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나는 오랜만에 박우형의 집을 찾았다. 매번 연사모 형들과 모일 때에는 김우승의 집에서 만났으니까.
최근 영화 촬영을 마친 박우형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참이었다. 오전부터 놀러 가도 되냐는 문자에 1초 만에 답장이 왔다. 당장 오라고.
“형.”
“응?”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쉬고 있었지.”
이 형이 항상 이러면 정말 좋을 텐데. 이제부터 시작해야 할 이야기를 생각하면 아찔했지만.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꺼낼 수밖에 없었다.
‘타임슬립’이 성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나와 함께 주인공인 강록을 연기할 주연 배우의 연기력이 생명이었다.
시청자들을 채널 고정 시키게 만들기 위해선 주연 배우들의 연기 차력 쇼가 필수였으니까. 그런 강록의 역할에 딱 어울리는 배우가 내 눈앞에 있었다.
그러니 그곳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라도 뛰어들어야지. 저 불길이 의미하는 바가 성공임이 분명했으니까.
“형. 요즘 대본이나 시나리오 많이 들어오죠?”
“그렇긴 한데. 갑자기 왜? 혹시 무슨 좋은 작품이라도 들어왔어? 나한테 추천해주고 싶을 만큼 좋은 거라도?”
느껴진다. 서서히 꾸욱 눌러지는 박우형의 ‘연기’ 버튼이. 단답에서 조금씩 길어지는 말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박우형의 변화를 느끼면서. 나는 박우형이 솔깃할 만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가 진짜 끝내주는 대본 하나 찾았거든요. 그런데 마침 딱 형이 생각나지 뭐예요.”
“정말? 잠깐만.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최소한 서준이 네 기준을 통과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정말 기대해볼 만한 대본이란 뜻인데. 혹시 지금 가지고 왔어?”
“네. 심지어 저는 이미 출연을 결심했어요.”
“···정말?”
심지어 박우형만을 위해서 가져온 대본이 아니라. 내가 같이 작품을 하고 싶어 가져온 거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두 눈에 번쩍 불이 들어온다.
나와 함께 차기작을 찍어보면 어떻겠냐는 말에. 박우형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대본을 달라 재촉했다.
“그렇다면 서준이 너와 함께 작품을 할 수 있다는 뜻인데. 이거 더 이상 못 참겠다. 일단 대본부터 확인하고 이야기해보자.”
서서히 길어지기 시작하는 박우형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가방 속에 가져온 미끼를 꺼냈다.
미끼를 흔들 필요도 없었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서 본 물고기처럼 박우형이 재빨리 대본을 가져간다. 그러더니 묵묵히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스륵스륵. 조용히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정신없이 움직이는 박우형의 눈동자만이 보인다.
대본을 넘기는 손동작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대본에 제대로 몰입한 모양. 한참을 내가 건넨 대본들에 파묻혔던 박우형이 마지막 장을 넘긴 순간.
박우형의 고개가 번쩍 나를 향한다.
“이거 솔직히 말해서 서준이 네가 아니라면 제작 자체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디서 제작하려고 한다고?”
“NBC요.”
“지상파라. 그렇다면 특히나 더 그렇겠네. 아, 이거 옛날에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한 2년 전쯤이었던 거 같은데. 그때는 강록이라는 캐릭터가 지금처럼 매력적이질 못했거든. 그래서 바로 고개를 저었는데. 이거 작가가 제대로 이를 갈고 수정한 모양인데. 무엇보다 내용이 재밌다.”
역시나 박우형이었다. 연기에 미쳐 살고 있는 박우형이 극본 공모전에서 우수상까지 받았던 대본을 보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며칠 전 만났던 김은중 작가도 저런 말을 했었다. 처음 공모전에 제출했었던 ‘타임슬립’의 강록은 지금의 강록과는 달랐다고.
초기 버전의 ‘타임슬립’는 박우형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그 나비효과로 지금의 ‘타임슬립’이 완성되었고. 내가 박우형에게 같이 해보자 제의하고 있었다.
“이거 왜 지금까지 제작이 안 되었는지 알겠다. 일단 내용 자체가 대중적이질 못하네. 거기에 형사라는 주인공의 직업도 그렇고. 시간대를 오간다는 설정이 제작비는 많이 들어가지만. 아무래도 광고를 넣기에는 제한이 걸릴 수밖에 없어 보이네.”
“그렇죠? 아무래도 방송국에서 별로 좋아할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긴 해요.”
내 말에 박우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왜 내가 자신에게 대본을 가지고 왔는지 알아차린 모양.
차서준 혼자의 이름만으로도 어찌어찌 편성을 노려볼 만은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뭔가 확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했다.
마치.
“서준이 너 이거 차서준과 박우형의 재결합. 이렇게 화제성을 가져가려고 하는구나.”
정답. 아무래도 초반에 최대한 많은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데려오기 위해선. 나와 박우형의 이름값이 필수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맞지만. 형이랑 같이 작품 하나 하고 싶었어요. 이거 대본을 보자마자 어? 이거 우형이 형이랑 하면 정말 재밌겠는데? 이 생각부터 들었거든요.”
박우형과 같은 작품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으니까. ‘타임슬립’의 대본을 읽는 순간부터 박우형이 떠올랐다.
우형이 형이랑 하면 정말 재밌겠는데? 이 생각부터 떠올랐기에 김은중 작가를 만났을 때에도 박우형을 언급한 것이다.
“정말?”
“네. 그렇지 않았으면 형에게 이렇게 가지고 오지도 않았을걸요.”
박우형의 입꼬리 서서히 올라간다. 안 그래도 기회가 되면 자신과 함께 작품 하나 찍자고 수도 없이 말하던 참이었다.
다만 이제 주연급으로 올라선 나와 함께 해볼 만한 작품이 별로 없어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매번 아쉬워만 했는데. 때마침 촬영이 끝나고 휴식에 들어간 자신의 스케줄과 딱 맞는 대본을 내가 가지고 온 것이다.
“안 그래도 폭군의 세자 이후 서준이 너와 꼭 한 번 하고 싶었는데. 매번 기회가 없어서 정말 아쉬웠거든. 그런데 이렇게 기회가 생기다니. 이렇게 너랑 내가 타이밍이 딱 맞기도 정말 어려운 거거든. 그래. 한 번 서준이 너와 함께해보자.”
“좋아요 형.”
나와 박우형이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평소에 연기에 대해 장황한 연설을 할 때면 좀 미운 형이지만. 이렇게 같이 작품을 한다했을 때 이보다 더 든든한 배우는 없었다.
“그런데 이거 언제부터 촬영 들어갈 예정인데?”
“아, 그건 형도 하겠다는 말을 했으니. 삼촌이랑 방송국 측이 조율할 거예요. 이제 형이 찍은 영화도 개봉을 앞두고 있으니. 그것도 신경 써야 되잖아요.”
“그렇지. 마침 잘됐다. 기왕 하기로 한 거 지금부터 캐릭터 분석을 해보자. 이미 마지막까지 대본도 다 나왔겠다. 이거 완전히 대본을 연구하기에 딱 좋네. 서준이 너 오늘 할 일 없지?”
응? 우형이 형. 어디 가세요.
이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디선가 펜까지 챙겨오는 박우형을 보면서. 혹시 내가 가면 안 될 곳에 스스로 몸을 던진 게 아닐까. 이런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날 나는 박우형을 얻고 밤늦게까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박우형과의 이런 대화가 나쁘진 않았다.
*
언제나 집에 돌아오면 격렬하게 나를 반겨주는 가족들이 있었다.
“엉아!”
“엉!”
바로 사랑스러운 동생 하준이, 하윤이. 동생들은 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빨리 안아달라는 듯 손을 뻗는다.
“하준이, 하윤이. 엄마 말 잘 듣고 있었어?”
“응.”
“엉.”
이제 하준이는 말귀를 알아듣고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하윤이는 아직 잘 모르지만 오빠를 따라 했다.
“바깥에 나갔다 오면 항상 손 씻어야 된다고 엄마가 그랬지? 지금 손 씻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올망졸망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들을 두고선. 손을 씻고 엄마를 찾았다.
“엄마. 다녀왔습니다.”
“우리 서준이 잘 갔다 왔니?”
“네. 제가 동생들 돌볼 테니까 조금 주무세요.”
“고마워 서준아.”
어젯밤 하윤이 칭얼거리며 잠을 통 자질 않았다. 하준이는 이제 오빠가 되었다고 제법 의젓하게 있었지만. 결국 새벽 늦게까지 하윤이를 달래야만 했던 엄마였다.
거실로 나가니 기다리고 있던 동생들이 나를 부른다.
“엄마가 주무실 동안 우리끼리 놀고 있을까?”
“응!”
“엉.”
보자. 동생들과 1 무얼 하며 놀아줘야 할까. 따로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엉아. 나 티비.”
“동동이 친구들 틀어달라고?”
“응.”
‘동동이 친구들’은 최근 아기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애니메이션이었다.
-함께 떠나요 동동동 세상~ 우리 함께 모두 함께 동동동~
“동동동!”
“옹옹옹!”
제법 또렷하게 발음하는 하준이와, 어떻게든 따라 하고 싶어 하는 하윤이. 그런 두 동생들을 보는 내 입가엔 미소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하윤아. 저게 그렇게 재밌어?”
“···.”
이런. 대답이 없다. 평소라면 큰 오빠가 부른다면서. TV를 보다가도 재빨리 고개를 돌리던 하윤이었는데.
지금 하윤이의 두 눈동자에는 오로지 동동이 친구들뿐이었다. 그 모습이 귀엽다가도 아주 쪼끔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하준아?”
“···응?”
그것은 하준이 역시 마찬가지. 그래도 형이 부른다고 잠깐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다시 시작된 ‘동동이 친구들’ 노래 시간에 하준이와 하윤이가 덩실덩실 몸을 흔든다.
-오늘은 바다로 떠날 거예요. 친구들 우리 함께 파도가 출렁출렁 치는 바다로 가요!
“바다!”
“아우!”
응? ‘동동이 친구들’을 보고 있던 하준이가 나를 콕 찌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TV 속 바다로 떠난 동동이들에게 눈이 반짝반짝하는 하윤이가 보인다.
그걸 보니 하준이가 왜 나를 콕 찔렀는지 이해가 갔다. 누구보다 물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윤이었으니까.
“하윤아. 바다에 가고 싶어?”
“엉.”
아마 알아듣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눈만은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바다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하윤이가 실제로 바다를 보면 얼마나 좋아하려나.
“바다.”
“하준이는 바다 본 적이 있지?”
“응.”
안 그래도 작년 중순에 엄마, 아빠, 하준이와 함께 바다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 모래사장에 들이치는 파도를 보면서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동동이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하윤이가 눈에 들어왔다.
“하준아. 하윤이랑 엄마, 아빠랑 바다 보러갈까?”
“응!”
아무래도 조만간 시간을 내서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들이랑 가까운 바다라도 다녀와야 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주머니에 넣어둔 내 핸드폰이 울렸다.
이 번호는?
“안녕하세요.”
- 그래 서준아. 나 누군지는 알지?
“네! 윤진 선생님이시잖아요.”
그랬다. 배우 차서준이 아닌 가수 차서준으로 첫 음악 방송에 출연했었던 ‘윤진의 뮤직 박스’.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던 윤진이 전화를 한 것이다.
- 혹시 잠시 통화 가능할까?
“네. 지금 전화 가능해요. 집에서 동생들이랑 놀고 있었거든요.”
무슨 일일까? 당장 생각나는 건 저번 ‘윤진의 뮤직 박스’에 출연했을 때의 대화가 떠오른다.
첫 노래로 영화 목소리의 주제곡 'GOOD BYE'를 부르자마자 윤진이 내게 했던 제안.
동생들을 위해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는 내 말에 조카를 위해 만들어둔 곡 하나가 있다면서. 꼭 한 번 작업 같이 하자던 윤진의 신신당부가 생각났다.
- 전에 뮤직 박스 촬영했던 날. 서준이랑 잠깐 이야기했던 것에 대해 말을 좀 하고 싶은데. 내가 조카를 위해 만들어두었단 노래 있잖아.
“아, 저는 선생님과 같이할 수만 있으면 정말 영광일 거 같아요. 특히나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라면 동생들도 정말 좋아할 거 같거든요.”
- 그래? 잘됐네. 그러면 이번에 만든 곡을 동동이 친구들이란 어린이 프로의 시즌 주제곡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어. 서준이만 수락한다면 확정이나 다름없고.
“네? 어디요?”
수화기 너머 윤진의 말이 들려온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윤진의 입에서 나온 ‘동동이 친구들’이 무엇이던가. 하준이와 하윤이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보고 있는 방송이었다.
그런 ‘동동이 친구들’의 다음 시즌 주제곡이라니. 저 말을 듣는 순간 상상이 되었다.
내가 부른 ‘동동이 친구들’ 주제곡에 덩실덩실 신나 하는 하준이, 하윤이의 모습이.
그러면.
무조건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