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3월이 시작되고 흑역사 아닌 흑역사가 하나 생겼다.
바로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짤방으로 떠돌만한 사진들이 찍힌 것이다. 입학 선물만큼은 꼭 챙겨주고 싶다는 형들의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 이게 입학 선물이라고요?”
“형들이 우리 서준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준비했어.”
“맞아. 요즘 서준이 널 보면 금동이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게 씌워지는 거 같더라. 그래서 형들이 이걸 준비했지.”
“귀엽잖아.”
하루 전날 깜짝 선물이라고 준 것들을 받은 순간. 나는 입을 멍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귀염귀염이 강조된 초등학교 입학 선물용 가방. 그리고 세트로 만들어진 실내화 주머니까지.
잠시 망설이는 날 본 것일까. 이 선물의 주동자로 추측되는 김정범이 나서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서준아. 배우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게 뭐야. 바로 이미지가 굳어져 버리는 거잖아. 그렇지?”
“그, 그건 맞죠.”
정론이긴 했다.
인생 캐릭터를 만난 배우가 그 뒤로도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뭘 하던 거기 나왔던 걔 같다.’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나 역시 50부작의 주말 연속극 ‘재벌가 금동이’의 금동이 이미지가 전 국민에게 퍼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가뜩이나 서준이 네가 ‘피치노’에서 협찬받은 옷들만 입고 다녀서 귀티가 나는데. 거기에 가방까지 고급스러움으로 치장한다? 이거 완전 금동이 되어서 상대적 박탈감까지 줄 수 있다.”
궤변이지만 묘하게 설득이 되었다. 무엇보다 예쁘게 포장까지 한 선물을 받기까지 한 상태이니.
“에잇. 그래도 형들의 성의가 있는데. 며칠만 들고 다녀줘.”
“···눼. 형들 입학 선물 고마워요.”
나를 생각해서 준비한 선물이었다. 형들의 성의를 생각해서 며칠만 들고 다니기로 했다.
“어머. 형들이 서준이에게 귀여운 가방 선물해줬네?”
집에 와서 보여주니 엄마, 아빠는 귀엽다며 난리도 아니셨다. 심지어 마음에 들었는지 세트로 멘 채 사진도 몇 장 찍어야만 했다.
“어엉! 뺘아!”
동생도 제법 좋아하는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우리 차 배우 초등학교 입학식 모습 ㅋㅋㅋ]
└ 우리 차 배우 책가방이랑 실내화 주머니 왜 이리 귀여움? 평소 들고 다닐 거 같지 않는 걸 가지고 입학식에 왔네?
└ ‘연사모’ 형들이 선물로 사준 듯? 김우승 SNS에 서준이 입학 선물이라면서 수여식 하는 사진 올라옴. ㅋㅋㅋ
└ 서준이 표정 봐. ㅋ 세상 무너진 표정이 뭔지를 보여주네. 배우답게 표정 리얼하고요.
└ 우리 조카가 차 배우랑 같은 반 배정받았는데. 완전 슈퍼스타라고 했음. 쉬는 시간만 되면 서준이 보려고 다른 반뿐만 아니라. 다른 학년들도 죄다 구경 왔대. ㄷㄷ
└ 하긴. 지금 금동이 신드롬의 주인공인데. 내가 저기 다녔어도 서준이 얼굴 보러 구경 갔을 듯.
└ 근데 신경질 한 번 안 부리고 웃으면서 다 받아주더래. 심지어 애들도 엄청 잘 다룬다고 했음. 샛별반 때부터 차 배우랑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와서 도와주고 했다는데?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낄낄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선물을 준 범인들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형.”
“응? 우리는 왜 여기 있냐고?”
이제는 길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김정범이 있었으니까.
“우리 서준이가 초등학생 된 걸 축하하러 형들이 애써 시간을 내서 모였는데.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면 서운하다?”
“···눼. 축하해주러 와주셔서 증말 감사드립니다.”
“에이, 뭘.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서준이 일인데. 그나저나 학교에서 완전 인기스타였다면서?”
확실히 난리도 아니었다. 오죽하면 철없는 선생님들 중 몇몇은 애들 무리에 껴서 사진을 찍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 사진들 덕분에 내 책가방과 실내화 주머니가 더 유명질 수 있었다.
“그렇긴 했는데. TV에 나오던 사람을 실제로 봐서 그런 거지. 시간이 지나면 차차 익숙해질 거예요.”
그럴 거다. 내가 ‘너에게 다시’로 데뷔했을 당시에도 처음 샛별반에서 난리가 났었지만. 점차 익숙해지니 괜찮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어린 친구들을 다루는데 이제 도가 튼 나였다. 기껏해야 6학년까지 있는 초등학교는 말할 필요도 없다.
별일이야 있겠어?
“서준이가 들고 간 가방이랑 실내화 주머니 회사 제품들이 모두 매진이라던데?”
“거 봐. 내가 잘 어울릴 거라 했잖아. 원래 애들에게는 애들만의 느낌이 나는 걸 들어야 한다니까. 서준이가 너무 애어른 같은 느낌이 강해서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지.”
“안 그래도 그런 반응들이 있었어. 귀티 나는 금동이와 서준이 책가방을 보면 반전 매력이 느껴진다고.”
이 사람들이 진짜.
물론 결과적으론 나쁘지 않은 선물이 되었긴 했다. 아니, 오히려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 최고의 선물이 되어버렸다.
며칠만 들고 다니려던 책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계속 들고 다니기로 결심한 건. 해당 국산 브랜드 사장님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의도치 않게 아역 배우 차서준이 정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던 곳에, 큰 도움을 쾌척하게 된 셈이 되어버렸으니까.
“거기 책가방 사장님이 정말 고맙다고 인터뷰까지 했다던데.”
“맞아요. 사실 하나둘 들어오는 외국 브랜드의 제품에 밀려서 폐업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제가 입학식 때부터 들고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없어서 못 판대요. 주문도 엄청 밀렸대요.”
“나도 그 기사 봤다. 정말 좋은 일 많이 하시는 사장님이시던데. 정범이 형은 알고 산 거?”
“으, 응? 다, 당연하지!”
몰랐구나. 어쨌거나 김정범이 의도하지 않은 뜻하지 않은 큰 선행이 되었다.
최종 결과가 좋았으면 됐다. 서도현도 뜻하지 않은 곳에서 터진 선행에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능숙하게 그쪽 사장님과 연락하여 일정도 잡아두었다.
아마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선. 조만간 내가 그 회사와 광고 계약도 체결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거기서 일하는 분들을 도와주고 싶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거기 사장님이 진짜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더라고요.”
“나도 솔직히 말해서 깜짝 놀랐다니까. 주변에서 국산 제품인데 품질 괜찮고 귀여운 가방이라고 해서 선택했는데. 그런 사연이 있는 곳일 줄이야.”
그 국산 브랜드의 사장님이 나이 드신 어르신 분들과 몸이 불편한 분들을 직원으로 채용하는 정말 좋은 분이었다.
가방 관련해선 추후 사장님과 서도현이 만나기로 했으니. 그 뒤에 자세한 이야기를 더 나눠보면 될 터였다.
어쨌거나.
“형들 고마워요. 뜻하지 않게 금동이 선행이라면서 기사가 퍼지고 있어요.”
의도야 어쨌든 간에 금동이가 든 책가방이 없어서 못 팔 지경에 이르렀다. 폐업을 고민하던 사장님은 직원들의 생계를 다시 책임질 수 있게 되었고.
하루아침에 생계를 책임지던 직장을 잃을 뻔한 직원들도 일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올해가 지나면 두둑한 보너스까지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보다 주우정 감독님 영화는 어떻게 됐어?”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옆에서 조용히 있던 박우형이 묻는다.
“하기로 했어요.”
“정말?”
“네, 바로는 아니고. 일단은 금동이 촬영에 집중을 한 다음. 드라마 끝날 무렵에 맞춰서 준비 시작할 거 같아요.”
내 말에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 가지 더 재밌는 소식도 있다면서?”
“어떻게 알았어요?”
“이 바닥에 비밀이 없다니까. 그리고 밖으로는 안 새어 나갈지 몰라도 내부에서 쉬쉬하면서 다 떠돌아.”
그럴 리가.
“형. 엊그제 제가 말했잖아요.”
“맞네.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만. 서준이 너랑 통화하면서 들었구나.”
아무리 비밀이 없는 바닥이라지만. 나와 주우정 감독. 서도현만 아는 이야기가 벌써 밖으로 새었을 리는 없다.
“그래서 버스킹을 한다고?”
“당장은 아니에요. ‘재벌가 금동이’의 촬영이 막바지에 들어갈 때쯤부터 시작할 생각이에요.”
내 말에 김우승이 고개를 갸웃한다. 여기 있는 박우형이나 김정범은 모르겠지만. 아이돌로 활동했던 김우승은 팬들의 예리한 눈썰미를 잘 알았다.
“금방 들키지 않을까? 서준이 네 팬들은 아무리 가려도 체형만 보고도 차 배우다! 이렇게 외칠 텐데.”
저 말이 마냥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가끔 예리한 눈을 가진 팬들 중에서 아무리 가려도 알아보는 분들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분장을 하려고요.”
“분장?”
김우승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한 배우의 연기란 표정이나 목소리에 감정을 싣는 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몸짓. 그리고 평소 움직임의 작은 습관의 변화만으로 다른 사람을 연기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보여드릴게요.”
김우승의 방에서 벙거지 모자를 하나 가져와 푹 눌러썼다. 가뜩이나 작은 머리가 성인 모자를 쓰니 코까지 가려진다.
그러고 나서 평소와 다른 습관 동작으로 움직이자.
“어어?”
“와.”
“대단한데?”
의아한 얼굴로 지켜보던 세 형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전혀 다른 사람 같은데?”
“그렇죠? 이렇게 꾸미고 움직이면. 아무리 제 팬이라고 해도 한 번에 알아차리진 못할 거예요.”
“그렇긴 하겠네. 거기에 서준이 네가 노래를 부를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진 못할 테니까.”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던 박우형의 옆에서. 김정범이 그제야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소리친다.
“어?! 그런데 서준이 너 노래 잘해?”
그랬다.
워낙에 무엇이든 잘하던 나였기에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포인트. 내가 부르는 ‘노래’에 그제야 관심이 쏠린 모양이다.
“서준이 춤을 잘 춘다는 거야 내가 직접 봐서 알긴 하지만. 노래는 좀 다르지 않나? 우승이 너 들어본 적 있어?”
“한 번도 없어요. 그러고 보니 왜 서준이의 노래에 대해 신경을 못 썼지?”
“애가 애답지 않게 워낙 이것저것 다 잘해서 그래.”
주제는 순식간에 노래로 넘어갔다. 주우정 감독도 반하게 한 내 노래 실력이 너무나도 궁금하다는 것.
하지만.
“안 돼요. 감독님이 공개되기 전까지 비밀에 꽁꽁 붙여두라고 했어요.”
고개를 단호하게 저은 나였다. 절대로 입학식 전날에 받은 귀염 가득한 가방 때문은 아니었다.
정말로.
*
43.2%.
‘재벌가 금동이’가 기록하고 있는 시청률이었다.
이렇게 높은 시청률을 꾸준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재미있어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데리고 올 흡입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왜 기억을 못 하냐고! 수첩에 썼잖아!”
“여, 여보. 서준이가 보고 있으니까.”
“아···. 서준아 미안해. 엄마가 너무 흥분을 해서.”
“괜찮아요. 저도 사실 찍으면서 작가님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어요.”
자기도 모르게 TV를 보다가 언성을 높인 엄마였지만. 이내 아빠의 말림에 옆에 있는 나를 깨닫고 화들짝 놀란다.
좋은 현상이긴 했다. 그만큼 옆에 있는 나를 잊을 정도로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었단 뜻이었으니까.
“서준아. 엄마가 조금 답답해서 그런데. 혹시 언제까지 이 검사가 기억을 잃은 상태로 지내니?”
아마 저 질문이 최근 내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아닐까 싶다.
금동이의 큰아버지들의 함정에 빠져 지방으로 좌천당한 뒤. 여주인공 이지연의 위로와 함께 다시 기운을 되찾은 이태성 검사는 우연히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도 신철민의 죽음과 두 큰아버지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증거. 이걸 토대로 수사를 확장해나가면 범인이 누군지 특정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은밀하게 자신의 뒤를 따라붙은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 이태성 검사.
-이걸 여기에 숨겨서 저들이 증거인멸을 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간신히 찾은 결정적인 증거를 자신만 아는 곳에 숨긴 뒤. 재빨리 이 사실을 알리려던 이태성 검사는 이지연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빠지고 만다.
그 기억상실증으로 이태성 검사와 이지연의 알콩달콩한 러브라인이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자꾸만 퍼먹이는 고구마에 엄마조차 화를 내고 만 것.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왜냐고?
계속해서 시청자들에게 고구마를 제시했다간 4라는 앞자리 숫자가 3으로 떨어지는 것은 금방일 터였다.
그래서 준비했다.
“기, 기억 상실증이 아니었다고?!”
사실은 감시를 피해 원활한 증거 수집을 위해. 이태성 검사가 이지연과 함께 기억을 상실한 척한 것이라는 걸.
‘재벌가 금동이’의 시청률이 조금 더 올라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