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랬다.
엄마의 손에 들려있던 건. 우리집에 셋째가 생겼다는 소식이었다.
세상에나.
엄마, 아빠는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는지. 저녁 식사가 다 끝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서준아. 지금부터 엄마가 하는 말을 놀라지 말고 들어야 돼.”
“네. 걱정 마세요.”
이미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정말 깜짝 놀랄 만한 대박 사건이긴 했다. 하준이가 태어난 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행복을 얻었는데.
“우리 서준이는 하준이가 태어나고 어땠어?”
“정말 좋았어요. 동생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어요.”
정말이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울음을 터트릴 때면 조금 밉긴 했어도. 그 짧은 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천사 같은 동생이었다.
“서준이에게 그런 천사가 하나 더 생길 예정이란다.”
그런 동생이 또 태어날 예정이라니. 엄마, 아빠를 닮은. 그리고 하준이처럼 천사 같은 동생이 생긴다니.
알고 있었음에도 엄마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한번 기쁨이 벅차오르고 말았다.
“저, 정말요?!”
“그러엄. 엄마, 아빠는 우리 가족이 하나 더 생겨서 정말 기쁜데. 서준이는 어떠니?”
조심스럽게 묻는 엄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안다. 보통의 일반적인 아이였다면. 엄마, 아빠의 사랑이 더 줄어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질투를 할지도 몰랐으니까.
실제로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부터 엄마는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었다. 아직 몸조차 제대로 못 가누는 아기였으니까.
하지만.
다른 아이라면 몰라도 난 아니었다.
“너, 너무 좋아요!”
정말로.
동생인 하준이가 태어난 이후로 행복이 몇 배가 되었다. 전생인 김도경 시절에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행복을 매일매일 느끼고 있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이랑 같이 지내니까. 너무나도 행복했거든요. 그런데 천사 같은 동생이 하나 더 생긴다니!”
엄마, 아빠와 셋이서 지낼 때에도 하루하루가 행복했지만. 동생인 하준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느끼는 그 행복의 크기가 몇 배로 커졌었다.
그런 기쁨을 주는 동생이 하나 더 태어난다?
정말 행복해 죽을지도 몰랐다.
나로서는 환영을 넘어 대환영을 외칠 만한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다행이네. 아빠는 서준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서 조금 걱정했거든.”
“저도 걱정이 하나 있어요.”
갑작스럽게 내 입에서 나온 걱정이라는 단어에 엄마, 아빠가 긴장하는 게 보인다.
그런 엄마, 아빠를 보며 내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엄마가 동생 때문에 힘들어 보이는데. 갓난아기인 동생이 하나 더 생기면 더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돼요.”
“우리 서준이. 엄마가 동생들 돌보느라 힘든 게 걱정이 되는 거였구나.”
“네!”
“우리 서준이가 듬직하네.”
그 걱정이 생각하는 것과 다름에 엄마, 아빠가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재빨리 다가가 배에 손을 올려보았다. 역시나 아직까지는 엄마의 배가 매끈했다.
대체 언제 생긴 걸까?
설마.
“엄마.”
“응?”
“혹시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크흠.”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아빠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다.
역시. 그날 서도현이 보내준 와인이 오작교 역할을 한 것이 분명했다.
내가 기쁨에 겨워 방방 뛰자. 엄마, 아빠가 그런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기쁨과 행복함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많이 도와드릴게요.”
“응?”
“엄마가 배가 나오면. 하준이를 돌보기 힘들어지잖아요. 제가 엄마를 더 많이 도와줄 거예요!”
“정말?”
“네!”
아직까지야 초기니 동생인 하준이만 챙기면 될 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점점 불러올 테고. 하준이 때처럼 이런저런 일들에 힘겨움을 느낄 터였다.
태어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가끔씩 새벽에 우렁차게 울어대는 하준이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이중창을 부를 동생이 더 생길 테니까.
그러니 내가 열심히 엄마를 도와줘야지.
“그리고 우리 하준이도 조금만 더 자라면. 저랑 같이 엄마를 도와줄 거예요.”
“뭐? 우리 서준이 말이 맞네.”
내 말에 엄마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중창으로 울음을 터트릴 동생들을 생각하니 조금 아찔하긴 했지만.
그래도.
몇 년만 지나면 첫째인 나를 졸졸 따라다닐 그날을 생각하니 또 기대가 되었다.
기다려진다.
올망졸망한 동생들의 손을 잡고 여행을 떠날 그날이.
*
한국 드라마만의 묘미가 하나 있었다. 바로 이어질 듯 말 듯 줄다리기하면서 시청자들의 애를 태우는 것.
그건 CBS 주말 드라마 ‘재벌가 금동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향한 끌림을 알지만 서로의 처지 때문에 감정을 숨기고만 있는 두 사람. 시청자들은 그런 이태성 검사와 금동이 엄마 이지연을 보면서 애먼 가슴만 두들겨야만 했다.
특히 주말 드라마를 좋아하고. 또 사랑하는 아들이 금동이로 출연 중인 엄마의 몰입감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서준아. 이제 금동이 엄마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금동이 아빠가 돌아간 지도 몇 년이 지났잖아.”
“그렇긴 한데. 금동이가 아직 준양가에 있잖아요. 그래서 금동이 엄마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서준이가 나오다 보니까. 엄마도 더 애가 타는 거 같아.”
스포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입을 꾹 다물었겠지만. 엄마와 이렇게 지나간 내용을 가지고 수다를 떠드는 건 재미있었다.
엄마가 저런 말들을 한다는 건. 그만큼 ‘재벌가 금동이’의 내용이 시청자들을 몰입시키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으휴. 엄마는 조금 답답해지려 그래. 우리 서준이가 금동이로 나오고 있으니 작가님을 욕할 순 없는데.”
“저도 이해해요.”
“정말?”
“네. 촬영장에서도 우리 언제 이어지냐고 농담까지 나온다니까요.”
주인공인 이태성과 이지연의 실제 배우들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니. 엄마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었는지. 누워있던 동생에 꺄아 하고 따라 웃는다.
“이제 드라마가 시작하는데. 우리 서준이, 하준이 아빠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
모를 리가 없었다. 당장 나가기 전까지 아빠가 엄마의 눈치를 보다가 허락을 받고 나갔으니까.
“아까 우승이 형네 집에 다들 모였다고 인증샷이 올라왔었어요.”
“아빠도 나왔니?”
“아니요. 하준이 씻기고 출발하셨으니까. 지금쯤 막 도착하셨을 거예요.”
‘연사모’의 모임이라며 가끔 김우승의 SNS에 인증샷이 올라올 때가 있었다.
술을 마시는 경우에는 나 대신 아빠가 참석하곤 했는데. 그때에도 절대 인증샷에 아빠가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곤 했다.
“아빠가 우리 서준이를 생각해서 그런 거야. 서준이도 알지?”
“네! 실제로 마음이 맞아서 잘 지내는 건데. 괜히 아들을 이용해서 연예인들과 친분을 쌓는다는 말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는 거라고 했어요.”
“우리 아들 다 컸네?”
“헤헤. 아직 다 크려면 멀었어요. 하준이도 제대로 안고 다니지 못하니까요.”
그렇게 엄마와 수다를 떠는 사이. 광고가 끝나고 ‘재벌가 금동이’가 시작되었다.
재벌가 준양 그룹을 노리고 증거를 수집하던 특수부 소속 이태성 검사.
결정적인 증거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함정이었고. 그 함정에 빠진 결과 특수부에서 좌천당하고 마는데.
-다 끝났습니다.
-여기서 포기하겠다고요? 검사님을 위해 나섰던 우리 금동이는 어떻게 하고요?
-일개 검사가 재벌을 이기겠다는 생각이 오만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금동이는··· 다 부족한 내 잘못입니다.
결국 분한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마는 이태성. 그런 약해진 모습에 이지연은 그를 안아주고 마는데.
그와 동시에 은은하게 깔리는 달달한 OST.
“어머. 저 둘 사이에 드디어 불꽃이 튀는 걸까.”
본격적인 러브라인의 시작을 알리는 OST에 엄마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무려 20화에 다다라 터진 달달함이었다. 아마 엄마처럼 두 사람의 본격적인 시작에 발을 동동 구를 안방 시청자들이 전국에 한가득일 터였다.
-지연 씨.
-자, 잠시만요. 우리 이러면 안 돼요. 제게는 금동이가 있어요.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진심을 담은 이태성의 눈빛에 흔들리고 마는 이지연. 서서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고개.
그걸 보던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른다. 장장 두 달에 걸친 두 사람의 밀당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으니까.
“어머. 이래서 오늘 모여서 술 한잔하면서 보겠다고 한 거구나.”
“예고편을 보더니. 오늘 방송은 다 같이 모여서 봐야 된다고 형들이 호들갑을 떨었어요.”
마냥 핑계만은 아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엄마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 아빠도 엄마를 케어하는데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 전에 오늘 하루 자유의 시간을 얻은 것이다. 어차피 남자들끼리 김우승의 집에서 한잔하고선 자고 올 테니.
엄마가 걱정되니 조금만 마시고. 새벽에 눈을 뜨면 바로 집으로 돌아올 아빠였다.
“어머어머. 역시 김나희 작가야.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치는 순간. 엄마의 발 동동 구름이 절정을 달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이어질 엄마의 심경 변화를 기다렸다.
‘재벌가 금동이’는 주말 연속극. 그것도 50부작의 이제 절반을 향해가는 상황이었으니까.
무슨 말이냐고?
-네 이놈! 고작 검사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회장님. 지연 씨를 이 집안에서 내쫓은 건. 다른 사람도 아닌 회장님 본인이었습니다.
-아직 신씨 가문의 사람이다. 네깟 놈이 넘볼 신분이 아니란 뜻이다.
-그래서 서약서까지 쓰게 만들어서 금동이에게 떼어내셨습니까?
-고얀지고! 지금 네놈이 무슨 생각으로 접근했는지 내 모를 줄 아느냐!
주말 드라마답게 짧은 행복 다음 막장 전개가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서준아. 김나희 작가 너무하는 거 아니니?”
역시. 두 사람의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 엄마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달달한 러브 스토리에 김나희 작가를 연신 칭찬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
- 아니. 오늘 금동이 전개 실화야? 좀 달달각 나오나 싶었더니 두 사람 교통사고로 마무리한다고?
└ 다들 차 배우 보느라 잊고 있었나 본데. 금동이 막장의 본고장 주말 드라마야. 이분들 아침 드라마 보면 까무라치겠네.
└ ㅇㅈ 아침 드라마급 막장이었다면 사실 금동이가 신금동이 아닌 다른 남자 아이였겠지. 라면서 화를 내는 나한테 엄마가 덤덤하게 말하더라. ㅋㅋㅋㅋ
└ 김나희 작가가 대본을 잘 쓰고,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니 몰입이 엄청난데. 그러니 더 사람들에게서 난리가 나는 듯.
└ 그거 앎? 사람들이 막장 전개다 뭐다 난리가 났지만. 정작 시청률은 더더 오르고 있음. ㅋㅋㅋㅋ
└ 내가 봤을 땐 올해 연말 시상식엔 ‘재벌가 금동이’ 팀이 수상 소감 말하러 계속 올라갈 거 같은데.
아직까지 사람들의 반응은 역시 이럴 줄 알았다였다.
“김 작가. 이거 괜찮겠어?”
“상승세가 조금 멈췄었잖아. 원래 자극적일수록 입소문도 더 타고. 시청자들이 본방사수를 한다니까.”
“그건 맞긴 한데.”
이제 절반까지 온 상황. 이대로 ‘우리 훈훈하게 잘 지냈어요.’같은 전개를 했다간 등산 후 내려가는 시청률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랬다.
막장 전개의 가장 단골 소재.
기억 상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준이는 어떻게 생각해?”
김나희 작가의 물음에 나는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아마 방송 나가고 나면 또다시 난리 나지 않을까요?”
개연성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그런 막장 전개에 개연성을 부여할 테니.
누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