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어? 이상하다. 한번 읽어보라면서 서도현이 건넨 대본의 양이 제법 많다. 이 정도면 거의 완결까지 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두께였다.
“삼촌. 혹시 대본이 완결까지 나왔어요?”
“정확하게 봤네. 완결까지 다 나왔다.”
신기했다. 보통 아역 배우를 주연으로 쓰는 대본이 완결까지 나오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거기 맨 위에 있는 게 시놉시스니까. 그것부터 간단하게 확인해보렴.”
제목 ‘타임슬립’, 작가 김은중. 여기까지 확인한 내 고개가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데뷔 3년차 배우가 된 나는 그동안 많은 공부를 해왔다.
그 결과 잘 쓴다 하는 드라마 작가들의 이름은 거의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처음 보는 이름이지?”
서도현이 내게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네. 이제 유명한 드라마 작가님들은 거의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처음 봤어요.”
“그럴 거다. 그게 입봉작인 작가거든. 그러니 서준이 네가 들어본 적이 없을 수밖에.”
“이게 입봉작이라고요?”
“그래.”
서도현의 입봉작이라는 말에 다시 한번 고개가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지만. 왜 이걸 추천하느냐는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 물밀듯이 작품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직 데뷔조차 하지 못 한 작가의 작품을 추천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거기에 대본이 완결까지 나왔다는 말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의 대본 퀄리티가 보장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일단 삼촌은 그거 받고 나서 정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읽었어.”
“와. 삼촌이 그럴 정도면 정말 재미있나 봐요. 그런데 완결까지 대본을 완성하고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아요? 거기다가 입봉작인데.”
내 말에 서도현이 그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읽어보면 삼촌이 왜 서준이 네게 추천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완결까지 대본이 나온 이유는 간단해. 그거 꽤나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대본이거든.”
빛을 보지 못 했다라. 그럼에도 내게 추천을 해줄 만큼 정말 대본에서 재미를 느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서도현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대본이 NBC 극본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당선되었던 작품이었는데. 3년째 제작 편성을 받지 못했어. 그동안 작가는 완결까지 대본을 완성했고.”
“왜요? 완결까지 나온 대본에 우수상이면 충분히 해볼 만할 거 같은데요.”
“대본을 보면 알겠지만. 거기엔 어떠한 러브라인조차 없거든. 심지어 주연이 모두 남자. 그러니 방송국 측에서는 선뜻 손이 가질 않는 거지.”
서도현의 말을 듣는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상파 드라마에서 ‘러브라인’을 뺀다는 건. 그만큼의 메인 시청자 파이를 포기하고 들어간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거기에 주연 배우들을 남자들만 쓴다는 건. 받을 수 있는 광고에도 제약이 크게 걸린다는 뜻이었다.
“작가님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깊으신가 봐요.”
“그렇지. 그리고 보통 그런 작품은 원석일 가능성이 높고.”
이미 우수상 수상 이후 완결까지 대본 집필을 마쳤다는 건. 작가의 작품을 향한 사랑이 깊다는 의미기도 했다.
작품을 향한 애정이 클수록 오히려 세속과 타협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완결까지 나온 대본이 지금까지 빛을 보지 못한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거 형사물이네요?”
“그래. 그 덕분에 더 묻혀있을 수밖에 없었지.”
형사물이란다. 자세히는 보지 않았지만 시놉시스를 잠깐 살펴본 결과. 현대와 과거를 넘나드는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려면 제작비 역시 만만치 않게 들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과거를 배경으로 촬영할 때에는 PPL 역시 넣기 쉽지 않을 터였다.
시간대를 오가는 형사물에 러브라인까지 없다라. 이건 방송국 측에서 손 사레를 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조건들이었다.
“그럼에도 삼촌이 추천하는 이유가 있겠죠?”
“당연하지.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서준이 네가 대본을 모두 본 다음에 하자. 알았지?”
“네.”
안 그래도 허기가 지던 참이었다. 정말로 배가 고프다는 뜻이 아니라. 서도현이 건네준 두꺼운 대본을 얼른 읽고 싶었다.
“삼촌. 오늘 점심 같이 먹기로 했으니까. 그때까지 여기서 이거 보면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사락사락. 조용히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대표실을 채웠다.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바로 시놉시스였다.
[타임슬립]
강록은 처음 경찰이 되었을 때의 열정을 잃어버린 형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빗길에 길을 걷던 강록은 누군가와 부딪히고. 형사의 감으로 범죄자임을 알아차렸지만. 비번으로 쉬는 날이라 무시해버리고 마는데.
-범인? 내가 왜 쉬는 날까지 범인의 뒤꽁무니만 쫓아야 되는데? 그런다고 누가 돈이라도 더 줘?
집에 돌아와 잠에 들었다 일어나니 자신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어린아이로 눈을 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과거는 미제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와 시간대 근처임을 깨닫게 된다.
-확실히 꿈이 아니다. 그리고 평성에서 일어났던 연쇄살인 사건. 그때 사건 기록일지와 현재 상황이 일치한다.
열정을 잃어버린 형사 강록은 이 사건에 대한 개요를 알고 있음에도 무시해버리고.
-네? 김 반장님이 없다뇨? 그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근무하시던 분인데.
-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김 반장은 몇 년 전에 평성 연쇄 살인 사건 범인 쫓다가 순직하셨잖아. 너 갑자기 왜 그래?
다음 날 다시 현실에서 눈을 뜬 뒤 그 사건의 나비효과로 자신이 막대한 페널티를 받게 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타임슬립’은 과거 미제 사건이 발생했던 순간과 현실을 오가며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이야기였다.
시놉시스와 1, 2화 대본을 읽고 난 소감은 간단했다.
재밌다.
이 단어를 제외하곤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사건들. 미제 사건 해결 단서를 찾기 위한 과정에서의 급박한 전개. 그리고 서서히 변해가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까지.
서도현이 왜 내게 이걸 추천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지금까지 빛을 보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 작품이 성공하려면 주인공의 연기력이 생명이었다. 현실에 찌든 형사 강록과, 그 강록이 과거 시점에 눈을 뜨는 어린아이. 이 두 주인공의 연기력이 부족하면 드라마 자체가 무너질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서도현을 잠시 불렀다.
“삼촌.”
“응?”
“이거 제가 수락 안 하면 다시 엎어지는 거죠?”
“정확히 봤어. 아마 서준이 네가 그걸 하겠다고 나서지 않으면. 다시 저 아래에서 기다려야 할 거다.”
기다린다는 말은 그냥 드라마 제작이 영영 물 건너간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면 작가가 방송국의 입맛에 맞게 대대적인 대본 수정을 하거나.
3년이라는 시간을 버텼다는 걸 보면. 차라리 떠나면 떠났지, 자식처럼 아끼는 작품을 버리진 않을 터였다.
“저 마저 읽어보고 말할게요.”
“그러렴.”
잠시 후.
“···서준아?”
“네?”
“집중한 모양이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밥 먹으러 가야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요?”
몰랐다. 1시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후딱 지나가 버렸을 줄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대본에 몰입해서 읽었다.
“어떻든?”
이미 대답을 알 것 같은 표정으로 묻는 서도현에게.
“정말 재밌어요. 이거 꼭 한번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내가 대답했다.
*
“쉿! 우리 정체 들키면 안 돼!”
“···맞아. 나랑 지환이는 몰라도. 서준이랑 도윤이는 유명해졌잖아.”
“나도 드라마 보시는 어머님들 말고는 잘 모르던데?”
은밀하게 속삭이면서 정처 없이 눈동자를 좌우로 흔들며 살피는 모습이 꼭 스파이 같았다. 적진에 침투하여 정체를 들키면 큰일 나는 스파이.
그런 애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귀여웠으니까.
“괜찮아. 너네랑 같이 있으면. 과하게 달려들거나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수진 누나도 같이 왔잖아.”
그랬다.
쫑알거리는 사총사들과 함께 찾은 곳은 바로 영화관이었다. 영화 ‘목소리’를 다 같이 보기 위해 찾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간엔 영화관에 사람들 많지 않아.”
“아, 맞아.”
그제야 주변이 시야에 들어왔는지. 평일 오후라 한산한 영화관을 살피는 사총사들이었다.
“도윤이 넌 벌써 3번이나 봤다면서. 오늘 보면 4번째 아니야?”
“응. 그런데 신기하게 볼 때마다 다른 게 보여.”
김도윤은 ‘목소리’를 아예 연기 공부 교보재로 삼은 모양. 사총사들에게 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한 사람도 김도윤이었다.
“콜라랑 팝콘 먹을 사람? 내가 살게.”
“그러면 나는 콜라랑 달콤한 맛 팝콘!”
“···버터구이 오징어.”
“난 그냥 팝콘.”
의외로 하지우가 먹을 줄 알았다. 냄새가 좀 나서 그렇지. 영화관에서 먹는 버터구이 오징어만큼 끝내주는 간식이 없었으니까.
각자 먹기 좋게 작은 사이즈 팝콘과 콜라. 그리고 버터구이 오징어를 각각 손에 들고서. 우리는 상영관에 입장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영화가 끝났다. 상영관에 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나를 톡톡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나 휴지 좀 줘.”
눈시울이 붉어진 하지우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노래 'GOOD BYE'에 감정이 복받친 듯싶다.
“역시 서준이야. 나도 정말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서준이 너처럼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
옆에서는 김도윤이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3번을 넘어 4번을 봤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가자. 영화도 봤으니까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돈까스?”
붉어진 눈가를 휴지로 콕콕 찌르던 하지우의 저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지우가 좋아하는 돈까스 먹으러 가자. 다들 좋지?”
“응!”
“나도 좋아.”
그렇게 ‘목소리’를 다 같이 관람한 뒤. 우리는 하지우가 좋아하는 돈가스 가게로 향했다.
몰랐는데 몇 없던 상영관 사람들 중에 내 팬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영화관에 갔다가 차 배우랑 사총사들 봤다.]
쉬는 날이라 우리 차 배우가 나오는 목소리 보러 영화관에 갔는데. 정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라.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앞을 바라보니까 4명의 어린 친구들이랑 여자 한 분이 같이 오셨더라고.
어? 하는데 영화 다 끝나고 슬쩍 보니 우리 차 배우가 맞더라. 사총사 친구들이 대박! 대애박! 이러면서 물개박수를 치는데.
사실 나도 거기 껴서 박수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돈가스 이야기도 막 나오던데. 그거 엿듣고 나도 돈가스 먹으러 감. ㅋㅋㅋ
└ 우리 차 배우 친구들이랑 자기 영화 보러 왔나 보네. ㅋㅋㅋㅋ 그 사총사 중 한 명도 아역 배우 됐잖아.
└ 금괴소동 때에는 연사모 형들이랑 영화 보러 온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사총사 친구들이랑 본 듯?
└ 솔직히 이제 탑스타가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유치원 친구들이랑 여전히 가깝게 지내는 거 보면. 우리 차 배우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거 같네요.
└ 당연하지. 사총사들이나 연사모 형들이랑 다 잘 지내는 거 보면 알 수 있잖아. 우리 차 배우 인성 하나는 지림.
└ 그나저나 이제 차기작을 뭘로 선택할지가 궁금하네. 주연급에 올라섰는데 굳이 조연으로 나올 거 같지는 않고.
└ 안 그래도 다들 차기작 소식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 이제 S급이나 마찬가진데. 무조건 주연 아니겠음?
마지막 팬들의 반응을 보다 보니 생각났다. 요 며칠 사이에 방송가에 은밀한 소문 하나가 떠돌고 있다는 걸.
*
최근 드라마 PD들 사이에 떠오른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하나 있었다.
“야, 너 그 소식 들었어? 차서준이 차기작을 NBC에서 할 수도 있다던데?”
“솔직히 NBC도 차서준 효과 누려보고 싶겠지. 몇 번이나 경쟁사에 나오는 차서준 때문에 박살이 났는데.”
“그렇겠지? 그런데 메인 시간대 드라마 중에서. 아역 배우인 차서준을 주인공으로 쓸 만한 대본이 지금 있나?”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PD 하나가 구박을 시작했다.
“너 지금 차서준이 목소리로 얼마나 대박을 터트렸는지 몰라? 솔직히 이제는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로 넘어가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
“하긴 그렇네. 5연타석 성공. 그것도 최근에 홈런만 빵빵 때리고 있으니. 내가 작가라도 차서준을 주인공으로 쓰고 싶겠다.”
“대신 실컷 썼는데 차서준이 안 하겠다고 하면 나가리니.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지 뭐. 그나저나 차서준이가 차기작으로 뭘 고르려나 모르겠네.”
드라마 PD들이라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서준의 선택을 받을 행운의 작가와 연출에 대해.
그리고.
“네? 저, 정말요?!”
그 행운의 소식을 들은 누군가의 손에 있던 종이컵이 툭 하고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