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세트장의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거기! 소품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 몰라? 빨리 위치 수정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조명 위치 확인했습니다.”
그런 소란스러움 너머에 일찍부터 도착해 감정을 잡기 시작한 중년 배우들이 보인다.
대본을 마저 훑던 중년 배우 김준규가 옆에 있던 김동화를 향해 툭 하고선 농담을 던졌다.
“대사 까먹으면 안 돼. 알지?”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오늘 NG 내는 사람이 저녁에 고기 사는 거다. 콜?”
“콜. 나야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데.”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사이.
“안녕하세요!”
해맑은 목소리가 세트장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 서준이 왔어?”
“일로 와. 여기 따뜻해. 볼 빨간 거 봐라. 감기 걸리겠다.”
두 중년 배우가 호들갑을 떨며 자신들 사이에 차서준을 앉혔다.
아역 배우 차서준과 중년 배우 김준규, 김동화. 이 사이에 많은 나이 차이에 어색함이 있을 법도 했지만.
“저 여기 엄청 공부하고 왔어요. 오늘 진짜 잘할 수 있어요.”
그사이에 앉아 조잘조잘 떠드는 차서준의 얼굴에는 해맑음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차서준의 말에 두 중년 배우가 어이쿠 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서준이가 자신이 있다고? 그러면 나도 긴장해야겠는데?”
“긴장 바짝 해. 괜히 NG 내서 우리 서준이 감정 흐트러지게 하지 말고. 그지?”
“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여기 이 부분 있잖아요.”
차서준이 메고 온 가방 속에서 여러 흔적이 묻은 대본을 꺼내자. 그걸 보는 두 중년 배우의 눈동자가 빛났다.
“오늘 여기를 이렇게 대사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곧바로 대사를 내뱉는 차서준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엔 흐뭇함이 가득했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준비되셨습니까?”
그런 그들의 대화가 끝난 건.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김준혁 PD가 촬영 시작을 알렸을 때였다. 그 뒤를 따라 김나희 작가 역시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형님. 특수부에서 냄새를 맡았어. 이거 어쩔 거요.”
“뭘 어째. 지들이 파봤자 증거 없다. 아버지만 건재하신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고.”
준양 그룹이 재계 서열 10위권에 머무른다 한들 재벌이었다. 도끼질 몇 번에 쓰러질 나무가 아니란 뜻.
“이거 터지면 형님이 제일 타격이 커. 명심해.”
“뭐 인마? 내가 잡혀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거냐?”
“형님만 다치나. 나도 다칩니다. 같이 한 일 아니우. 괜한 걱정은 털고 지금 상황 수습에만 집중합시다.”
확실하게 처리했으니 증거는 없다. 허나 세상 어디 뜻대로만 흘러가겠는가. 재벌 저격수라 불리는 놈들이 칼을 겨눈 이상. 자칫하다간 흘린 부스러기라도 주울지도 몰랐다.
지금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둘째가 자신을 찌를지도 몰랐다. 두 사람 모두 다칠 테지만 더 다치는 사람은 자신일 테니.
“금동이는 어쩔 거요. 아주 그냥 막내 그놈 어릴 적처럼 싸고 도시더만. 여차하면 막내 놈처럼 회사를 물려주려 하진 못하겠지만. 지분이라도 툭 크게 떼어줄 기세던데.”
둘째의 말에 첫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미 부회장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었지만. 최종 목적지인 회장이라는 왕좌에 앉기까지는 한 걸음이 부족했다.
어떻게 온 이 자리던가. 아버지인 신준양 회장이 막냇동생 신금철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선 사고로 죽여 버렸다.
그렇게 천륜까지 져버린 자신인데. 단 하나의 지분도 금동이에게 넘어가는 건 볼 수가 없었다. 혹여나 회사에 발을 걸치고 있다가 무언가를 알아차리면 안 될 테니.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마침 여기 다 계셨네요.”
금동이가 저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순간 표정을 굳어진 두 사람이었지만. 이내 태연하게 자리를 권했다.
“금동이 왔구나. 여기 앉아라.”
“그런데 기사도 안 보냈는데 어떻게 왔지? 할아버지가 기사라도 보내줬어?”
두 사람이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
“들어오세요. 마침 여기 큰아버지들 다 있으시네요.”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부회장님들.”
금동이의 뒤를 따라 검사 이태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표정이 확 굳어버리는 두 사람.
“큰아버지. 그리고 작은아버지. 여기 계신 검사님이 우리 아빠의 사고가 우연이 아니래요. 그래서 제가 자세한 조사를 위해 모시고 왔어요.”
그런 두 큰아버지를 보면서 또박또박 말하는 금동이. 그 모습이 흡사 제 할아버지인 신준양과 몹시 닮았다.
“글쎄. 몇 년 전 그날 이상한 차량 한 대가 CCTV 한쪽 구석에 잡혔지 뭡니까. 동생 분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이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와 동시에 무섭게 내려앉는 침묵.
“커엇! 좋습니다. 최고였어요!”
그 침묵을 깬 것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오케이를 외친 김준혁 PD였다.
방금 장면이 어땠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김준혁 PD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찾아온 김나희 작가 역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어이쿠. 우리 서준이 때문에 내가 촬영을 하면서 긴장을 멈출 수가 없다니까.”
“쯧쯧. 노오력을 하라고. 이 나이 먹고 서준이랑 비교당하면 그게 무슨 망신이야.”
말은 저렇게 해도. 김준규나 김동화 역시 엄청난 연기 내공을 보유한 중년 배우들이었다.
비록 주말 드라마나, 아침 드라마에 자주 얼굴을 비춰 가진 연기력보다 박한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었지만.
“시청자들이 재벌가의 냉혹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엄청나대요.”
“그래? 우리 서준이 말이라면 그렇겠지.”
‘재벌가 금동이’를 통해 연기력을 재조명받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 저 두 사람이 나를 예뻐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잘하고 잘하니까. 전자는 연기를 말하는 거고, 후자는 사람에게 잘한다는 의미였다.
“오늘 촬영 끝나고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시간은 있니?”
“네! 좋아요!”
시대가 변하면서 촬영장 풍경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과거 촬영 전부터 일찍 찾아와 선배 연기자들과 호흡을 맞추고. 또 촬영이 끝나고 같이 친분을 다지던 시대는 지나갔다.
젊은 배우들에게서. 특히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필요한 촬영에서만 벤에서 나와 연기를 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다.
그런 삭막해져버린 촬영장 풍경 속에서. 꼬박꼬박 선생님 하며 따라다니는 내가 어찌 귀엽지 않을까.
“오늘은 내가 쏜다. 우리 서준이 어떤 고기가 먹고 싶으려나.”
“저는 삼겹살이 좋아요!”
“뭐? 으하하, 그러면 내가 아는 진짜 맛집으로 데려가야겠는데?”
“고맙습니다!”
단순히 식사만 하는 자리가 아니다. 오늘 촬영이 어땠는지, 또 아쉬운 점이 무엇이 있었는지 편하게 내려놓고 대화를 나눈다.
거기에 앞으로 있을 촬영 분량에 대한 이런저런 대화도 오가는 시간이 바로 촬영 이후 배우들만의 자리였다.
“어머, 오늘 서준이랑 같이 맛난 거 드시러 가시나 봐요.”
그런 상황을 눈치챈 김나희 작가가 슬쩍 다가왔다.
“우리 작가님도 같이 가면 좋지. 서준이도 그렇지?”
“네! 오늘 삼겹살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작가님도 같이 가요.”
“사실 촬영이 끝나고 비밀 모임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안 그래도 우리 주연 배우님들 모시고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전개야 이미 김나희 작가의 머릿속에 있다곤 하지만. 때로는 그 배역들을 연기하는 배우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뜻밖의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우리야 작가님의 대본이 대박으로 나오면 언제나 기쁘지. 지금 우리 드라마가 다 잘되고 있는 이유가 다 있잖아.”
“그렇제. 우리 감독님, 작가님. 그리고 서준이 덕분 아니겠어?”
아주 손발이 척척 맞는 두 배우의 치켜세움에 김나희 작가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오늘 어려운 장면이었는데 고마워서 제가 살게요. 안 그래도 힘을 빡 주면서도 괜찮을까 싶었는데. 괜한 우려였어요.”
단순히 대사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빌드업 해온 막장이 폭발하기 직전의 긴장 최고조가 바로 오늘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김준규, 김동화. 그리고 내가 끝내주게 뽑아낸 것이다. 대사를 넘어선 행동, 손가락 움직임의 작은 몸짓. 그리고 표정을 담아서.
아마 오늘 촬영분이 방송에 나가면 또다시 시청자들에게서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준욱이 형! 형도 같이 가요.”
“하하, 그럴까? 저도 껴도 되겠습니까?”
“우리 주인공은 당연히 같이 가야지. 자자,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일어나서 이동합시다. 장소는 내가 문자들 넣어줄게.”
촬영이 끝나고도 방송국에 돌아가 본격적인 일을 시작해야 하는 김준혁 PD만 이쪽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차서준의 7살 마지막 날이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올해는 서준이랑 같이 새해를 맞이하게 되어서. 엄마는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아쉬워해야 할지 모르겠어.”
“저는 너무 기뻐요!”
저렇게 말하면서도 엄마의 표정이 밝은 건. 지금 방송되고 있는 주말 드라마 ‘재벌가 금동이’가 대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에게 다시’, ‘폭군의 세자’, ‘금괴 소동’. 3연속 대성공을 거두면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엄마 손을 잡고 시장을 가면. 돈을 주고 사는 물건보다 덤으로 받는 것들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시장 주인 할머니들이 ‘우리 금동이 힘내렴. 이건 금동이에게 주는 내 비밀 서비스여.’ 저렇게 말하며 손을 아무리 내저어도 막 떠넘겨버렸다.
서비스를 받는다는 것보다. 오히려 아들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모습이 좋은지.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씩 나와 함께 시장을 가는 엄마였다.
“우리 서준이 이제 내일이면 8살이 되고. 학교에 가야 되겠네?”
“맞아요. 이제 내일부터는 저도 초등학생이 된다니. 너무 신기해요.”
이 차서준의 세상은 김도경이 살던 세상과 다른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었다.
김도경 시절 ‘누구 법’이라고도 불리는 청탁금지법이 아역 배우들에게 치명적으로 다가갔었다. 법안 발의 전까지 출석에 문제가 없던 촬영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
그런데 이 차서준의 세상에선 내가 워낙 유명해진 덕분에 그 부분에 있어 유연성이 더해졌다고 들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촬영은 계속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우리 금동이가 없으면 시청자들이 난리가 날 테니까. 그렇지?”
“맞아요!”
출석 인정에 대한 유연성이 더해진 것. 추후 시험에서 까다로운 일정 기준 이상의 성적을 거둘 수만 있다면. 촬영에 지장이 없게 되었다.
“서준이 인기가 진짜 엄청나긴 하네.”
“다들 좋게 봐주셔서 그런 거 같아요.”
“여보. 이제 밖에 나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우리 서준이를 금동이라고 부른다니까요.”
시청률 40프로 고지를 목전에 둔 ‘재벌가 금동이’이는 특정 나이대 어르신들에게 있어 금동이 신드롬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었다.
저녁 8시만 되면 주말 장사를 하던 분들조차 TV 채널을 고정하게 만들었으니.
“제야의 종 울리기 전에 우리 얼른 올해 마지막 케이크에 초 꽂아요.”
“그럴까?”
“네! 하준이도 얼른 해달라고 자꾸 몸을 흔들잖아요.”
아직 먹을 순 없지만. 케이크를 향해 두 손을 바둥바둥하는 동생이었다.
잠시 후.
새해맞이 1분 전이 되자. 화면 오른쪽 아래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 10, 9, 8 ··· 3, 2, 1.
마지막 1을 외침과 동시에 종소리가 울리고. 나는 촛불을 끄고선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8살.
새해가 시작되었다.
이제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