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겨울이었다. 3년 전 NBC 극본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차지했을 때만 하더라도 봄이 온 줄만 알았더랜다.
수상 이후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을 하면. 상상으로만 꿈꿔왔던 강록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질 수 있을 줄만 알았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김은중은 작가 지망생일 뿐이었다.
“은중아. 언제까지 고집만 부릴 건데. 너 요즘 알바까지 한다면서.”
“그러게. 머리로는 수용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가슴이 자꾸만 거부해.”
“누가 작가 아니랄까봐 고집은. 너 요즘도 대본 완성도 높이겠다면서 수정 작업하고 있다면서. 대체 왜 방송국 제안을 거부하는데?”
형사물. 그것도 시간대를 오가며 미제 사건을 푸는 이야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냥 눈 딱 감고 러브라인 넣자. 강록에다가 운명적인 캐릭터 하나 붙여주면 되잖아. 걔가 좋겠네. 강록의 친구 이주영. 마침 이름도 여자 느낌 나잖아.”
김은중의 작품 ‘타임슬립’에는 방송국에서 좋아할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만약 김은중이 검증된 드라마 작가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입봉작을 준비하는 작가에게 도박을 베팅하려는 피디는 없었다.
“너도 읽어봤으니 알잖아. 이 작품의 생명은 긴장감과 반전이야. 여기에 사랑 이야기가 들어가면 분위기가 무너져.”
“지금 니 인생이 무너지게 생겼는데! 으휴. 됐다, 말을 말아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친구는 김은중의 잔에 술을 따랐다.
“나 솔직히 이거 만들어만 질 수 있으면 대박 날 거 같거든? 그저 내 착각인 걸까?”
김은중의 그 말에 친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이 미련하고 곰 같으면서도. 고집만은 꺾을 줄 모르는 모습 때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단 성공하고 하면 되지 않던가. 왜 이리 쇠심줄 같은 고집을 부리는 건지.
“됐다고. 3년을 고집부렸는데. 이제 와서 꺾는 것도 웃긴 일이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혹시 알아? 갑자기 어떤 배우가 네 대본의 진가를 알아보고 연락해줄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희망이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작품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고 연락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이.
하지만.
말 그대로 헛된 희망이었다.
그때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김은중의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뜬 것은.
“네. 김은중입니다. 네네. 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소리에. 김은중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
대본을 읽은 뒤. 나는 ‘타임슬립’의 작가를 만나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서도현은 연락을 하자마자 작가에게서 당장이라도 만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렇게 만나게 된 자리였다. 문이 열리고 주눅이 든 한 남자가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아역 배우 차서준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김은중입니다.”
내 인사에 김은중이 존대와 함께 고개 숙여 인사한다. 30대 작가와 9살 아역 배우의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본다면 마치 반대의 입장처럼 보일 터였다.
자기소개에 작가라는 단어가 붙지 않는다. 거기에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현재 그의 심경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 앉으세요. 작가님이랑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연락드렸는데.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오늘 왜 저와 만나고 싶다고 말했는지···.”
혹시나 하는 기대감. 애써 가라앉히려고 하는 흥분.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혼란.
그런 김은중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작가님의 대본을 보고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네?!”
그와 동시에 앉아있던 김은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마치 로또 1등에 당첨된 소식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자신의 대본을 봤다. 그리고 만남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 말들이 뜻하는 바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특히나 지난 3년간 애타게 자기 작품이 드라마 제작되기만을 꿈꿔왔던 작가라면 더욱더.
“서, 설마 지금 제게 하는 말이···.”
“대표님이 대본을 구해주셔서 읽어봤는데. 대체 이렇게 좋은 작품이 왜 아직까지 제작되지 못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서서히 커지는 눈동자. 그럼에도 아직 흥분하면 안 된다고 다독이는 듯한 김은중의 모습은. 그가 지난 3년간 어떤 세월을 보내왔는지 짐작케 했다.
“저희 대표님께 ‘타임슬립’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어요.”
“네.”
김은중의 표정이 복잡하다. ‘만약 여기서 차서준도 방송국과 같은 요구를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엿보인다.
“1화부터 마지막까지 읽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왜 작가님이 지금까지 꺾지 않고 계속 지켜 오셨는지에 대해서요.”
“아.”
처음이었을 거다. 누군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토록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한다는 것이. 모두가 고개를 저으면서 수정을 하자는 말만 했을 것이다.
특히 NBC에선 대대적인 수정을 해야만 드라마 제작이 가능하다고 말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작가가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건.
“작가님은 러브라인을 넣거나. 지금 있는 캐릭터들을 바꾼다면 아예 다른 작품이 될 거라 생각하신 거죠?”
끄덕끄덕. 입을 멍하니 벌린 김은중이 말없이 고개를 움직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대본을 읽은 소감을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 쌓인 강록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건 더 이상 형사 강록이 아닐 테니까요. 제가 느낀 강록이란 캐릭터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마, 맞습니다. 사실 3년 전에 공모전에서 당선 이후. 그런 제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내용은 너무 건조하다. 이대로라면 소수의 팬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대중적인 성공은 어렵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정답이기도 했다. 특히나 지상파에서 드라마 제작을 노린다면 특히나 더.
그들만의 인생 드라마라는 말이 있다. 소수의 사람들에겐 역대급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정작 시청률은 한 자리 중에서도 처참한 결과를 보여주는 드라마가.
방송국에서도 ‘타임슬립’이 그런 드라마가 될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네.”
“작가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5작품을 찍는 동안 성공만을 만들어냈어요. 그런 제가 작가님께 성공을 위해 대대적인 수정을 요청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비록 제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되지 못할지라도. 그 부분들만큼은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의 크기를 엿볼 수 있는 답변이었다.
김은중의 얼굴에는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지 오래였다. 처음 내 말에 보였던 흥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보였다.
방금 내 말을 듣고선. 나 역시도 지난 3년간 수없이 들었던 말처럼 바꿔야 승낙할 거라 생각할 테니까.
“작가님의 작품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어서 좋네요. 그래서 저는 작가님과 함께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
“말씀드렸다시피 수정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김은중은 자신의 작품을 지키려 했다.
방금 전까지 기적의 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표정이. 어느새 쓰디쓴 사약을 앞둔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뇨. 저는 지금 작가님께서 생각하신 그대로가 최고라고 생각해요. 수정 없이 작가님의 작품을 함께하고 싶은데요.”
내 말이 이어질수록 김은중의 눈이 서서히 커진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을 테니까.
대본을 수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그대로여도 좋다. 여기까지 들은 김은중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아마 지금 김은중의 머릿속에는 아역 배우 차서준에 대한 정보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방금 전에 내가 말했던 5작품 연속 성공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
“왜 저와 함께···. 저는 아직 보여준 적도 없고. 또 오랫동안 공들였다곤 하나 이게 첫 작품인데요. 혹시나 저 때문에 실패라도 하면···.”
“에이. 작가님 이름값이 뭐가 중요해요. 중요한 건 지금까지 작품에 애정을 놓지 않은 작가님의 마음과. 그리고 훌륭한 대본이 아니겠어요?”
김은중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옆구리를 콕 찌르기만 하더라도 왈칵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일단 작가님만 제가 괜찮다고 하시면. 대표님께 말씀드려서 NBC 측과 조율을 해보려고 하는데.”
“···.”
잠시 돌아오는 말이 없다. 방금이라도 쏟아낼 것 같이 습기가 차오르던 눈동자를 벅벅 닦은 김은중이 잠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처음이었습니다.”
“네?”
“누군가가 제 작품을 인정해준다는 것이. 항상 안 될 거라고. 포기하라는 말만 들었거든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김은중을 보면서.
“에이. 이제부터 어디 가서든 작가님 소리를 듣게 되실 텐데요? 저와 함께 기적을 만들어 봐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작가님. 강록 역에 배우 박우형은 어때요? 제가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강록에 누구보다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김은중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
NBC 드라마국. 올해 새로 취임한 임정석 국장이 미간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만 두들기고 있었다.
눈앞에 가져온 계획서는 복권이었다. 긁어보기 전에는 당첨인지 꽝인지 알 수 없는 복권.
문제는.
그 복권을 확인하기 위해서 써야 하는 제작비가 적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구름엑터스의 서 대표가 먼저 넌지시 말을 꺼냈다고?”
“네. 저도 사실 한참 전부터 이거가 땡기긴 했는데. 아시다시피 조건들이 안 맞았잖아요. 그런데 차서준만 들어오면 그 조건들 다 해결됩니다.”
김학영 PD의 말에. 테이블을 두들기는 임정석 국장의 손가락이 빨라졌다. 그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너 이거 정말 자신 있어?”
“형님. 아니, 국장님. 우리도 이제 차서준 효과 한 번 볼 때 되지 않았습니까. 저 한번 믿어주십시오.”
누구보다 오랫동안 지켜본 김학영 PD였기에 믿음이 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차서준 효과 좋지. 5작품 연달아 히트시키고. 또 마지막으로 찍은 영화도 지금 엄청난 성적을 거두고 있으니까. 근데 그게 뭘 뜻하는지 알지?”
“양날의 검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것도 슬슬 이쪽을 향해 떨어질 순서가 된 양날의 검.”
세상에 계속해서 성공만 거두는 배우는 없다. 당장 S급을 넘어 해외에서도 뜨거운 인기를 얻는 한류스타 배우들조차 몇 번씩 미끄러지곤 했다.
그것은 현재 성공 신화를 써내려가는 차서준 역시 마찬가지일 터. 한 번의 쓰디쓴 실패를 경험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임정석 국장은 그걸 염려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신임 국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
그런 상황 속에서 차서준을 데려와 말아먹는다?
“너 이거 도전해서 말아먹으면. 너만 끝나는 게 아니라 나도 같이 끝나. 나 이 자리에 앉은 지 몇 달도 안 지났다.”
그 책임이 국장인 자신에게까지 올라올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진지하게 고민을 계속하게 되는 건. 그만큼 너무나도 매력적인 제안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이거 말고 차라리 안정적인 걸로 가면 어떠냐? 차서준만 있으면 기본 시청률은 보장될 텐데.”
“그런 대본이면 차서준이 오려고 할까요? 당장 서도현 대표 선에서 거절당할 거 같은데.”
“흐음.”
저 말도 맞았다. 이제 고작 데뷔 3년차. 그것도 아직 나이가 9살이란 것도 놀라운데. 이미 차서준은 S급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었다.
실제로 5작품을 연달아 성공 그 이상의 성공을 시키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고.
이미 대본이며, 시나리오며 쏟아지고 있는 상황인데. 그런 차서준을 데려오려면 ‘특별함’이 있어야만 했다. 김학영 PD가 가져온 대본처럼.
문제는.
“좋아. 네 말처럼 어떻게든 설득해서 데리고 온다 치고. 차서준이 이거 배역 소화 가능하겠어? 지금까지 보여준 연기와 궤를 달리해야 하는데?”
‘타임슬립’의 주인공은 30대 후반 베테랑 형사. 그 형사가 시간대를 이동해 어린아이가 되었어도 시청자들이 보기엔 30대 강록이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임정석 국장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차서준이 30대가 어린아이로 빙의한 연기를 소화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