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월드 스튜디오에서 캐스팅 이야기가 나왔다. 이 소식을 형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말하지 않았다가 기사로 접한다면. ‘서준아. 너 어떻게 형들에게 비밀로 할 수 있어. 형은 참 속상하다.’ 이런 말을 들을 것이 분명했다.
불과 며칠 전 김정범에게 ‘형. 왜 그런 고민이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았어요. 실망이에요.’라고 말한 사람이 나였으니까.
그 결과.
“이야. 다른 곳도 아닌 월드 코믹스 영화라니. 서준이가 미국 진출을 한다는 말이잖아. 이건 무조건 해야지.”
“그래도 어떤 배역이 들어왔는지는 확인해야지.”
박우형의 집에 모인 나와 김정범이었다. 원래 대본 분석 때문에 만나기로 했는데. 소식을 들은 김정범이 한걸음에 달려온 것.
김우승은 아쉽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온다는 걸 내가 말리기도 했고.
“서준아.”
“네?”
“데블 오리엔트라고 했던가. 이거 빌런임에도 꽤나 흥미로운 캐릭터인 것 같은데.”
“그죠?”
박우형의 말처럼 꽤나 재밌는 캐릭터였다. 월드 스튜디오에서 내게 제안한 ‘데블 오리엔트’는 이중인격을 가진 존재였다.
행성을 파괴하고 다니는 악의 존재 디스트럭터를 막기 위해 나섰던 마법사 오리엔트. 결국 자신의 행성 멸망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하게 된다.
그 이후 어린아이의 몸에 갇히게 된 오리엔트는 수백 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인격이 나뉘게 되고. 최종 승자로 몸을 지배하게 된 건 디스트럭터의 영향을 받은 악의 성향 인격.
‘데블 오리엔트’의 탄생이었다.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또 다른 인격을 억누르는 연기라. 쉽지 않을 수도 있겠어.”
박우형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정범이 아쉽다는 듯 나를 보았다.
“만약 서준이에게 히어로 제안이 들어왔으면 대박이었을 텐데. 할리우드에서 서준이 널 주인공으로 하는 솔로 영화 제작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 정말 아쉽네.”
“아니에요 형. 오히려 악당 캐릭터가 제안이 와서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히어로였으면 거절했을 거예요.”
만약 월드 스튜디오에서 제안한 배역이 데블 오리엔트가 아닌 히어로였다면.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을 터였다.
“왜? 일단 월드 코믹스 히어로가 된 배우들이 모두 돈방석에 앉았는데? 월드 스타급 인지도는 말할 필요도 없고.”
내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김정범이 되묻는다. 그럴 만도 한 게 월드 코믹스 영화들이 모두 초대박을 쳤기 때문.
시리즈로 제작되다 보니. 한 번 출연하면 연금처럼 계속해서 다른 히어로 영화에도 나올 수가 있었다.
거기에 월드 코믹스 영화의 히어로가 된다면. 김정범의 말처럼 단번에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형. 잘 생각해봐요. 세이버스의 히어로들을 연기한 배우들이 나중에 다른 영화를 찍는다면 어떨 거 같아요?”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내 간단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단박에 이해를 해버리는 김정범이었다.
배우 이미지의 고착화. 다양한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배우에게 있어 그보다 무서운 일은 없을 테니까. 특히나 아직 어린 나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일 터였다.
일종의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인 셈. 월드 코믹스의 히어로가 된다는 것은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배우가 된다는 것이었지만.
반대로 이후 어떤 영화를 찍더라도 히어로로 굳어진 이미지를 벗겨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제가 만약 30대 후반의 배우였다면 크게 고민하지 않고 히어로 역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잘 생각했다. 아직 9살인 서준이 네가 굳이 그런 리스크를 안을 필요 자체가 없지.”
박우형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우형이 형은 어떤 거 같아요?”
“서준이 네 말처럼 히어로 역이었다면 반대. 그런데 이건 악당 역이니 찬성. 심지어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이야. 배우라면 누구라도 욕심이 날 만큼.”
“그죠? 한 몸 안에 갇힌 두 개의 인격을 연기해야 한다라. 형 말처럼 욕심나는 캐릭터인 거 같아요.”
잠시 우리를 보던 김정범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오늘 이 자리에 없는 김우승을 찾기 시작했다.
“어? 그런데 우승이는 어디 갔어? 보통 이런 일에는 항상 자기 집으로 모이라고 하던 놈인데. 무슨 일 있나?”
있지. 김청아를 살살 꼬드긴 결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게 된 나였다. 바로 김우승이 김청아에게 저녁을 먹자고 제안한 날이라고.
나에게 김청아와의 약속이 있다는 걸 숨긴 채 미루겠다는 김우승을 말린 참이었다. 어차피 내일 보면 되는데. 그 중요한 기회를 날리면 쓰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에 있어 타이밍은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다.
“우승이 형도 바쁜 일이 있겠죠. 대신 주말에 보기로 했잖아요. 그보다 형은 삼촌이랑 만나서 어땠어요?”
화제 돌리기는 성공적이었다. 김우승에 대해 의문을 키우던 김정범이 서도현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으니까.
“크. 서준이 네가 왜 구름엑터스를 선택했는지 알겠더라. 대표로서 사람이 아주 좋아. 진즉에 구름엑터스로 갈 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도현을 만난 김정범은 매우 만족한 듯 보였다. 안 그래도 두 사람이 만났던 새벽에 양쪽 모두에게서 문자가 왔었다.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미팅의 결과는 새해부터 김정범이 소속사를 구름엑터스로 변경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내년부터는 우리 한솥밥 먹는 식구가 되겠네요?”
내 말에 무언가 떠올랐음일까. 아차 싶은 표정을 지은 김정범이 허망한 표정으로 월드 코믹스 자료들을 바라본다.
“서 대표에게 서준이 너랑 꼭 작품 하나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거 언제부터 촬영한다고?”
로또 1등 용지라도 잃어버린 것 같은 표정으로 묻는 김정범을 보다가.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만 나였다.
*
[월드 스튜디오 캐스팅 디렉터 윌리엄의 한국 방문. 대체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 이거 무슨 말임? 월드 코믹스 영화 만드는 곳에서 일하는 캐스팅 디렉터가 한국에 왔다는 거임? 자기네가 원하는 배우를 찾기 위해서?
└ 뉘앙스는 그런데. 그냥 휴가 겸 놀러 온 거 아닐까? 다른 곳도 아닌 월드 스튜디오인데. 당장 공개 오디션만 열어도 하고 싶어서 달려갈 배우가 한 트럭일 텐데?
└ 아님. 이거 기사가 꽤나 일리가 있음. 저 기자가 방금 공개한 후속 기사를 보면 윌리엄이라는 캐스팅 디렉터가 한국의 드라마 촬영장을 방문했다고 함.
└ 어어? 저기 세트장은 지금 방송 중인 타임슬립 과거 시간대 세트장인데? 설마 차 배우 아니야?
└ 차 배우? 왜? 월드 코믹스 영화에 차 배우가 할 만한 캐릭터가 지금 있나? 다 서양인을 모티브로 하는 히어로들밖에 없는 걸로 아는데.
└ ㄴㄴ 하나 있음. 저번에 개봉했던 세이버스의 쿠키 영상을 보면 나오는 다음 페이즈의 최종 보스 디스트럭터. 거기 부하 중 한 명이 데블 오리엔트인데. 그 캐릭터가 동양 어린아이임. ㄷㄷ 설마?
인터넷에 올라온 한 기사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얼마 전 개봉했었던 ‘세이버스’가 천만 관객을 돌파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월드 코믹스 영화였으니까.
심지어 윌리엄이라는 월드 스튜디오 캐스팅 디렉터가 방문한 장소가 ‘타임슬립’의 세트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미쳤다. 우리 차 배우 설마 할리우드까지 진출하는 거야?”
그런 기사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김시율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마우스 휠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차서준의 연기력이야 이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특히 지금 ‘타임슬립’에서 보여주는 형사 강록 연기는 역대급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는 상황.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왜 악당이야. 우리 차 배우라면 당연히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어야지.”
사람들의 말처럼 차서준이 언급되는 월드 코믹스 캐릭터가 ‘데블 오리엔트’라는 악당이라는 점이었다.
“응?”
그때였다. 김시율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시글 하나를 발견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이미 팬클럽 내 조회수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글이었다.
[우리 차 배우의 데블 오리엔트 캐스팅이 신의 한 수가 될 거라 생각하는 이유]
지금 다들 기사를 보고 떠들썩할 거라고 생각해.
다른 곳도 아닌 내는 족족 대박을 치고 있는 월드 스튜디오의 캐스팅 디렉터에 대한 이야기니까.
자, 지금 다들 불만을 표하고 있는 ‘만약 차 배우가 월드 코믹스 영화를 찍게 된다면 무슨 캐릭터를 하게 될까?’의 정답이라 불리는 ‘데블 오리엔트’에 대해 알아보자.
(만화 사진)
(설명)
어때?
왜 월드 스튜디오에서 공개 오디션을 통해 배우를 찾지 않고. 캐스팅 디렉터가 한국까지 와서 우리 차 배우를 봤는지 알겠지?
이건 우리 차 배우가 아니라면 소화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표현하기 미친 난도를 가진 캐릭터야.
그럼 시간이 없으니 다음 기회에 또 이야기해볼게.
└ 어? 이 글을 보니까 이해가 되는데? 내가 저 캐스팅 디렉터라도 당장 한국행 비행기 타서 우리 차 배우 보러 왔겠다.
└ 만화로 보니까 헉!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심오한 악당이네요. 만약 만화 그대로 영화에서 나온다면 정말 매력적인 빌런이 될 것 같고요.
└ ㅇㅈ 내가 그래서 데블 오리엔트 이야기 나왔을 때 미쳤다! 하고서 환호성을 질렀는데. 막상 여기 반응들이 좋지 않아 당황했었음.
└ 사실 이번 타임슬립을 하기 전이라면 걱정했을 텐데. 차 배우의 강록을 보고 나니까 오히려 기대가 되네요.
└ 우리 금동이가 이제 국제적인 스타가 되는 건가요? 월드 스타 금동이?
“어, 엄마?”
마지막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김시율은 핸드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먼저 걸지 않더라도 곧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을 테니까.
“엄마.”
- 딸. 방금 엄마가 팬클럽에서 우리 금동이 관련된 글을 봤는데. 저거 보려면 앞에 영화들 다 봐야 한다며? 딸이 영화 결제인가 뭔가 좀 해줄래?
“아니 엄마. 아직 차 배우가 캐스팅 확정이 된 것도 아니잖아.”
-얘는. 미리미리 봐둬야지.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김시율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 차 배우가 데블 오리엔트에 캐스팅된다면. 월드 코믹스 영화의 국내 인기가 더 뜨거워지겠는데?’
당장 엄마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히어로 영화에는 일절 눈길조차 주지 않던 엄마가 시리즈 영화들을 챙겨볼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
“아니 어떻게 알았지?”
대단했다. 슬슬 서도현에게 생각을 정리한 결론을 말하려고 했는데. 그보다 빠르게 월드 스튜디오 캐스팅 디렉터가 한국을 방문한 사실이 기사화되었다.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정보력도 참으로 대단했다. 어떤 캐릭터에 맞는 배우를 찾기 위해 왔는지 순식간에 추리해버렸다.
“요즘 누구보다 관심을 받고 있는 배우가 서준이 너니까. 거기에 기자 하나가 공항에서 윌리엄을 알아본 모양이다.”
“참 세상에는 비밀이 없는 거 같아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표실 문이 벌컥 열린다. 그리고 그 열린 문으로 작은 머리가 후다닥 달려와 나를 꽉 껴안았다.
“도, 도윤아?”
“서준아! 대박대박!”
얼마나 흥분했는지 안아준다는 게 몸통박치기를 해버린 김도윤이었다.
저런 반응도 이해는 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액션만으로 푹 빠진 하준이었다. 그런데 김도윤은 영어 대사를 귀로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자막으로 볼 수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예전에 사총사 친구들과 영화관에서 월드 코믹스 영화 한 편을 본 적도 있었다. 그런 영화에 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사가 뜬 셈이니.
“삼촌에게 들었어. 진짜로 월드 코믹스에서 서준이 너에게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다면서!”
“도윤이 너 영어 공부는 잘하고 있어?”
“당연하지! 아직은 부족하지만. 서준이 네가 진짜로 영화 찍으면 나 자막 없이도 볼 수 있도록 공부할게!”
이런. 그러면 사총사 친구이자, 배우로서 날 동경하는 김도윤을 위해서라도 해야겠다.
“삼촌.”
“응?”
“저 그거 해볼게요. 촬영 준비를 언제부터 하면 된다고 했죠?”
“잘 생각했다. 준비는 내년 중순부터 하면 된다더구나.”
배우 차서준의 할리우드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