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불면증이었다. 첫 방송을 앞두고 있는 ‘타임슬립’의 작가 김은중은 최근 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3년이었다. 극본 공모전에 당선되었다는 흥분과 함께 이제 효도하겠다던 아들이 가진 침묵의 시간은.
그 오랜 빛바랜 시간의 끝이 찾아오고. 드디어 막연하게 꿈꿔왔던 대본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음에도 불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후우. 잘 되어야 할 텐데.”
지난 며칠간 밤이고 새벽이고 몇 번이나 깬 덕분에 쪽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모니터와 키보드가 놓여 있었다.
사실 대본은 더 이상 수정할 것도 없었다. 이미 지난 3년 동안 쇠를 깎는 심정으로 하나하나 다듬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중 작가가 키보드 앞을 떠나지 못하는 건. 그를 향해 쏟아지고 있는 관심과 우려 섞인 시선들 때문이었다.
- 은중아. 이번에 드라마 제작된다면서? 축하한다. 잘될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차서준이랑 박우형까지 왔으니 조금 수정해봐. 배우들이 시청률 보장하는 건 아니잖아. 나쁜 말을 하려는 게 아니고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알았지?
‘타임슬립’이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가장 많이 받았던 말들이 바로 저것이었다.
배우 차서준과 박우형이 합류했으니. 성공하려면 그 두 사람에 맞게 대본을 수정해야 한다고.
김은중도 알고 있었다. 배우의 이름값이 꼭 드라마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많은 S급 배우들이 한 번쯤은 크게 미끄러지곤 했다. 그 원인이 배우 본인에게 있든, 아니면 대본에 있든, 어디 있든 간에.
“제발···.”
그렇기에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타임슬립’ 대본에 자신감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순서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 작가님. 오늘 저녁 어때요? 저 마침 촬영 다 끝나서 연락드렸는데.
차서준에게 연락이 왔다. 심지어 첫 방송 하루 전날인 오늘 저녁에 식사를 하자면서.
정말 촬영을 마치자마자 왔는지. 연예인 티가 물씬 나는 차서준을 만날 수 있었다.
잠시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차서준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작가님. 요즘 잠 안 오시죠?”
“그걸 어떻게···.”
차서준이 툭 던진 말에 화들짝 놀란 김은중 작가였다. 그러다 문득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선 이내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제작이 결정된 이후 환해졌던 얼굴에 어느새 다크써클이 짙게 드리웠으니까.
“걱정하실 거라는 걸 잘 알아요. 제가 바로 직전에 찍었던 영화 목소리 아시죠?”
끄덕. 김은중 작가가 말없이 고개를 움직이자.
“거기에서 함께했었던 주우정 감독님이 그랬거든요. 베를린에 도착해서였는데 상을 못 받아도 여기 온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이렇게 말하곤 시상식이 있던 전날 밤 늦은 새벽까지 창밖만 보더라고요.”
“그래요?”
“네! 그런데 그때 제가 그랬거든요. 감독님 우리 영화 잘 나왔으니 걱정 말라고. 당시의 그 말은 작가님께 드리고 싶어요. 대본이 정말 잘 나왔으니 걱정 마시라고요.”
이상했다. 분명 9살의 어린 배우가 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저 말을 듣자마자 안심이 되는 이유는 뭘까.
“이미 완벽에 가까운 대본을 수정하려고 하실 필요 없어요. 감독님과 저. 그리고 작가님이 함께 뽑은 배우들을 믿고 한번 기다려봐요 우리.”
“···고마워요. 차 배우.”
거짓말처럼 차서준을 만난 순간부터 더 이상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은 김은중 작가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타임슬립’의 1화가 방송되었다. 이상했다. 분명 방송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불안 증세까지 보이던 자신이었다.
심지어 ‘타임슬립’ 채팅방에 입장하여 드라마 한 번, 채팅 한 번씩 번갈아보았는데.
- 축하한다! 이 자식아! 형님은 네가 성공할 줄 알았다고!
1화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격한 흥분의 목소리로 전화한 친구 덕분에 현실로 돌아온 김은중 작가였다.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린 김은중 작가는 서둘러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오늘날의 결과를 만들어준 배우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서.
*
1화 방송이 나간 다음 날. 나는 서도현을 만나기 위해 회사를 찾았다.
“삼촌.”
“서준이 왔니? 잠깐만 기다릴래. 지금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네. 저기 앉아서 기다릴게요.”
회사가 커지고. 소속 배우들이 늘어날수록 대표인 서도현이 해야 할 일들이 점점 쌓이고 있었다.
오죽하면 ‘삼촌이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대. 정말 삼촌이 너무 바빠 보여.’라고 김도윤이 말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기쁜 소식이 있다더니. 내가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라고?”
급한 일을 처리했는지. 서도현이 코코아를 가져다주며 묻는다.
“네!”
“무슨 일인데?”
오늘 저녁에 ‘타임슬립’ 2화가 방송되겠지만 따로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방송이 시작하기도 전에 실시간 검색어 1위부터 줄 세우기를 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으니까.
보나 마나 서도현은 ‘타임슬립’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거라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정범이 형이 우리 회사로 오고 싶대요.”
“그래. 정범이 정도면 우리 회사··· 뭐?!”
‘타임슬립’ 관련 기사들을 살피며 내 말을 따라 하던 서도현의 고개가 이쪽을 향해 홱 돌아간다.
“그래서 삼촌이랑 자리 한 번 마련해달라던데요. 어젯밤에 같이 드라마 보면서 이야기했어요.”
“그래? 잠깐만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되었더라.”
배우 김정범이라면 이쪽 업계에서 대어였다. 그것도 서도현에게 저런 반응을 만들어낼 정도의 특급 대어.
과거 ‘금괴소동’ 직전 2번이나 대차게 말아먹으면서 A급 이하의 대우를 받았던 적도 있었지만. 나와 함께 영화를 찍으면서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 배우가 김정범이었다.
그런 김정범이 구름엑터스로 오고 싶다는데. 당연히 연기력 좋은 배우를 사랑하는 서도현으로서는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일 터였다.
“서준아. 오늘 밤에 시간 어떤지 한 번 물어봐줄래?”
“오늘 밤이요?”
“그래.”
서도현의 물음에 내가 김정범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웅. 그리고 10초도 채 지나기 전에 답장이 왔다.
“무조건 좋대요.”
“하하. 서준이 네 덕분에 또 좋은 일이 생기네. 역시 우리 복덩이가 서준이라니까.”
그 대답을 전하자 서도현이 웃음을 터트린다. 어찌 기쁘지 않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연사모의 일원인 김정범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서도현이었으니.
아마 지금 서도현의 머리엔 들어온 대본이나 시나리오 중. 김정범에게 어울릴 만한 것들이 좌르륵 떠오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
[오랜만에 만들어진 제대로 된 드라마. 형사 그 자체가 나오는 형사물 ‘타임슬립’]
사실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다 그렇잖아. 의학 드라마는 의사들이 병원에서 하는 사랑 이야기. 직장인 드라마는 회사원들이 직장에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처음부터 아예 러브라인을 깔고 들어가는 드라마가 대부분이었지. 그래서 이번 ‘타임슬립’도 그런 드라마가 아닐까 싶었어.
아무리 차서준과 박우형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본 ‘타임슬립’은 진짜 끝내주는 형사들의 이야기 그 자체더라.
미친 연기력을 보여주는 박우형과 차서준. 그리고 그에 밀리지 않는 처음 보는 얼굴의 배우들까지.
아직 초반이지만 올해 최고의 드라마가 아닐까 싶어.
└ ㅇㅈ 박우형의 미친 강록을 보고서 좀 걱정했거든? 그런데 차서준의 강록을 보는 순간. ‘아···.’ 딱 이런 감탄만 터지더라. 진짜 쟤 안에 30대 배우가 있을지도 몰라. ㅋㅋㅋ
└ 그보다 대사들이 미쳤음. 제작 인터뷰 때 보니까 3년 동안 준비했다고 하던데. 진짜 이를 갈고 만들었다는 게 느껴지더라.
└ 나는 묘하게 대사도 몇 없는 이아영에게 시선이 가던데. 아니! 저걸 어떻게 찾았지?! 하는 시선 강탈 표정이 너무 좋음. ㅋㅋㅋㅋ
└ 1, 2화 만에 사람들의 반응이 난리가 난데에는 다 이유가 있음. 그냥 재밌잖아. 과거 미제 사건이 벌어졌던 시간대에서의 쫄깃함. 그리고 현대 돌아와 주인공이 하나하나 풀어헤치는 짜릿함.
└ 제발 용두사미 안 되었음 좋겠다. 보통 초반에 인생드라마라고 하던 작품들이 꼭 뒤에서 말아먹는 경우가 많아서. ㅠㅠ
└ 이번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심지어 쪽대본이 아니라 대본이 이미 다 완성된 상태라잖아. 지금 퀄리티만 유지해도 역대급 반열에 들어갈 듯싶은데.
1, 2화가 방송된 목요일 밤. 이미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NBC 드라마 ‘타임슬립’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 관심을 커뮤니티를 넘어 각종 검색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했을 정도.
- 차서준-박우형의 ‘타임슬립’ 1화 시청률 17.3%로 뜨거운 관심 속 출발.
- ‘타임슬립’ 단 2화 만에 시청률 20% 돌파. 과연 이 상승세는 어디까지 향할까?
- 시청률 그 이상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NBC 드라마 ‘타임슬립’.
이런 기사가 쏟아지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단 2화 만에 시청률 20프로를 넘긴 드라마는 정말 오랜만이기 때문.
심지어 놀라운 건 1, 2화 시청률이 아닌 그 상승폭이었다. 이대로라면 진짜 몇 화 내로 시청률 30프로를 달성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바깥에서는 ‘타임슬립’에 관한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고 있을 때. 정작 나는 박우형의 집에 있었다.
“서준아. 축하한다.”
“형? 형도 같이 출연하고 있잖아요. 형도 축하해요.”
“그래.”
촬영을 제외하면 나는 박우형과 거의 같이 지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어제 2화를 다시 봤는데. 살짝 아쉬운 부분이 느껴졌어. 이게 촬영할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내가 보여주던 강록의 습관과 서준이 네가 보여준 습관에 조금의 차이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거든. 그 부분을 다시 한번 맞춰봤으면 하는데. 서준이 네 생각은 어때?”
응? 그거 발견한 사람은 김학영 PD와 박우형 두 사람뿐일 거 같은데.
어쨌거나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려는 욕심에서 나온 말이었으니까.
“좋아요. 사실 형의 강록이 맞는 건데. 제가 현장에서 살짝 애드리브로 그렇게 표현한 거였거든요. 만약 강록이 어린아이의 몸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이런 생각 끝에요.”
“그래? 그렇다면 그런 해석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아무래도 30대인 형사 강록과 과거 시간대로 돌아가 어린아이가 된 강록에게는 신체적인 차이가 있을 테니까.”
“···.”
그런 우리의 대화를 멍하니 지켜보던 김우승이 반성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마 시청률이 오른다고 마냥 기뻐하던 자신과 다르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도록 연구하고 또 노력하는 우리를 보고 반성하는 모양.
“다 좋은데. 밥 도착했는데 먹고 하면 안 될까?”
“아. 벌써 왔어?”
“벌써 왔어가 아니라 아까 왔어. 잠깐만 이것만 이야기하고 하자더니만. 벌써 5분이 지났다고.”
“미안.”
그제야 밥이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박우형이 식탁으로 온다.
“형은 또 뭘 보고 있었어요?”
“응? 이거 사람들이 타임슬립 짤방 쓰는 거 보고 있었지. 꽤 재밌어.”
“그래요?”
“응. 이거 한 번 봐.”
김우승이 ‘타임슬립’의 대사를 인용한 각종 짤들을 보여준다. 몰랐는데 단 1, 2화 만에 각종 짤들이 밈처럼 쓰이고 있었단다.
[내가 가오가 있지. 그깟 푼돈에 내 인생 안 팝니다.(사표 던지는 짤방과 여러 짤방)]
└ ㅋㅋㅋㅋㅋㅋㅋㅋ 회사에는 팔아야지. 넌 강록이 아니야. 정신 차리라고. ㅋㅋㅋ
└ 심지어 왜 짤방 중에 차 배우의 강록이 있는데. 또 쟤 표정은 왜 이리 30대 형사 느낌이 물씬 나냐고. ㅋㅋ
└ 우리 팀장 새끼님도 어느새 강록체를 쓰기 시작했더라. ‘우리 부서가 가오가 있지. 다음 주에는 연차 안 씁니다.’ 저 말 듣자마자 일어나서 때릴 뻔.
└ 제 남친이 타임슬립 보더니 이상해졌어요. 뭔가 강록처럼 거친 야수성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미친개한테 물린 사람처럼 보여요. ㅠㅠ
└ 주변에 강록병 걸린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고 있음. 근데 강록은 현실에 찌들었을 뿐 형사로서 능력이 최고였다고. 다들 강록병 조심하세요. ㅋㅋㅋㅋ
이렇듯 ‘타임슬립’에 관해 활활 타오르고 있을 때.
“우승이 형. 촬영장에 오는 거 잊지 마세요.”
“응? 알았어.”
나는 김우승을 촬영장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