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서도현이 집에서 쉬며 엄마, 하준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를 부른 건.
“먹방 예능이요?”
“그래.”
예능 섭외가 들어왔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안 그래도 저번 주에 김도윤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서도현을 만났던 참이었다.
집에서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좋은 자리가 생겼다면서 부른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반나절만 촬영해도 된단다.”
“그러면 괜찮네요? 시간도 많이 뺏기지 않아도 되고요.”
“그렇지. 대신 다른 프로에 비해서 출연료는 적지만. 서준이 네게는 별 상관없을 거 같아 보이는데.”
“맞아요 삼촌. 그건 별로 상관없어요.”
꽤나 솔깃한 제안이었다. 사실 슬슬 몸이 찌뿌둥하던 참이었다. 6살에 데뷔한 이후 쉴 새 없이 작품들을 이어온 나였다.
그런데 주우정 감독의 영화 촬영을 마친 이후 집에서 하염없이 휴식을 보내고 있었으니.
엄마, 동생과 보내는 하루하루가 즐겁긴 하지만. 때로는 허전함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연예인이란 그런 존재였다. 사람들의 끊임없는 관심을 먹고 사는 존재. 그건 나 역시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서도현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섭외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말한다.
“집에만 계속 있으니 지루하지 않아? 아무리 삼촌이 들어온 대본이나 시나리오들을 준다지만. 서준이 넌 요즘 조금 심심하다고 느낄 거 같은데.”
“그건 맞아요. 한 번도 워커홀릭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휴식이 길어지니까 조금 지루하더라고요.”
바쁘게 촬영 일정을 소화하다가. 종일 집에만 있다 보니 서도현의 말처럼 슬슬 지루하던 참이었다.
안 그래도 며칠 뒤에 할 일이 하나 잡히긴 했다. 바로 열심히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열연 중인 김도윤의 촬영장에 방문하는 것.
김도윤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줄 겸. 특별히 카메오로 출연하기로도 약속을 했다. 손가락을 몇 번이나 걸면서 얼마나 기뻐하던지.
어쨌거나.
“그래서 정확히 어떤 먹방 예능인데요?”
“맛집을 찾아 전국을 떠도는 먹방 프로그램. 서준이 너도 들어봤을 텐데. ‘잘 먹는 친구들’라고.”
“아, 잘 먹는 친구들! 안 그래도 엄마랑 재밌게 보고 있었어요. 엄청 맛있어 보이는 곳들을 많이 다니더라고요.”
아는 프로그램이었다. 개그맨들 중 복스럽게 잘 먹기로 소문난 3명이 전국 맛집을 다니는 예능 프로그램.
마른 몸에 어찌 그렇게들 복스럽게 먹는지. 보고만 있어도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가게 만들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흔히 뒷광고로 돈을 받고 섭외된 가게들이 아니라. 정말로 작가들이 발로 뛰어 검증된 맛집들만 다니는 프로그램이었다.
집 근처에 있는 맛집이 한 곳 나와서 가봤었다. 오랫동안 줄 선 끝에 먹었지만. 엄마, 아빠 그리고 나도 꽤나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 거기 멤버 하나가 부상으로 잠시 동안만 빠지게 되었거든. 한 달 정도 단기 고정 게스트를 원한다는데. 이야기를 딱 듣고 나니 서준이 네가 떠오르더라.”
“괜찮을 거 같아요. 돈도 받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는 거잖아요.”
세상에나. 소문난 곳뿐만 아니라, 전국에 숨겨진 맛집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이었다.
엄마랑 ‘잘 먹는 친구들’을 보면서 얼마나 군침을 삼켰는지 모른다. 만약 그 프로에 내가 출연한다?
촬영 이후 방송에 나가기 전에 재빨리 엄마, 아빠를 데리고 다녀오면. 더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서 방송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럼 해야지.
“저 그거 할래요.”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나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승낙해버렸다.
“그럴 줄 알았다.”
안 그래도 예전에 씽씽이를 산 이유 중에 하나가 멀리 떨어진 맛집 찾아가기였다는 것을 아는 서도현이다.
내가 하겠다는 대답과 동시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 ‘잘 먹는 친구들’에 한 달 단기 고정 게스트로 하는 걸로 하고. 다음 주에는 도윤이 촬영장에 간다고 했지?”
“네. 안 그래도 도윤이가 하루걸러 하루마다 문자를 보내고 있어요. 잊지 말고 꼭 나와 줘야 한다면서요.”
“녀석.”
감독님과 작가님에게 카메오로 날 데리고 올 수 있다는 말을 꺼냈을 때. 자기가 촬영장에서 얼마나 사랑을 받았었는지에 대해 10분 넘게 떠들었던 김도윤이다.
무엇보다.
최근 촬영장에서 뭔가 뜻대로 펼쳐지지 않는 연기에 대해. 수많은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털어놓기도 했었다.
사실 엄마와 함께 김도윤이 나오는 일일 드라마를 보면서 문제점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린 나였지만. 지금처럼 김도윤이 많은 고민 끝에 연락할 때까지 기다렸다.
친구가 아역 배우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
일일드라마 ‘김씨네 식구들’을 연출하고 있는 장주윤 PD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오늘 정말 온대?”
“네. 대본도 도윤이를 통해서 넘겼고. 촬영 스케줄 확인하면서 재차 확인했어요. 확실하게 오늘 온대요.”
“흐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대박이 터지는구만.”
오늘 카메오로 출연하기로 한 배우가 누구던가. 옆동네지만 시청률 46.5%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달성한 금동이. 바로 아역 배우 차서준이었다.
그 차서준과 김도윤이 친분이 깊다는걸. 장주윤 PD는 오디션을 통해 김도윤을 뽑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구름엑터스 소속인지라 함부로 요청하지도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서도현이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꽤나 까다로운 대표였으니까.
무엇보다 아역 배우라곤 하지만, 차서준의 몸값이 너무나도 올라간 상태였다. 금동이를 통해 탑급 배우 그 이상의 인기를 자랑하던 차서준을 일일드라마에 부를 순 없었다.
그런데.
“출연에 대해선 정확하게 이야기했어? 몇 번 더 도와준다고 한 거 확실해?”
“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작가님이 부랴부랴 대본 수정하느라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대본 수정이 문제야? 쪽대본이라도 절하면서 받아야지.”
차서준 측에서 김도윤을 통해 넌지시 카메오 출연 의사를 내비쳤다. 그것도 어떤 역할이라도 상관없다는 말과 함께.
안방 시청자들에게 있어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금동이다. 그런 금동이가 몇 편에 걸쳐 ‘김씨네 식구들’에 나와 주기만 한다면. 정체되었던 시청률이 확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특히나 일일드라마 시청자와 팬층이 겹치는 금동이가 나와 준다면 시청률 상승은 확실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제 친구 차서준이에요.”
“아역 배우 차서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세트장 입구 쪽에서 김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친구인 차서준을 본받은 탓인지. 김도윤은 촬영장에 도착하면 항상 막내 스태프에게까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장주윤 PD가 애타게 기다리던 아역 배우 차서준이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걸음에 달려간 장주윤 PD는 차서준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어서 와요. 차 배우. 우리 도윤이와 친하다면서? 오늘도 이렇게 카메오로 도와준다고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아역 배우 차서준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마치 갓 데뷔한 아역 배우처럼 꾸벅 인사를 하는 차서준을 보니. 촬영장에서 사랑받는 김도윤의 롤모델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본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 장주윤 PD의 놀람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차서준이야 미친 연기력을 보여준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작 장주윤 PD가 놀란 부분은.
‘도윤이 연기가 훨씬 좋아졌는데?’
카메오로 출연한 차서준과 호흡을 맞춘 김도윤의 연기력이 확 올라간 것. 그것은 차서준과 함께하는 씬이 지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오케이 사인을 보내기엔 충분하지만. 그 이상의 뭔가를 보여줄 것 같으면서도 보여주지 못하던 김도윤이었는데.
방금 차서준과 호흡을 맞추고 난 순간부터. 마치 억눌렸던 포텐이 터지듯 확연히 표현이 좋아졌다.
“커엇! 다음 씬으로 갑시다.”
갑자기 알에서 깨어나듯 달라진 연기를 선보이는 김도윤을 보면서. 장주윤 PD는 어떤 방향으로 디렉팅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
조금 더 빨리 올 걸 그랬나?
김도윤의 드라마에 카메오로 촬영을 마친 뒤. 다음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 김도윤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사실 이쯤이 적당할 거라는 판단 하에 온 것이었는데. 오늘 김도윤의 마음가짐을 보니 조금 더 빨리 와도 괜찮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윤아.”
“응?”
“카메라 앞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 감이 좀 와?”
“응! 사실 혼자서 답을 찾아보려고. 삼촌에게도 물어보고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봤는데.”
“잘 안됐지?”
“응···.”
나야 사람들이 보기엔 숫제 연기 괴물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사실 남다른 연기 재능에 수십 년의 연기 경력이 더해진 결과였다.
나 역시 김도경의 어린 시절 처음 카메라 앞에 서면서 김도윤과 같은 고민을 하던 적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극복해나갔지만 말이다.
내가 찾은 해답을 김도윤에게 알려준 것이다. 예상대로 김도윤은 스펀지에 흡수하듯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자, 아까의 그 느낌을 잊지 말고 하면 돼. 알았지?”
“응!”
확실히 나아졌다. 사실 카메오로 출연을 결심한 이유도. 드라마를 보면서 김도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몇 화가 더 지난 지금에서야 도와주기로 결심한 건. 그 고민하는 과정에서 김도윤이 배우로서 얻을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카메라 앞이라고 연기를 한다 의식하지 말고. 내가 그 캐릭터가 되었다는 생각으로 하면 돼.”
“응. 뭔가 좀 알 것 같아. 고마워 서준아.”
먹구름이 갠 하늘처럼 활짝 웃는 김도윤을 보면서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제 겨우 뒷다리 하나가 쑥 나온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혼자 헤엄을 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지금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고 몇 년을 더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나와 함께 같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서준아.”
“응?”
“나 진짜 열심히 해서. 언젠가 너와 같이 나란히 설 거야. 그때까지 진짜 죽어라 노력할게.”
“기다릴게.”
나를 동경하며. 언젠가 내 곁에 나란히 서겠다고 다짐하는 친구가 있다는 건.
꽤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
김시율은 최근 낙이 별로 없었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즐거운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하아. 우리 차 배우가 없으니. 낙이 없어.”
마지막으로 활동한 ‘소소한 하루’에서 연사모 형들과의 야외 캠핑 여행을 얼마나 재밌게 보았던가.
가끔씩 야근에 지칠 때면. 차서준처럼 야외 캠핑을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까지 드는 김시율이었다. 맥주 한 캔을 들고 터덜터덜 컴퓨터 앞에 앉은 그녀는 습관처럼 팬클럽에 접속했다.
혹시나 차 배우에 관한 소식이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대박 소식!!! 우리 차 배우 예능에 나온대요!!!]
김시율의 시선을 강탈하는 글 하나가 올라왔다. 심지어 링크까지 걸어둔 채로.
“잘 먹는 친구들? 설마?”
재빨리 마우스를 움직여 그 링크를 누르자. 가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때마다 찾아보는 먹방 예능 예고편이 나오고 있었다.
-지금 우리 먹친 막내가 몸을 다쳐서 잠시 휴식을 하게 되었죠.
-큰일이야. 몸을 다칠 때일수록 잘 먹어야 빨리 낫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은 슴슴한 식단으로 관리를 해야 한다잖아요. 그래서 PD님. 이제 진짜로 우리 둘이서 해요?
-그러면 출연료 더 줘야지!
‘잘 먹는 친구들’의 먹친이라고 불리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메인 PD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래서 앞으로 한 달간 여러분과 함께 맛집 탐방을 떠날 게스트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메인 PD의 소개와 함께 게스트가 모습을 드러내자.
“응? 왜 여기서 우리 차 배우가 나와?”
김시율의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화면 속 예고편의 먹친 두 사람의 반응도 마찬가지.
└ 우리 차 배우가 ‘소하’에서 야무지게 먹긴 했지. 형들이 주는 대로 넙죽넙죽 복스럽게도 먹던데.
└ 심지어 식당 사장님들에게는 금동이로 불릴 텐데. 당장 예고편 사장님 반응만 보더라도 더 좋아함. ㅋㅋㅋㅋ
└ 당연하지. 금동이 왔다고 서비스 듬뿍 주실 거 같은데. 환영하는 게 당연함.
└ 와. 방금 PD가 앞으로 한 달간이라고 한 거 맞죠? 우리 차 배우를 ‘잘 먹는 친구들’에서 4번은 더 볼 수 있는 거 맞죠?
└ 맞을 듯. 앞으로 한동안은 부족했던 차 배우를 잔뜩 채울 수 있겠네요.
이미 팬클럽에서도 난리가 났다. 그런 팬들의 반응을 보면서 김시율은 서둘러 확인했다.
‘잘 먹는 친구들’의 차 배우 첫 방송이 언제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