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이토록 뜨거운 대본 리딩 현장이 있었을까. 마치 본 촬영이 시작이라도 된 것처럼 대사 하나하나를 내뱉는 배우들의 표정엔 집중력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학영 PD의 엉덩이가 들썩들썩 거린다. 아마 당장이라도 이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보고 싶겠지.
그 옆에 앉은 김은중 작가 역시 비슷했다. 촉촉한 눈을 한 채 오뚝이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
그저 막연한 상상으로만 꿈꿔오던 대사를 치는 배우들을 보면서. 애써 울컥 올라오고 있는 감동을 억누르는 듯 보였다.
“이걸 어디서 찾았다고?”
“버려진 시골집 창고. 거기에 놈이 숨겨두었던데.”
“하. 자기 마을도 아니고. 수십 킬로나 떨어진 마을 폐가에다가 숨겨놨다라. 그러니 기를 쓰고 찾아봐도 없었지.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찾았는데?”
“감으로. 만약 내가 당시의 범인이었다면 과연 증거품을 어디에 숨겼을까. 이렇게.”
박우형이 상대역과 대사를 주고받는 동안. 나는 찬찬히 배우들의 얼굴을 살폈다.
누군가는 처음 참석한 대본 리딩 현장에 긴장한 듯 보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예상과 다른 빡빡한 분위기에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절실함’
배우 차서준과 박우형이 재결합한 드라마다. 이미 차서준 효과는 내가 출연하지도 않은 김우승의 ‘꿈속의 당신’으로도 충분히 보여준 상태.
저들에게 있어 ‘타임슬립’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에게 배우로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야이 새끼야! 너는 형사라는 새끼가 어디 나자빠져 있다가 온 거야! 너 또 어디 처박혀서 자다 왔지?”
“저는요. 누구처럼 뒷돈 받아 처먹거나, 접대를 받아서 미리 단속 정보 흘리고 그러지 않습니다. 씨발, 형사로서 가오가 있지.”
“저, 저 자식이! 야 인마! 너 일로 안 와!”
대본 리딩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갈수록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었다. 마지막 언쟁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대사를 내뱉는다.
메이킹 필름 카메라가 그 모습들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담아두고 있었다. 저 장면은 앞에서 ‘크으. 이거지.’ 하고서 몸을 떠는 김학영 PD가 훌륭히 편집할 터였다.
잠시 후.
대본 리딩이 모두 끝났다.
누구는 다 쏟아냈다는 만족감에 미소를. 또 누구는 혹여나 실수를 하지 않을까 걱정에 땀을 뻘뻘 흘렸던 모습들이 보인다.
이번에도 그 장면들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가 끝까지 모두 담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우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한다. 마치 방금 전까지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처럼.
그렇게 배우들이 하나둘 퇴장을 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와 박우형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그 손길의 주인은 이번 드라마의 연출을 맡은 김학영 PD였다.
“차 배우랑 우형 씨는 잠깐 이야기 좀 더 나눌 수 있을까? 길게는 안 잡을 테니 잠깐만.”
“네. 저는 괜찮아요.”
“저도 시간 괜찮습니다.”
사실 김학영 PD가 잠깐의 시간을 요구한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대본 리딩에는 내 분량이 없었으니까.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모두 된 부분이지만. 막상 대본 리딩을 하는 동안 내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염려한 것이다.
우리끼리 남자 김학영 PD가 내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차 배우. 혹시 섭섭하거나 그렇진 않지? 미리 말하긴 했다지만 아무래도 이게 배우의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전혀. 아마 내가 정말 9살 나이의 배우였더라면 김학영 PD의 우려처럼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배우란 분량에 대한 욕심이 그득한 존재들이었으니까.
아마 이번 대본 리딩 메이킹 영상이 업로드되고 나면. 분량이 없는 차서준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빠진 덕분에 그 시선을 다른 배우들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걸 다들 알고 있는지라 오늘 이를 악물고 임했던 것이고.
“괜찮아요 감독님. 오히려 사람들은 궁금해할 테니까요. 어? 왜 차서준이 안 나왔지? 이러면 무조건 본방을 봐야겠는데? 이렇게요.”
내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삼키는 김학영 PD였다.
사실 메이킹 영상으로 대본 리딩 현장을 공개하는 건. 아무래도 드라마 홍보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타임슬립’은 홍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이미 편성 단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나와 박우형의 재결합. 이 하나만으로도 그 어떤 방법보다 더 큰 홍보가 되었을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김학영 PD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 하나를 생각해낸 것이다. 이번 대본 리딩에서 배우 차서준을 숨기자고.
“이해해줘서 고마워. 차 배우도 알다시피 이게 과거 시간대로 간 어린아이가 된 강록이 등장하면서부터 팡! 하고 터지는 부분이잖아. 나는 시청자들이 차 배우의 그 연기를 TV로 처음 봤으면 하거든.”
감독과 작가는 이미 확인한 참이었다. 박우형에게 제안을 하던 순간부터 대본 분석에 들어간 나였다.
얼마 전 김학영 PD와 김은중 작가와 함께 미팅을 가지면서 보여주었다. 어린아이가 된 강록의 연기를.
그걸 본 김학영 PD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차서준을 숨기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내가 차 배우의 강록 연기를 직접 봤으니 확신할 수 있다니까. 아마 방송 끝나고 나면 반응들이 미칠 듯이 터질걸.”
김학영 PD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메이킹] 소문의 그 드라마. ‘타임슬립’의 뜨거웠던 대본 리딩 현장 공개!
└ 미쳤네 ㄷㄷ 사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많아서 의아했는데. 막상 영상 보고 나니까 왜 뽑았는지 알겠더라. 다들 연기력이 끝내주는데?
└ 저게 어떻게 대본 리딩이냐고. 점점 지날수록 완전 본 촬영이나 다름없던데. 이렇게 빡빡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대본 리딩 현장은 또 첨이네. ㅋㅋㅋㅋ
└ 사실 차 배우랑 박우형이 전부가 아닐까 싶었는데. 영상 보고 나니까 꼭 본방 사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이게 형사 드라마지. 매번 남자 형사, 여자 형사 나와서 사랑에 빠지는 게 무슨 형사물임. 분위기며 긴장감이며 모두 미쳤다!!!
└ 정신 차려보니 30분이 후다닥 지나가 버렸음. 대본 리딩만으로도 이런데. 본방 시작되고 나면 매일 수, 목만 기다리겠네요. ㄷㄷㄷ
무려 30분짜리 메이킹 영상이었다. 중요 포인트 부분만 편집되었다곤 하지만. 긴 시간만큼 많은 대사들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어때?”
박우형이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던 내게 물었다.
“끝내줘요. 무슨 대본 리딩이 아니라 실제 촬영하는 게 아니냐고 놀라던데요? 특히 형의 강록과 이주영의 연기가 끝내준대요.”
박우형의 연기력이야 말해봤자 입만 아플 테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다른 배우는 바로 이주영을 연기한 배우였다.
비중 있는 캐릭터들을 모두 오디션을 통해 뽑았다. 특히 강록의 친구인 이주영은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인지라 지원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지원자들 중에는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도 있었지만. 최종 합격한 배우는 정작 듣는 이들조차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신인이었다.
정확히는 몇 년 동안 조연, 단역들을 전전한 이름 없는 중고 신인. 아마 이번 기회를 통해 제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질 터였다.
“그보다 서준이 네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고 있을 것 같은데.”
박우형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듯 말한다. 그리고 저 말처럼 실제 메이킹 영상의 댓글들엔 나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 어? 근데 차 배우는 이번 대본 리딩에서 아무 분량도 없네요? 왜지? 우리 차 배우 보려고 왔는데 없어서 실망이네요. ㅠㅠ
└ 그러게요. 메이킹 영상 공개되었다기에 무조건 우리 차 배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스쳐지나가듯 얼굴은 나오는데 대사 치는 모습은 하나도 없네요.
└ 이미 기자들도 그 떡밥 물고 기사 쓰기 시작했음. ㅋㅋㅋ 연예부 기자들 한동안 일하기 편하겠네. 우리 차 배우 기사들만 주구장창 쓸 테니까.
└ 이러면 1화를 안 볼 수가 없었네요. 이번에는 같은 사람인 강록을 박우형과 같이 연기하는 거니까. 영상 속의 강록처럼 차 배우가 연기를 한다는 건데. 상상이 되질 않아요.
└ 차 배우의 연기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정말 기대가 되어서 못 기다릴 것 같음. 9살의 몸으로 보여줄 형사 연기는 어떠려나. ㄷㄷ
김학영 PD의 예상처럼. 대사 한마디 내뱉지 않은 나에게 서서히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무려 30분짜리 메이킹 영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 차서준의 대사 한 마디가 없었으니.
대본 리딩 영상이 공개되었다는 소식에 한 걸음에 달려온 내 팬들이라면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맞아요. 왜 영상에 제가 없냐고 말이 많아요.”
“확실히 감독님 말처럼 좋은 홍보 수단이네. 어차피 주인공인 강록에 서준이 너와 내가 있다는 거야 알려진 사실이고. 사람들은 왜 다른 시간대의 같은 강록을 연기할 서준이가 안 나왔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테니까.”
만약 기대에 못 미치는 연기를 보여준다면 사람들의 비난이 이어지겠지만. 박우형의 얼굴에는 걱정이 티끌만큼도 보이질 않았다.
다른 배우도 아닌 나였으니까. 이미 박우형에게 제안을 한 시점부터 수도 없이 대본 분석을 들어갔던 우리다.
만약 부족한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박우형이 저렇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니라 맹훈련에 돌입했겠지. 내가 김우승에게 했던 것처럼.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첫 방송이 나가고 나면. 또다시 실시간 검색어에 서준이 네 이름이 도배될 거다.”
마치 반드시 일어날 미래를 예견이라도 하듯. 박우형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채널을 돌리던 하준이의 손가락이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멈춘다. 영화 채널에서는 익숙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OST가 나오고 있었다.
응? 저건?
할리우드 영화였다. 정확히는 시리즈물 영화. 하준이가 멈춘 영화 채널에서는 월드 코믹스의 히어로 영화 중 하나가 나오고 있었다.
“하준이 대사 알아들을 수 있어?”
“아니!”
분명 영어로 말하기에 하준이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막이 한글로 나온다지만 하준이가 이해하기엔 아직 어렸다.
허나 히어로 영화의 화려한 액션이 좋은지 하준이는 멍하니 보고 있었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김도경 시절과 다르게 이곳 세상에서는 몇 년 더 늦게 히어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저번에 ‘세이버스’가 천만 관객을 넘어섰다고 했던가. 앞으로 최소한 몇 년간은 더 월드 코믹스 영화가 전성기를 맞이하겠는데?”
3년을 쌓아올린 1페이즈의 마지막 영화이자. 그간 나온 히어로들이 총집합한 영화 ‘세이버스’의 관객수가 천만 관객을 돌파해버렸다.
김도경 시절에는 3페이즈 영화들까지 대박 행진을 이어갔으니. 이제 2페이즈 시작을 앞두고 있는 월드 코믹스의 히어로 영화 강세는 몇 년간 더 이어질 터였다.
“하준이 저거 재밌어?”
“엉! 엉아도 저기.”
“형도 저기 나왔으면 좋겠다고?”
“응!”
아직 영어라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하준이는 화려한 액션의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가 재밌는 모양이었다.
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CG 기술은 마치 만화를 현실로 옮겨놓은 것 같았으니까.
거기에 형도 저기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하기까지. 나는 그런 하준이를 무릎에 앉히고 같이 영화에 집중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기회가 온다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며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