에서 반응이 제대로 나오고 있답니다.”
“해적판으로 인기를 얻어 판권이 팔린다라.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임정석 국장이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김학영 PD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흠칫 놀라는 반응이 보이긴 했지만. 무시하는 그였다.
“이거 세트장도 계속 활용이 가능하다고?”
“예. 한 번 쓰고 철거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예 제작 단계서부터 추후 활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세트장 활용 가능해. 광고 쏟아져. 해외에서 반응이 제대로 터지기까지. 말 그대로 임정석이 드라마국 국장 자리에 오르자마자 최고의 업적을 남겼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거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거 같아?”
이런 감은 현장에서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연출이 가장 잘 안다.
과연 시청률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특히나 지금처럼 대박을 넘어 초대박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더.
“음. 형님이 국장으로 처음 추진한 프로젝트인데. 그래도 앞자리 숫자 4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학영 PD의 대답에 임정석 국장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다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김학영 PD에게 떠도는 소문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차서준이 월드 스튜디오랑 무슨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던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저도 그 소문은 들었습니다. 사실 이게 어린 배우에게 직접 물어보기는 좀 그런 주제인지라 묻진 않았지만.”
“않았지만?”
“솔직히 차서준 정도의 재능이면 할리우드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다른 배우였더라면 터무니없는 헛소문이라 치부해버렸겠지만. 임정석 국장도 직접 보지 않았던가.
방금 전까지 헤실헤실 웃고 있던 어린 배우가 감독의 큐 사인 한 번에 눈빛이 돌변하는 걸.
임정석 국장이 과거 연출을 맡는 동안에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촬영장에서 차서준이 보여준 연기 재능의 크기는.
그런 연기력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고작 9살이라니.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헛소리 말라고 타박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긴. 그 정도의 재능이면 한국이 좁게 느껴지겠지.”
그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배우들은 세계로 진출하곤 했었다. 지금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배우 박강욱처럼.
*
오랜만이었다. 사총사가 떠들썩하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학교에서는 항상 주변에 다른 친구들이 있어 넷이서만 있을 때처럼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아무래도 최근 ‘타임슬립’ 촬영에 바빴던 나. 그리고 아이돌 연습생으로 소속사에서 레슨으로 하루를 다 보내는 하지우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마침 과거 시간대 강록 촬영이 없고. 하지우도 하루 휴식이 주어져 사총사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박대박! 서준아, 진짜 기사 나왔던 것처럼 서준이가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거야? 진짜?”
사총사들이 모이자마자 가장 먼저 화두가 된 주제는 단연 월드 코믹스 영화에 관한 이야기였다.
특히 넷이서 같이 월드 코믹스 영화를 감탄하면서 본 기억까지 있었으니. 그런 히어로 영화에 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어. 일단 긍정적인 답변을 할 생각이야. 너네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알겠지? 아직 계약서에 최종 도장을 찍은 건 아니거든.”
“알았어! 나는 절대 집에 가서도 엄마, 아빠에게도 말 안 할게!”
“···나도.”
아직 확정이 아니라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말에 목소리까지 낮춘다. 그 모습들이 퍽 귀여워 웃음이 터질 뻔했다.
혹시나 우리의 목소리를 누군가 듣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얼굴로 주변을 살피기까지 하니.
그러다 문득 월드 코믹스 영화들은 미국에서 촬영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최지환이 내게 묻는다.
“서준아. 그러면 너 다 대사 영어로 해야 되는 거야? 촬영할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나 감독님도 다 영어로 말할 거 아니야.”
“당연하지. 그래서 내가 너네한테 영어 공부 절대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한 거야. 만약 하게 되면 미국에서 지내면서 찍어야 하는 거거든.”
내 대답에 최지환이 헉! 하고서 숨을 들이켠다. 그것은 옆에서 듣고 있던 김도윤이나 하지우 역시 마찬가지.
“그 말은 서준이 너는 영어로 다 할 수 있다는 거잖아. 물건도 막 살 수 있고. 대단해!”
“···대단해.”
“너네 새삼스럽게 왜 그래? 베를린에서 서준이가 외국인 기자들의 질문을 영어로 자연스럽게 대답했잖아.”
김도윤의 말에 최지환이 뒷머리를 살짝 긁으며 시선을 피한다.
“사실 그때는 외워서 한 줄 알았지. 서준이가 우리 앞에서 영어를 쓴 적은 없었잖아. 서준아 못 믿어서 미안해!”
말은 저렇게 해도 미리 회화 공부를 하라는 내 말에 학원까지 다녔던 최지환과 하지우였다.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고.
사실 오늘 모인 것도 ‘타임슬립’의 대박과 월드 코믹스 영화에 대한 일도 있었지만. 축하를 받아야 할 또 다른 주인공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우야. 월반했다면서? 정말 축하해.”
“···고마워.”
하지우가 소속사에서 치러진 월말 평가에서 극찬을 받았단다. 거기에 추가로 한 단계 윗반으로 월반이 결정되기까지 했다고.
철저하게 단계별로 연습생 반을 구성한다고 들었다. 그곳에서 가장 막내들이 모여 있는 반에 있던 하지우가 뛰어난 성적을 거둬 월반을 해버린 셈.
“···두 단계만 더 올라가면 데뷔조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 지우도 그러면 TV에 나오는 거야?”
최지환이 방방 뛰자. 하지우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지금 올라간 반에서 데뷔까지 8년이 넘게 걸린 선배님도 있어. 결국 데뷔하지 못하고 회사를 나간 선배님들도 있고.”
“헉! 괘, 괜찮아. 우리 지우는 금방 데뷔할 거야!”
역시나 긍정의 아이콘인 최지환이었다. 잠시 하지우의 말에 놀라긴 했으나 금방 정신을 되찾고 응원을 해준다.
우리 나이에서 8년이 더 걸려도 17살인데. 어쨌거나 하지우가 뛰어난 성적으로 월반을 했다는 건 축하해줄 만한 일이었다.
“서준아! 그러면 미국에는 언제 가는 거야?”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던 김도윤이 물었다.
“어? 그렇네? 서준이가 월드 코믹스 영화를 찍게 된다면 미국에 가야 되잖아!”
“···언제 가?”
월드 스튜디오 측과 일정 조율을 해봐야겠지만. 서도현의 말로는 겨울 방학쯤으로 해서 시간이 조정 가능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를 배려해서 촬영 일정을 잡을 수 있다고 했으니.
“하게 된다면 아마 내년 겨울 방학쯤?”
내 대답에 그제야 애들이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당장 이번 겨울에 떠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모양.
“지환아. 너 서준이에게 할 말 있다고 했잖아.”
응? 갑작스러운 김도윤의 말에 최지환이 또다시 헉! 하고 숨을 삼킨다. 마치 그걸 왜 지금 말하냐는 듯 화들짝 놀라면서.
“왜? 무슨 일인데?”
“그게···.”
무슨 일이지? 최지환이 평소와 다르게 우물쭈물하며 말을 잘 꺼내지 못한다. 그 모습이 답답했음일까.
“에잇! 친구끼리 그런 도움 요청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라고. 나도 도와준다고 했잖아. 우리 친구잖아.”
옆에서 지켜보던 김도윤이 답답하다는 듯 대신 무슨 일인지를 말해주기 시작한다.
“지환이가 꿈이 감독님이잖아. 마침 어린이 감독 영화제 접수가 곧 시작된대. 그래서 도전해보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냐고 말하고 싶었대.”
아하.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다. 서울에서 주최하는 ‘어린이 감독 영화제’가 이제 곧 작품 접수를 시작하는 모양.
사총사 친구들이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최지환도 나름대로 열심히 미래를 개척할 방법을 찾은 듯싶다.
대견한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최지환에게 어떤 부분을 도와줘야 할지 물었다.
“지환아. 어떤 걸 도와주면 좋겠어?”
정답지를 보여주는 건 옳지 않다. 최대한 최지환이 많은 고민을 할 수 있도록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이 성장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아는 최지환은 배우가 된 나나 김도윤에게 다짜고짜 출연을 해달라고 말할 그런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일단 배우는 도윤이가 먼저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해줬어.”
“도윤이가?”
“응! 도윤이가 마침 쉬고 있잖아. 서준이 너는 드라마도 출연 중이고 몸값도 엄청 비싸니까. 옆에서 가끔씩 조언만 해줘도 정말 고마울 것 같아!”
아무래도 드라마 촬영에 바쁜 나에게는 저런 부탁도 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매일 학교 수업이 끝나면.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진 누나의 차를 타고서 촬영장으로 달려가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어린이 감독 영화제라. 20분짜리 자유 주제 영상을 제출하면 된다고 최지환이 열심히 설명한다.
잘 됐다.
“지환아.”
“응?”
“시나리오는 썼어? 어떤 내용을 영상에 담을 건지에 대해서 말이야.”
“으, 응! 사실 매일 가방에 가지고 다니면서 수정 작업하고 있었어!”
제법 손때가 가득한 노트 하나를 가방에서 꺼낸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하얀 종이였던 노트가 쓰고 지운 흔적들로 가득하다.
잠시 최지환이 열심히 준비한 시나리오를 읽은 뒤. 나는 떨리는 눈으로 기다리고 있는 최지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나도 도와줄게. 도윤이랑 같이 배우로. 어때?”
사총사 친구들이 각자의 꿈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친구로서 도와줘야지.
“저, 정말?!”
“지, 진짜?!”
“···대박.”
그 말을 들은 최지환과 김도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