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김도경 시절의 크리스마스는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보려 해도 생각나는 게 별로 없었다.
그저 늦은 저녁에서야 엄마와 누나가 어딘가를 다녀와 툭 던져주던 먹을 거 몇 가지 정도? 그렇기에 김도경에게 있어 크리스마스는 별로 좋은 날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크리스마스가 너무나도 기다려졌다. 작년 처음 마주한 따스한 크리스마스가 눈물이 나올 만큼 행복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감동에 몸을 부르르 떨 정도였는데. 올해 크리스마스는 작년보다 몇 배는 더 행복한 날이 되어 있었다.
“어엉! 엉!”
그 이유는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동생 때문. 가끔은 내가 옆에 있어도 엄마를 찾으며 울어서 서운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손을 잡으면 활짝 웃을 때면 천사가 따로 없었다.
“서준아. 이제 주차장에 들어간다.”
“이제요?”
“그래. 오늘따라 차가 너무 많아서 오래 걸렸네. 우리 하준이 엄마 조용히 코 잘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마워요.”
“빠아!”
1박 2일의 크리스마스를 보낼 경제적 여유가 생겼지만. 아쉽게도 올해 크리스마스도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동생이 잠자리에 매우 예민하기 때문이었다. 호캉스를 즐겨보려 했지만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자지 않는 동생 때문에 패스.
그래서 오늘은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물고기들을 구경하러 왔다. 아쿠아리움에 왔다는 말씀.
“사람이 진짜 많아요.”
“아무래도 크리스마스이니까. 오픈하기 한참 전인 아침 일찍 나왔어도 주차하는 데까지 엄청 시간이 오래 걸렸을 정도니.”
“아빠, 고맙습니다. 오늘 엄마, 아빠, 동생이랑 여기 와서 너무 기뻐요.”
“우리 서준이가 그렇게 말하니. 아빠가 힘이 펄펄 나는걸.”
도로 위에 한참을 서행하느라 피로한 눈가를 주무른 아빠였지만. 내 꾸벅 인사에 피로가 눈 녹듯 사라져 보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더 거북이걸음처럼 움직이고 나서야. 우리 씽씽이가 주차장에 멈출 수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 하준이가 좋아하는 물꼬기들 보러 갈까?”
“꺄아!”
엄마가 자기를 보며 웃어주자,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방긋 웃는 동생이었다.
가림막으로 찬 바람을 막은 유모차에 앉은 동생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인다. 이만큼 많은 사람들을 구경한 것이 처음이기 때문.
잠시 그런 낯선 상황에 겁에 질려 울먹울먹하려는 순간.
“우루루 까꿍!”
“꺄아! 엉!”
내가 재빨리 나섰다. 시야에 내가 들어오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동생이 빵긋 웃는다.
크리스마스답게 아쿠아리움에는 사람들이 미어터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복잡한 날에 여기에 온 이유.
“꺄아! 뿌우!”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내뱉으며 물고기를 향해 손가락을 마구 흔드는 동생 때문이었다.
예전이라면 이런 비싼 아쿠아리움에 온 가족이 가는 건 큰 결심이 필요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엄마도 ‘피치노’의 한정판 디자이너로서 돈을 벌기 시작했기에 아무 문제가 없어졌다.
“신기하네.”
“뭐가요?”
“서준이는 동물들을 좋아했거든. 그래서 동물원에 가자고 그렇게 졸랐는데. 우리 하준이는 물고기를 좋아하네.”
엄마 역시 그런 동생이 신기한 모양. 이미 눈빛이 초롱초롱해진 동생의 시선이 유리 너머 물고기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바쁘게 움직이는 물고기를 따라. 동생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열심히 움직인다.
“저기 봐. 엄청 큰 물꼬기지?”
“꺄아!”
TV로만 보던 물고기를 직접 보니 신기한지 동생이 방긋방긋 웃는다. 상어를 실제로 보면 무서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저리 좋아하는 걸 보면.
거대한 꼬리를 흔들며 움직이는 상어의 뒤를 쫓느라. 동생의 작은 머리가 바쁘게 흔들렸다.
“서준이가 착하네.”
“이런 모습은 많이 남겨둬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 동생의 귀여운 모습들을 내가 열심히 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동생의 지금 저 사랑스러운 모습들을 볼 수 없을 테니까.
“서준이랑 하준이. 같이 사진 찍어 줄게.”
이런 여행의 끝에 남는 추억은 사진이었다. 엄마의 그 지론에 따라 나는 동생과 함께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들어갈 때에도 전쟁이었지만. 크리스마스에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일 역시 한바탕이 필요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아쿠아리움을 다녀오는데 길 위에서 몇 시간을 소비했을 정도였다.
“아빠! 제가 어깨 주물러드릴게요.”
“정말? 우리 서준이가 그래 주면 아빠는 힘이 펄펄 날 거 같은데?”
“여기 앉으세요.”
지친 기색으로 털썩 소파에 앉은 아빠의 어깨를 작은 손으로 열심히 주무르자. 시원하지도 않을 텐데 어이쿠 시원하다 하는 표정을 짓는 아빠였다.
그런 아빠의 반응에 나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때요?”
“너무 좋은걸. 아빠도 오늘 열심히 걷느라 고생한 우리 서준이 발을 주물러줘야겠다.”
이윤이 매우 많이 남는 거래가 되어버렸다. 나는 작은 손으로 낑낑거리며 아빠의 어깨를 조물조물했는데. 아빠는 커다란 손으로 내 발을 꾹꾹 눌러주었으니까.
제법 많이 걸었던 터라 발이 조금 아팠는데. 아빠가 주물러주니 피로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보다는 밀려오는 행복감이 더 컸다.
“너무 시원해요!”
“그래? 하준이도 해달라고?”
“뺘아!”
나와 아빠가 재밌어 보였음일까. 동생이 짧은 두 팔을 열심히 흔들며 자기도 껴달라는 듯 소리쳤다.
그렇게 잠시 소동이 지나가고. 우리 가족은 행복한 크리스마스 저녁을 위해 식탁에 둘러앉았다.
“이거 도현 삼촌이 엄마, 아빠 선물로 드리랬어요.”
내가 꺼내온 건 고급 와인이었다. 서도현이 꼭 크리스마스 당일 날 선물하라는 당부와 함께 받은 고급 와인.
한 병에 몇백 만원씩 하는 그런 와인은 아니었으나. 이런 크리스마스의 밤을 장식하기엔 충분한 고급 와인이었다.
“어머? 정말 대표님이 주라고 하셨니?”
“네! 엄마, 아빠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래요. 저번 추석에 엄마가 보내주신 음식들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면서요.”
“그러니? 별로 많이 챙겨 보내지도 못했는데. 대표님께 엄마, 아빠가 감사해했다고 꼭 말씀드려주렴.”
“네!”
단순히 음식을 보냈다 하여 이렇게까지 챙길 리가 없었다. 이미 회사 차원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집으로 보냈으니까.
서도현이 엄마, 아빠에게 정말 고마워하는 건.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준다는 데에 있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그 이후부터 아낌없는 신뢰를 보내온 것에 대한 고마움.
아역 배우의 소속사와 부모들의 참견으로 인하여 언쟁이 일어나는 경우는 흔했다. 오죽하면 부모의 욕심에 아역 배우가 망가지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엄마, 아빠는 정말로 처음에 했던 그 다짐을 잘 지켜오고 있었다. 내 모든 활동을 전적으로 서도현에게 맡겨두었다.
서도현은 4연속 대성공이라는 결과로 그 믿음에 보답했고.
“그러면 우리 서준이가 사 온 케이크랑 같이 짠할까? 아빠가 가서 잔 가지고 올게. 서준이는 뭐 마실래?”
“저는 오렌지 주스요!”
아빠가 냉장고에 오렌지 주스와 잔을 가지러 간 사이. 옆에서 소외되었다 느꼈는지 동생이 소리친다.
“어엉! 마아!”
“어머? 우리 하준이 형이랑 엄마 부른 거야?”
그럴 리가. 다만 정말 나를 볼 때는 엉! 엄마를 볼 때면 마아! 외치는 것이. 동생에게 무언가 특별함이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 귀여운 동생의 볼을 쿡 찌르며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던졌다.
“우리 하준이는 오늘 형이랑 잘까?”
“뺘아!”
저렇게 손발을 열심히 흔들면서 소리를 지른다는 건 좋다는 뜻.
“엄마, 아빠. 오늘은 제가 동생이랑 같이 잘게요.”
“정말?”
“괜찮을 거예요. 아까도 차 뒤에서 하준이랑, 서준이랑 잘 있었잖아요. 오늘 활동도 많이 해서 하준이가 밤에 깨진 않을 거예요.”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동생의 시선은 어젯밤 아빠와 함께 열심히 만든 크리스마스트리에 꽂혀 있었다.
작년에 함께 했던 트리가 올해도 거실에 등장한 것이다. 반짝이는 전구들이 신기한지. 까만 눈동자에는 들어왔다 사라지는 불빛들이 비치고 있었다.
“자,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서준이, 하준이. 메리 크리스마스!”
그렇게 와인과 오렌지주스가 담긴 세 개의 잔이 짠하고 부딪친다.
“오늘 정말 서준이가 하준이랑 잘 거야?”
엄마가 묘한 표정으로 내게 다시 한번 물었다. 보통은 내가 동생과 잔다고 하더라도 엄마가 괜찮다고 하셨는데.
“네! 새벽에 마구 울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동생이랑 같이 잘게요. 그래야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주시잖아요.”
응? 정확하게 아빠의 표정을 읽자면 저런 의미가 되겠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
올해는 가벼운 선물을 받고 싶다고 했기에 선물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괜히 동생과 자는 방에 들어왔다가 잠에서 깨 우렁차게 울까 걱정이 된 모양.
그럴 줄 알고 내가 해결책도 가지고 왔다.
“저 이번에 유치원에서 배웠는데요. 요즘 산타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트리 아래에다가 두고 간대요.”
“그, 그렇지? 작년에 산타 할아버지가 방까지 들어가느라 시간이 부족했대요. 올해는 트리 아래에다가 두고 가신다고 아빠한테 연락 왔었어.”
“맞아요!”
아빠가 어색한 연기톤으로 말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밤이 찾아오고.
“엄마가 우리 서준이, 하준이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네! 저도 엄마 사랑해요.”
어느새 꾸벅 잠에 빠진 하준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엄마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와인 기운이 올라오셨는지 날 보는 엄마의 얼굴이 붉다.
“그러면 서준이. 동생이랑 잘 자.”
“네. 엄마도 아빠랑 메리 크리스마스!”
그렇게 일어난 엄마가 방문을 나서는데.
“여, 여보? 어디가?”
“씻으려고요. 땀을 많이 흘렸더니 찝찝하네.”
“그러면 씻는 게 맞긴 한데···. 어···.”
닫히기 직전의 방문 너머 엄마, 아빠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농담처럼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동생이 하나 더 생겼으면 좋겠단 말을 엄마, 아빠에게 하긴 했었지만. 아니겠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동생의 코 잠든 얼굴을 보며 그 생각을 치웠다.
에이, 설마.
*
- ‘재벌가 금동이’ 방송 6화 만에 시청률 30% 돌파. 가파른 시청률 상승의 끝은 어디까지?
└ 미쳤네. 아무리 CBS 주말 연속극이라지만. 6화 만에 시청률 30프로 넘는 거 실화냐? 이 정도면 진짜 40프로 넘어가겠는데?
└ 실화임. ㅋㅋㅋ ‘재벌가 금동이’ 시작 전에 했던 전작의 시청률을 2화 만에 돌파했는데. 지금 어디까지 성장할지가 관건임.
└ 무엇보다 드라마가 재밌잖아. 어제 금동이 엄마가 큰아버지 찾아가서 남편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밝히겠다고 선언하는 거 보니까. 다음 주 시청률은 더 올라갈 듯?
└ 금동이 큰아버지들이 금동이도 죽이려고 하는데. 과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려나. 우리 금동이 다치면 안 돼!
└ 우리 엄마 금동이에게 푹 빠졌음. ㅋㅋㅋ 큰아버지들 보면서 나쁜 새끼들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보는 중. ㅋㅋㅋ
└ 금동이랑 금동이 엄마 오해도 빨리 풀렸음 좋겠다. 금동이가 엄마한테 속에도 없는 말 하고. 뒤돌아서 눈물 흘릴 때 진짜 너무 슬퍼. 예고편 보니까 다음 주에 단둘이서 만나던데.
‘재벌가 금동이’의 6화가 지났을 무렵. 역대 CBS 주말드라마 중에서도 손꼽히는 시청률 성장 추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쉽네.”
“왜요?”
“조금만 더 빨리 시작했으면. 서준이 네가 상도 제법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
정말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서도현의 말처럼. 올해는 시상식에 갈 일이 없었다. 올해 중순에 했던 주말 드라마가 36.8%라는 시청률로 마감을 했으니 거기가 받을 터였다.
‘재벌가 금동이’는 최고 시청률이 기록될 내년 시상식에서 풍성하게 챙겨줄 예정이었다. 2년 연속 챙겨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폭군의 세자’는 QTV에서 방영을 했으니 연말 시상식이 없었다.
“저는 오히려 좋아요.”
“왜?”
“이번 새해는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이랑 같이 맞이할 수 있잖아요. 내년에는 또 못할 거 같아요.”
“그건 그렇지. 지금 추세라면 내년 연말에는 서준이 네가 무조건 시상식에 초대될 테니.”
그랬다.
지금과 같은 성장세라면 40프로를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상황.
올해는 넘어가더라도 내년에는 무조건 시상식 참여가 확정일 터였다.
“오늘은 세트장으로 간다고?”
“작가님이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한 장면 촬영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