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월드 스튜디오.
월드 코믹스 만화 원작들을 영화화 시도하여 몇 년 전부터 슈퍼히어로물을 유행시킨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였다.
1페이즈의 최종장을 장식한 ‘세이버스’는 무려 월드 박스오피스 16.5억 달러라는 믿을 수 없는 성적을 거두기까지 했었다.
그런 월드 스튜디오의 사장 릭카니는 인상을 찌푸린 채 캐스팅 디렉터 윌리엄과 미팅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해결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인종을 바꾸면 안 되나? 꼭 동양의 어린아이가 데블 오리엔트를 할 필요는 없잖나.”
“그게··· 원작자 측에서 그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습니다.”
이게 문제였다. 이미 미국에서 수십 년 전부터 유행해온 월드 코믹스 만화였다. 그런 캐릭터들을 창조해내고 또 만화로 그린 원작자들은 돈이 아쉽지 않은 상황.
“난감한 상황이로군. 그렇다고 해서 원작자의 의견을 묵살했다간. 저번처럼 프로젝트 자체가 엎어질 수도 있으니.”
또 하나의 문제는 원작의 팬들의 충성심이 너무나도 뜨겁다는 데에 있었다. 그 충성심 덕분에 히어로 영화들이 연달아 히트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이런 상황에서는 걸림돌로 돌아왔다.
감독과 원작자의 충돌로 히어로 영화 한 편이 엎어졌던 쓰라린 경험이 있는 월드 스튜디오로서는 선택지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상태.
바로 ‘데블 오리엔트’에 딱 어울릴 만한 배우를 찾는 것이었다.
“저번에 나왔던 후보들은 다 확인했나?”
“예. 추가로 할리우드에서 단역으로라도 활동하는 모든 아역 배우들까지 직접 찾아가서 확인했습니다.”
“어땠나?”
“아쉽게도 모두 기대 이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윌리엄 그대의 말이니 확실하겠지.”
지금의 월드 코믹스 영화 세상을 만든 히어로들. 그 배역에 맞는 배우들을 찾아낸 캐스팅 디렉터가 눈앞의 윌리엄이었다.
적어도 배우 캐스팅에 있어선 감독에 준하는 발언권을 가지게 된 입지적인 인물.
그런 윌리엄이 직접 확인까지 했다고 하니. 적어도 할리우드 내에서는 월드 스튜디오에서 찾는 아역 배우가 없다는 뜻이었다.
영화 내용이 제작 단계에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월드 스튜디오는 여러 개의 시나리오를 주고 촬영을 진행했다.
정작 촬영하고 있는 배우 본인도 어떤 시나리오가 영화에 들어가는지 알지 못한 채. 그렇기에 감정선을 잡는다는 건 어지간한 연기력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는 찾아야 하네. 늦어도 내년 말에는 촬영에 들어가야 할 테니 말일세.”
그들이 찾는 배우의 캐릭터는 2페이즈의 중간 보스인 데블 오리엔트였다. 디스트럭터에게 패배해 평생 어린아이의 몸에 갇힌 우주적인 존재.
아직까지 베일에 싸여있는 2페이즈 최종 보스 디스트럭터에 대한 기대감을 다 살려놨는데. 어설픈 중간 보스는 오히려 팬들의 김만 새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출장을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어디로?”
“코리아.”
“노스? 사우스?”
저 질문이 농담이란 걸. 던지는 릭카니나, 받는 윌리엄이나 모두 알고 있었다. 당장 매번 영화를 개봉할 때마다 깜짝 놀랄 만한 기록을 가져다주는 나라였으니까.
“데블 오리엔트에 맞는 배우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한국에서 꽤나 눈길이 가는 배우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영어는? 아무래도 데블 오리엔트의 대사가 적지 않아. 언어가 무엇보다 중요하네.”
“이번 베를린 영화제 보셨습니까?”
“아니. 우리에게 상 하나 주려고 하지 않는 곳을 뭣하러 보나.”
히어로 영화 한 편을 개봉할 때마다 전 세계에서 돈을 쓸어담는 월드 스튜디오였지만. 각종 영화제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올해 있었던 베를린영화제에서 그 어린 배우의 영화가 은곰상을 수상했는데. 정작 주목을 받은 건 그 어린 배우였습니다.”
“호오. 그건 좀 흥미로운 이야기군.”
월드 스튜디오의 핵심 캐스팅 디렉터 윌리엄이 저리 말할 정도면. 이미 연기력은 그의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했다는 말이었다.
“당시 인터뷰 영상을 봤는데 그 친구 영어가 제법 유창합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요.”
“영상 자료는?”
“지금 가지고 왔습니다.”
잠시 후.
“이 친구 괜찮은데? 한 번 접촉해봐.”
월드 스튜디오의 캐스팅 디렉터 윌리엄이 한국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
올해 최고의 기대작 ‘타임슬립’의 첫 방송 날이 밝았다.
원래는 집에서 엄마, 아빠. 그리고 하준이, 하윤이와 함께 보려고 했으나. 오랜만에 얼굴을 봐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한 한 사람 때문에 김우승의 집을 찾았다.
“이렇게 다 모이는 거 정말 오랜만 아니야? 요즘 얼굴 보기가 왜 이리 힘들어.”
“형이 해외에 나가 있었잖아. 형만 빼고 몇 번 모였어. 우형이 형이랑 서준이는 촬영 때문에 매일 만났을 테고.”
“아, 맞다. 대신 이렇게 너네 주려고 선물 잔뜩 사 왔잖아.”
갑자기 힐링이 필요하다며 휴양지 섬에 다녀온 김정범이 포장된 선물이 들어있는 쇼핑백들을 흔든다.
나와 박우형이 출연한 드라마의 첫 방송에 맞춰 돌아온다고 오늘 새벽에서야 도착했단다. 확실히 쉬고 온 보람이 있는지 얼굴에서 번쩍번쩍 광이 나고 있었다.
문제는.
“형. 근데 왜 이리 탔어요?”
휴식 여행을 떠나서 하루 종일 태닝이라도 하고 온 것인지. 하얗던 김정범의 피부가 까맣게 변해서 돌아왔다.
“크. 서준이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네. 이건 탄 게 아니라. 뜨거운 태양 아래 근심과 스트레스들을 모조리 태우고 온 흔적이라는 거야.”
“그게 탔다는 거잖아. 그보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갔다 왔어?”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갑작스럽게 ‘나 휴양지 다녀온다!’라는 문자 하나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진 김정범이었으니까.
뭔가 말 못 할 고민이 있는 것 같아 보이긴 했었다. 때가 되면 어련히 말해줄 거라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김정범이 돌연 훌쩍 여행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런 김정범의 입에서 뭔가 심도 깊은 이유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잠수 탔어.”
응? 뭐라고?
정작 나온 대답은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다. 소속사와 싸우고 잠수를 타버렸다는 황당한 내용.
심지어 우리에게 말하지 못한 이유도 쪽팔려서란다. 특히 나에게 매번 어른이라고 강조했었는데 차마 그런 내용을 말하기가 부끄러웠다고.
“나도 서준이랑 우형이의 연기론에 자극받아서 이번 작품 찍었던 거 알지?”
알다마다. 연사모의 한 명으로서 자신도 배우임을 보여주겠다며 선택한 영화였다. 본인도 제법 만족하면서 찍은 거로 아는데.
“그런데 소속사에서 하도 난리를 치더라고. 계약기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연장하자고 애걸복걸. 또 차기작은 몸값을 올릴 수 있는 작품 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에휴.”
“그래서 싸우고 잠수 탄 거야?”
“어. 어차피 개봉까지 시간도 남았겠다. 마침 돈도 많고 시간도 남으니 그냥 머리 좀 식히고 왔지.”
확실히 효과는 뛰어난 듯 보였다. 해외로 훌쩍 떠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근심 가득하던 얼굴이 활짝 폈으니까.
그런데.
이어지는 김정범의 행동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김우승과 대화를 나누던 김정범의 고개가 홱 하고선 내 쪽을 향한다.
“서준아.”
“네?”
“형 좀 데려가 주라.”
“에?”
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되묻자. 김정범이 가져온 쇼핑백 중 하나를 내 손에 쥐어준다.
“이거 진짜 비싼 양주거든? 서도현 대표에게 가져다주면서 내가 한번 보고 싶다고 전해줘.”
“진심이에요?”
“어. 내가 근심, 고민을 태양 아래서 태우면서 내린 결론.”
눈빛이 진지하다. 사실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서도현이 운영하는 구름엑터스만큼 좋은 소속사가 없긴 했다.
배우 원하는 작품 찍도록 전폭적인 지원해줘. 또 원하는 광고에만 나갈 수 있도록 서포트해줘. 굳이 흥행하지 못할 걸 알더라도 배우 본인이 간절히 원하면 연결해주기까지.
배우에게 있어 꼭 당장 코앞의 흥행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서도현의 지론이었다.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작품을 통해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면 배우로서 몇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다면서.
나와 작품을 같이 했던 배우들 중에서. 이름 있는 몇몇 배우들이 그런 서도현의 생각을 들은 뒤 구름엑터스로 둥지를 옮겼다.
“우형이는 조금 더 있다가 지금 다니는 매니저랑 1인 기획사를 차릴 것 같고.”
“맞아.”
김정범의 저 말처럼 박우형은 몇 년 뒤 1인 기획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배우로서 본인의 연기력이 출중하고, 또 광고계에서 환영하는 이미지를 가졌으니.
무엇보다 옆에서 내가 보더라도 박우형의 매니저라면 믿을 만한 사람이긴 했다. 저 형을 용케 잘 케어하면서 지금까지 오게 만든 사람이 현 매니저였으니까.
“나는 솔직히 지금 매니저도 퇴사 문제로 언제 바뀔지 모르거든. 그래서 그냥 이참에 옮겨버리려고.”
“그렇다면 잘 생각했어요. 대신 중계 수수료가 있는데.”
내 농담이 끝나기 무섭게. 인터폰에서 띵동 하고선 무언가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줄 알고 내가 뇌물을 다 준비했지.”
뭔가 했더니 다리, 윙, 봉으로 구성된 콤보 세트 4마리였다. 1인 1닭인 셈. 거기에 곧 도착할 피자까지.
“하준이를 위해서 집으로는 대게 보냈어. 당연히 주문해서 보내기 전에 형님께 전화도 드렸고. 어때? 중계 수수료는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은데.”
이런. 저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지.
“알았어요. 대신 오늘 말고요. 내일 회사에 가기로 했으니까. 한번 삼촌에게 말해볼게요.”
“오케이. 확인. 그러면 이제 우리 서준이와 우형이가 찍은 드라마 좀 한번 봐볼까?”
김정범과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되었다.
도착한 치킨을 세팅하고 음료수와 잔을 가져오던 김정범이 무언가를 보고선 내게 물었다.
“서준아. 우승이 쟤 뭐 하고 있는 거냐?”
크흠. 차마 김우승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과 채팅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보나 마나.
└ 서준이 드라마 너무 기대됨. 지난주에 했던 타임슬립 특별편성 봤는데 서준이의 연기에 사람들이 다 경악하던데.
└ 우승이 어서 오고. 역시 서준맘답게 딱 등장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지. 차마 차 배우는 건드릴 수 없으니까. 다시 한번 검증 간다. 김우승 멍청이 해봐.
이런 채팅이나 주고받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시작한다.”
‘타임슬립’의 첫 방송이 시작되었다.
“크. 역시 우형이다. 저 강록과 옆에 앉아서 다리 들고 있는 우형이가 어떻게 같은 사람처럼 보이겠냐고.”
열정을 잃긴 했지만 거친 야수성을 지닌 형사 강록. 그 완벽한 형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박우형의 연기에 김정범이 감탄을 터트렸다.
그런 김정범의 입이 멍하니 벌어진 건.
-어. 이거 뭐야. 내 손이 왜 이렇게 작아. 시선은 또 왜 이렇게 낮고.
과거 시간대에서 어린아이로 눈을 뜬 강록이 등장했을 때였다.
“···.”
잠시 말이 없던 김정범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나를 향한다. 마치 ‘이게 진짜 말이 돼?’라는 시선으로.
“···서준아? 아직 방송 중인데 말을 자꾸 해서 미안한데.”
“네. 왜요?”
“너 혹시···.”
무언가를 말하려던 김정범의 입이 다시 다물어진 건.
-새끼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까불고 있어.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원래의 몸이었으면 넌 죽었어.
불량배를 처리한 강록이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대사를 쳤을 때였다.
시청자들이라면 ‘와, 차 배우 이번에도 연기 지리네.’ 정도의 감탄을 했겠지만. 같은 배우로서 연기에 진심인 김정범이라면 다를 터였다.
저 안에 담긴 눈빛, 표정, 사소한 몸짓 안에 담긴 내 ‘연기’를 알아보았겠지.
잠시 후.
어린아이로 눈을 뜬 이곳이 과거 미제 사건이 발생했던 시간대임을 깨닫는 순간. 흘러나오는 엔딩 OST.
"캬. 미쳤다 미쳤어. 저런 대본이 3년 동안 제작되지도 못하고 있었다고?“
“솔직히 우형이나, 서준이 연기도 끝내줬는데. 이거 대본 쓴 작가가 진짜네.”
그 엔딩 OST를 들으며 김정범과 김우승이 감탄사만 터트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우웅. 누구보다 빠르게 보낸 누군가의 연락에 핸드폰이 울린 것은.
- 고맙습니다. 차서준 배우님. 사실 오늘 방송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김은중 작가에게서 온 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