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배우 차서준이 처음으로 등장할 ‘타임슬립’의 과거 시간대 촬영 날이 밝았다.
이틀 전 고사와 함께 시작된 첫 촬영에서 모두가 감탄을 멈추질 못했었다.
형사 강록 그 자체가 되어버린 배우 박우형의 연기 때문. 그렇기에 차서준의 첫 촬영을 앞둔 지금 조금씩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차서준이 괜찮을까?”
“야야. 하다하다 다른 배우도 아닌 차서준을 걱정하냐. 지금까지 5작품 하면서 보여준 거 못 봤어? 심지어 베를린도 다녀왔는데?”
“보기야 다 봤지. 심지어 감탄하면서 봤고. 그런데 너 어제 박우형이 강록 연기하는 거 못 봤냐고.”
“아, 맞다. 어제 보니까 왜 감독님들이 박우형, 박우형 하고 찾는지 알겠더라.”
과거 ‘폭군의 세자’에서 박우형과 차서준이 같은 이환을 연기했다지만. 그건 어린 시절의 이환과 성인이 된 이환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타임슬립’에서는 두 사람 모두가 같은 나이의 형사 강록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해야만 했다. 껍데기만 어른이냐, 어린이냐는 차이만 있을 뿐.
그 부분에서 사람들이 과연 이번에도 차서준이 보여줄 수 있을까? 이런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박우형이 연기한 강록이 거친 형사 그 자체를 보여주었으니까. 김학영 PD조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끝내주는 연기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촬영도 잘 부탁드립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5작품을 연달아 성공시켰으면서도. 촬영장에 등장할 때면 막내 스태프에게까지 일일이 인사를 한다는 차서준의 인성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을 듣긴 했었는데. 직접 보니까 더 대단하네.”
“쩌는 거지. 보통 어린 나이에 저 정도 성공을 거두고 나면 고개가 빳빳해진단 말이야.”
“저번에 누구였더라. 처음에는 반갑게 인사도 하다가 중간에 빵 뜨고 나니까 쳐다도 안 보더라.”
“그지. 그런 놈들이 이 바닥에 한가득인데. 차서준은 처음 모습 그대로라잖아.”
아역 배우 중에서 S급 대우를 받았던 사람이 있었던가.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런 아역 배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방긋방긋 웃으며 인사하고 다니는 차서준을 제외하면 말이다.
“저 모습을 보니 걱정이 되긴 하네. 어린 배우가 어른을 연기한다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내가 시기나 질투를 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라니까. 차서준이 잘해야 우리 드라마가 잘될 거 아니야.”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차서준을 싫어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터였다. 특히나 오디션의 경쟁을 뚫고 뽑힌 이들이라면 더욱더.
“너도 오디션에서 차서준에게 조언 들었지?”
“들었지. 깜짝 놀랐다니까. 보통 촬영에 들어가고 좀 지나야 감독님들이 알아차리는 문제를. 차서준은 오디션 때 잠깐 보고서 알아차렸으니.”
뼈와 살이 되는 조언들을 많이 해준 차서준이었다. 특히 차서준이 언급한 부분이 자신들의 연기력에 부족한 부분이라는 걸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새겨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예능 프로에 나와서 보여줬잖아. 김우승의 연기 비결이 차서준이라고 했을 때 그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 보니까 진짜더라.”
“나도 그거 보면서 감탄만 했어. 무슨 애가 아니라 선생님들을 보는 것 같아서. 결국 김우승이 박강유로 터졌으니 결과로도 증명한 거지.”
거기까지 대화를 나누던 두 조연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걸 떠올린 것이다.
“응? 그러면 오늘도 잘하지 않을까?”
“그러게. 생각해보니 지금 차서준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네. 오늘 실수하지 않게 잘하자고.”
잠시 후.
준비된 세트장에서 차서준의 첫 촬영이 시작되자. 방금 전까지 차서준의 연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이들의 입이 멍하니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
처음 몇 번의 미팅을 가질 당시 김학영 PD가 이런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서준이의 연기력을 의심하는 건 아닌데. 이번에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자기 나이대의 연기가 아니라. 강록이 어린아이 몸에 들어간 연기를 해야 되는 거잖아요.”
걱정이 될 만했다. 김학영 PD의 말처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를 연기하는 것과, 성인이 어린아이의 몸에 빙의한 것을 연기하는 건 궤를 달리하는 일이었으니까.
남들이 보기엔 아직 9살인 내가 어른들의 시점과 생각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여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거친 형사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강록이라면 더욱더 그런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우형이 형과 같은 강록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요?”
“그렇지. 물론 베를린에서 인정받고 돌아온 서준이의 연기력을 감독으로서 당연히 믿고 있어요. 다만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지를 지금 한 번 볼 수 있을까?”
“네! 지금 바로 보여드릴게요.”
이미 박우형에게 들은 참이었다. 이틀 전 별도의 미팅을 가지면서 박우형의 강록을 확인했다고.
아마 오늘 이 자리에서 차서준의 강록을 확인하기 위해서 했던 것일 테지.
드라마 감독으로선 당연히 체크해야 할 부분이었다. 처음 ‘타임슬립’을 하겠다고 했을 때에는. 내 연기력이 어떠니 저떠니 따질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편성이 확정된 지금 내 연기의 상태를 보고서 작가와 함께 대본 수정을 해야 할지 결정하려는 것일 터였다.
“그러면 시작할게요.”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 김학영 PD가 지문을 읽는 순간.
나는 강록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연기가 끝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두 사람이 멍하니 박수만 쳤다.
“거 봐요! 작가님. 내가 차 배우 연기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요. 캬, 우형 씨랑 대본을 받자마자 연습했다고 하더니만. 이거 이번에 제대로 터지겠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학영 PD가 박수를 멈추고 저리 외쳤다. 방금 전까지 조심스럽게 의심하던 기색을 싹 지우고선.
어느새 호칭도 서준이에서 차 배우로 바뀌어 버렸다. 그 옆에선 경악했는지 김은중 작가가 입만 벌리고 있었고.
아마 이틀 전에 봤었던 박우형의 강록. 그 강록이 오늘 어린아이의 몸을 빌려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것처럼 느껴졌을 터였다.
“캬, 그러면 차 배우. 방금 내가 머리가 띵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거든. 그래서 나는 차 배우만 괜찮다면 어린아이가 된 강록 연기를 사람들이 1화를 통해 봤으면 싶은데. 차 배우 생각은 어때요?”
이렇게 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김학영 PD의 감은 꽤나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당장 나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호기심이 듬뿍 담겨 있었으니까. 심지어 다른 이들도 아닌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김학영 PD의 촬영 시작 외침과 동시에.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강록이 되었다.
*
“어? 이거 뭐야. 내 손이 왜 이렇게 작아. 시선은 또 왜 이렇게 낮고.”
차서준의 첫 대사를 듣는 순간.
‘어제 본 박우형의 강록이랑 똑같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입에서 소리 없는 탄성이 터졌다.
표정, 코를 살짝 찡그리는 습관, 마지막으로 뭔가 들짐승처럼 거칢이 느껴지는 분위기까지.
그저 어린아이의 모습만 되었을 뿐.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는 강록이 맞았다.
‘저게 가능해?’
‘아니. 저게 어딜 봐서 9살의 연기야. 그냥 30대 강록이 애 몸에 들어간 거지.’
‘이게 진짜 재능이란 거구나. 그냥 미쳤네, 미쳤어.’
모두가 말 없는 경악과 감탄을 담은 시선만이 차서준. 아니, 강록을 향했다.
“야, 너 일로 와봐.”
어린아이가 된 강록이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을 때. 골목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불량배 하나가 그런 강록을 불렀다.
“···.”
그런 불량배 부름을 무시한 채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작아진 자신의 손발을 훑는 강록.
“이 새끼가 형님이 부르는데. 너 인마···.”
“지금 몇 년도냐?”
그 날카로운 눈빛에 불량배가 순간 움찔한다. 그 반응을 보던 김학영 PD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거 연기 아니다. 진짜 강록이 된 차서준의 눈빛에 쫀 거지.’
아마 이 장면을 보는 시청자들도 저 눈빛에 매료될 것이 분명했다. 모니터 화면 너머로 보는 자신조차 그렇게 느꼈으니까.
“어, 어쭈. 이 새끼가 좀 맞아야···.”
퍽!
“억!”
비록 어린아이의 몸이 되었지만. 강력 범죄자들을 때려잡던 그 솜씨로 간단하게 불량배를 처리했다. 낭심 치기 한 방으로.
“새끼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까불고 있어.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원래의 몸이었으면 넌 진짜 죽었어.”
강록이 쓰러진 불량배의 몸을 발로 툭툭 차고 골목을 나서는 순간.
“오케이!”
김학영 PD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오케이를 외치고 말았다.
그제야 숨죽이고 있던 이들의 입에서 감탄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야, 잘할 줄은 알고 있었는데. 저건 좀 너무하네.”
“괜히 베를린에서도 나이만 있었어도 주연상을 받았을 거라고 한 게 아니었네.”
“나 소름 돋은 거 보여? 어제 박우형이 보여준 강록 그대로네. 저게 9살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라고?”
지금 눈앞에서 어느새 차서준으로 돌아와 방긋방긋 웃는 모습과. 방금 전 강록 그 자체를 보여주던 배우가 동일인이라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당장 눈앞에서 연기를 지켜보던 배우인 자신들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인데.
아마 TV로 차서준의 연기를 보는 사람들에게선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다시 방긋방긋 웃으며 촬영장의 분위기 메이커로 돌아온 차서준을 보던 김학영 PD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진짜 저 속에 30대 배우라도 들어 있는 거 아니야?’
어처구니없는 헛소리 같은 생각이긴 했다. 세상에 환생이니, 빙의니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존재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학영 PD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눈앞에서 보여주는 차서준의 강록 연기가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조연출부터 수십 작품을 촬영한 김학영 PD조차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김학영이. 이번에 너 제대로 사고 치겠는데?”
첫 촬영이라는 차서준의 연기를 구경하러 온 임정석 국장의 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수십 년의 경력 끝에 드라마국 국장까지 오른 임정석의 말이니 틀림없었다.
‘이번 드라마. 무조건 제대로 터진다.’
마치 대본처럼 강록이 어린아이의 몸에 빙의하면 저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표정, 작은 손가락 움직임 하나까지 강록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아마 첫 방송이 지나고 나면 저기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처럼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오케이! 좋았어요! 잠깐 쉬었다가 다음 장소로 이동합시다!”
스태프들이 촬영 장소를 옮기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때. 김학영 PD는 임정석 국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국장님. 방금 차서준 연기 보셨죠?”
“봤지. 내가 큰 실수를 할 뻔했네. 뭐? 차서준이 어른이 어린아이의 몸으로 들어간 연기를 어떻게 하냐고? 허참.”
현역으로 구르다 국장까지 오른 인물이 눈앞의 임정석 국장이었다. 그런 그조차 헛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차서준의 연기는 말 그대로 미친 연기나 다름없었다.
예상했던 임정석 국장의 반응을 보면서. 김학영 PD가 그의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슬쩍 용건을 꺼냈다.
“국장님. 아니, 형님. 이거 특별 편성 한 번 해주셨음 합니다. 이번에 제대로 사고를 칠 수 있습니다. 저 진짜로요.”
“무슨 내용 넣게?”
“일단 차서준의 연기는 최대한 감출 생각입니다. 시청자들이 화면으로 처음 만나 경악에 빠질 수 있도록요. 대신 방금 다른 카메라 한 대로 사람들의 반응들을 찍어놨습니다.”
잠시 그 말을 듣고 있던 임정석 국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해달라는 게 아니라 자신을 설득할 자신이 있어 준비한 것이었으니까.
“좋아. 한번 사고 쳐보자고.”
그렇게 ‘타임슬립’의 특별 편성이 결정되었다.
*
“서준아. 첫 촬영 때 제대로 보여줬다면서?”
“네. 삼촌이 그랬잖아요. 초반에 모두를 휘어잡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말을 실천하고 왔어요.”
“잘했다.”
내 연기가 만들어낸 바람이 제법 거센 폭풍을 만들어냈다.
“아직 첫 방송이 시작하기도 전인데. 특별 편성만으로도 벌써 그런 시청률이라니.”
NBC에서 작정하고 ‘타임슬립’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촬영장에서 강록을 연기하는 날 보고서 국장이 내린 결정이었다.
이제 남은 건.
첫 방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