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엑스트라로 출연하기 위해 차에서 내린 이나현은 이상한 종이 하나를 받았다.
“비밀 유지 계약서?”
이런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날 촬영 내용이 작품의 중요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때. 외부에 그 내용이 흘러 나가지 않도록 계약서까지 쓰는 경우가 있다고 말이다.
“자자, 거기 적힌 대로 오늘 촬영을 오셨다는 것까지는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비밀 유지 계약서를 나눠준 관계자가 엑스트라로 온 이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오늘 촬영 내용이 절대로 외부에 발설이 되어선 안 됩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모두 신뢰할 만한 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몇 번이나 강조하는 비밀 유지에 툴툴거리려던 사람들은.
“어? 정말로 오늘 수당을 이만큼이나 줘요?”
“예. 그리고 미리 조율하셨다시피 추후 촬영에 오실 때마다 그 금액이 보수로 지급될 예정입니다.”
예상보다 많이 지급된다는 페이 약속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 자리까지 온 이유는 하나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런 돈을 다른 곳보다 많이 준다고 하고. 비밀만 잘 지킨다면 다음 촬영에도 계속해서 불러준다는데.
자고로 머슴 일도 대감집에서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떨어질 콩고물이 많은 곳이 좋다는 건데. 오늘 도착한 촬영장이 그랬다.
그렇게 비밀 유지 계약서를 쓰고 난 뒤. 촬영장에 도착한 보조 출연자들은 왜 그런 것을 요구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어? 차 배우 아니야? 차기작 영화 한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맞네. 금동이가 차기작으로 한다는 영화였네. 그래서 비밀 유지 계약서를 쓰라고 한 거였구나.”
“이야. 금동이 영화에 내가 나오는 거야?”
오늘 촬영할 영화가 금동이. 아니, 아역 배우 차서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이 그제야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아역 배우 차서준의 팬인 이나현의 눈빛은 초롱초롱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팬카페에서도 베일에 싸인 차기작에 대해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자신이 그 영화에 보조 출연자로 함께하는 기회를 얻었으니까.
오늘 촬영을 하다 보면. 차서준이 차기작으로 찍는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 대충 알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떠올린 이나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아역 배우 차서준입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릴게요.”
소문이 사실이었다. 데뷔 초부터 스태프 막내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소문 그대로였다.
금동이를 통해 엄청난 인기를 얻었음에도. 촬영장에 나타난 차서준이 스태프 막내에 이어 보조 출연자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인사를 한다.
“촬영이 모두 끝나고 원하시는 분들에게 사인도 해드릴 테니까요. 끝났다고 바로 가시면 저 섭섭해요.”
차서준의 귀여운 저 말에 보조 출연자들 사이에 웃음이 터진다.
그런 웃음이 경악으로 바뀐 건.
‘서, 설마.’
영화의 본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였다. 이나현이 왜 모를까. 한동안 차서준 팬클럽을 시끌시끌하게 만들었던 인물이 누구던가. 바로 ‘귀요미 버스커’였다.
차서준이 정체를 가리고 활동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가장 많이 나왔던. 그 ‘귀요미 버스커’의 목소리가 지금 자신의 앞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차서준의 믿을 수 없는 노래를 들으며 이나현은 생각했다.
‘이래서 팝송만 불렀던 거구나. 가요를 부르면 정체를 들킬지도 모를 테니까.’
기타 위를 움직이는 작은 손이 감미로운 소리를 만들어내고. 그보다 더 깊은 울림이 작은 아이의 몸에서 흘러나온다.
지금 촬영 내용은 갑작스럽게 기타 하나를 들고 나타난 아이에게 모두가 경악을 해야만 하는 장면이었다.
허나, 따로 표정을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차서준의 노래를 듣는 순간. 감독이 요구했던 그 표정이 저절로 떠올랐으니까.
엑스트라로 행인 3의 역을 맡은 이나현은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돋아 오르는 소름을 감추지 못했다.
감독의 오케이 사인을 듣는 순간.
‘이 비밀을 나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니.’
아까 서명한 비밀 유지 계약서를 떠올리며 울상을 짓는 이나현이었다.
잠시 후.
“자자! 점심 식사들 맛있게 하세요.”
비밀 유지를 위해 촬영 중에는 핸드폰을 제출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점심으로 나온 도시락을 먹는 보조 출연자들에게 반찬거리는 수다가 될 수밖에 없었다.
“뭐야. 그러면 소문이 사실이었어? 귀요미 버스커가 차 배우라는 소문이?”
“저는 아까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요. 차 배우가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말은 들었지만. 너무 사기 캐릭터 아니냐고.”
“소문의 귀요미 버스커의 정체가 진짜 서준이라니. 이거 나중에 공개되면 난리가 나겠는데요?”
모두의 얼굴에 묘한 흥분이 떠올랐다. 입이 벌써부터 근질근질한 것이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커다란 비밀을 알게 되었기 때문.
“그나저나 아까 실제 라이브로 듣는데. 소름이 쫙 돋았잖아요.”
“그 뒤에 이어지는 연기는 또 어떻고. 차 배우, 차 배우 하는 이유를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알겠더라. 그냥 천생 스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거 같던데.”
“대신 오늘 촬영 이야기 절대 밖에서 하면 안 될 거 같아요. 영화를 위해서 일부러 정체까지 숨기면서 버스킹을 했었던 모양인데.”
“맞아. 비밀을 지키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괜히 잘못 입 놀렸다간 그 고생이 물거품이 될 테니. 다들 아까 쓴 계약서 생각하면서. 개봉 전까지 꼭 비밀 지킵시다.”
마지막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알음알음 얼굴들을 알아보는 건, 보조 출연자 경험이 많은 이들로 선별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신뢰할 만한 이들만 섭외된 자리였다.
무엇보다.
입을 무겁게 만드는 페이가 그들의 비밀 유지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오늘 비밀을 잘 지켜야 다음 촬영에도 불러줄 테니.
[우리 차 배우가 촬영하는 영화 엑스트라로 출연하고 옴.(영화 내용 절대 1도 언급 안 함. 관련 내용 질문 사절.)]
└ 크랭크인 기사 보니까. 영화 제목이 ‘목소리’라던데. 대체 어떤 영화인지 감이 안 오는데 어떰?
└ 미쳤음. 그냥 말이 필요 없고. 나중에 영화 개봉하면 무조건 영화관 가서 보셈. 나도 영화 개봉하면 3번 보러 갈 테니까.
└ 3번 ㅋㅋㅋㅋㅋ 그보다 우리 차 배우 직접 보니까 어떰?
└ 팬이 아닌 엑스트라로 만났는데. 차 배우는 차 배우더라. 팬들 대할 때랑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음. 오히려 촬영 다 끝나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사인 하나하나 다 해주고 감. 소문 그대로였음.
└ 크. 역시 차 배우네. 그보다 ‘목소리’라는 이름만 공개되어서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그렇게 말할 정도면 뭔가 있나 보네.
└ 솔직히 ‘재벌가 금동이’를 보면서 금동이가 차 배우 최고의 인생 캐릭터가 될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또 인생 캐릭터 갱신되겠더라. 차 배우의 또 다른 매력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거 같아.
└ 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스샷 찍혀서 또 커뮤니티들에 퍼지겠네. 안 그래도 차 배우의 첫 단독 주연 영화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렀다.
계절이 변하는 사이 배우 차서준 주연, 주우정 감독의 영화 ‘목소리’의 촬영이 모두 끝났다.
영화제 출품 시기를 맞춰야 하느라 제법 빠듯한 촬영 기간이 이어졌었다. 그 마지막 촬영이 바로 어제였고.
“당분간은 쉬겠다고?”
“네. 차기작은 조금 쉬었다가 정해도 될 것 같아요. 그래봤자 휴식 기간이 길진 않을 거 같아요.”
“그렇겠지. 영화제가 내년 2월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으니. 잘 생각했다. 삼촌도 서준이 네게 조금 쉬자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내년 2월에 있을 영화제를 기다리면서. 나는 그때까지는 휴식 기간을 갖기로 결정했다. 모든 활동을 멈추겠다가 아니라, 차기작 선택에 대한 휴식을 갖기로 한 것이다.
방금 서도현의 말처럼. 내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서도현이 먼저 내게 휴식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휴식 없이 달려왔으니.
“맞아요, 삼촌. 만약 거기서 좋은 결과가 있다면. 지금까지보다 앞으로 더 바빠질 것 같으니까요.”
“더 바빠질 거 같다라. 서준이 널 보면 마치.”
마치?
“당연히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 같은데.”
서도현의 말이 맞았다. 배우로 수십 년 동안의 경험이 쌓이다 보면. 가끔씩 느낌이 올 때가 있었다.
이번 영화는 된다. 이건 터지겠다. 이런 느낌들이 말이다. 김도경 시절 그 성공할 것 같다는 감은 현실이 되곤 했었다.
물론 저런 감들이 모두 맞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 주우정 감독과 함께 찍은 이번 영화가 그런 확신이 들 만큼 끝내주게 나왔다.
항상 촬영이 끝날 때면 아쉬움이 남았다던 주우정 감독의 입에서도 만족스럽다는 말이 처음 나왔을 정도였으니까.
“음. 삼촌이 시나리오 좋다고 하셨고. 저도 최선을 다해 찍었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요?”
“하하. 맞다. 우리가 도전하는 곳이 베를린이라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그랬다.
이번에 주우정 감독의 영화 ‘목소리’를 출품한 영화제는 3대 영화제 중의 한 곳.
바로 ‘베를린 영화제’였다.
베를린 영화제가 열리는 시기가 내년 2월이니. 그 전에 후보 발표가 나올 때까지는 휴가를 보내게 되는 셈이다.
“결과가 어찌 되었던. 서준이 네 덕분에 또 삼촌이 꿈을 꾸게 되는구나.”
전에 서도현이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키운 배우가 세계적인 영화제 레드 카펫을 밟는 걸 꼭 보고 싶다고.
아직까지 구름엑터스 소속 배우들 중에 3대 영화제나 아카데미 시상식을 밟아본 이가 없었다.
서도현에게는 먼 훗날에 이루고 싶은 이야기로 느껴지는 모양인데. 이미 김도경 시절 트로피까지 손에 쥐어본 나로서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만약에 정말 좋은 결과가 나오면요.”
“나오면?”
“삼촌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꼭 이렇게 인터뷰를 할 거예요.”
내 말에 서도현이 웃음을 터트린다. 마치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난 아직 배가 고픈데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결과란 영화제에서 내가 주연상을 받을 거라는 건 아니었다.
동양에서 나온 영화, 그것도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 배우에게 대상을 주려는 시상식을 없을 테니까.
그저 영화 ‘목소리’가 좋은 결과를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은.
“그래. 쉬는 동안에는 무얼 하려고?”
서도현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처음이었으니까. 데뷔 이후 이토록 긴 시간 동안 차기작을 결정하지 않은 채 휴식을 취하는 건.
쉬는 것도 해본 사람이 잘 쉰다고.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내가 어떤 식으로 쉴지 걱정이 되는 모양.
“삼촌도 아시잖아요. 집에서 엄마 도와줘야죠. 사실 쉬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그렇네. 서준이만 바라보는 동생이 있다는 걸 삼촌이 깜박했네.”
“괜찮아요. 삼촌이 보내준 바운서에서 동생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거든요.”
내가 쉬는 동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곤. 서도현이 미소를 짓는다.
사실 배우에게 있어 반년도 채 되지 못하는 몇 달의 휴식 같은 건 흔한 일이었다. 고작 6살의 어린 나이에 데뷔하여 벌써 5번째 작품을 마친 내가 괴물인 것일 뿐.
심지어 그간 거둔 성적들을 보면 모두 홈런을 때린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너무 설레발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베를린이라지만 삼촌이 봤을 땐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를 거 같다.”
아직 출품 사실은 몇몇 관계자만 알고 있는 것이지만. 영화 자체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제가 주인공으로 찍은 영화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잘 나온 거 같아요. 이번 영화.”
아역 배우 차서준의 차기작 크랭크인 소식이 퍼졌을 때. 그리고 영화감독이 주우정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당시 제법 시끌시끌했었다.
‘재벌가 금동이’로 신드롬까지 일으킨 아역 배우 차서준의 첫 단독 주연 영화였으니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특히나 영화 제목이 ‘목소리’라는 사실이 공개된 뒤. ‘귀요미 버스커’와 아역 배우 차서준의 연관에 관한 기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영화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기에 금방 관심이 사그라들었지만 말이다.
“아, 그리고 귀요미 버스커의 정체 공개는 내년에 예고편 공개와 동시에 하기로 했다. 영화제 소식이 나오고 나서 정확한 일정을 결정할 거야.”
“저도 들었어요. 만약 영화제에 초청된다면. 그때 홍보도 같이하기로 했다고요.”
금동이를 향했던 뜨거운 관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식어갔다. 아마 사그라진 불꽃은 내년에 있을 결과에 따라 다시 활활 타오를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