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CBS ‘재벌가 금동이’ 연출을 맡게 된 김준혁 PD에겐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캐스팅이 가장 중요한데.”
대본이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김나희 작가의 능력은 이미 한 차례 경험을 했으니까. 거기에 지난 1년 동안 이를 갈며 준비한 대본이다.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문제는.
“우준욱 쪽은 뭐래?”
“아직 심사숙고 중이래요. 아시잖아요. 다른 쪽에서도 괜찮은 제안 하나 들어갔다는 거.”
“거참. 더럽게 간 보네.”
캐스팅이었다.
지금까지처럼 일반 가정을 배경으로 한 주말극이었다면. 김준혁 PD가 지금처럼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었다.
하지만 ‘재벌가 금동이’는 재벌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암투와 막장, 그리고 사랑 이야기였다.
그 말은 시청자들이. 그것도 주 시청자들인 어머니 세대들이 유치함을 느끼지 않도록 배우들의 연기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주말 연속극에 나오려고 하면서 그 정도의 연기력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 그것도 김준혁 PD와 김나희 작가의 기준을 통과한 후보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신준양 캐스팅은 어떻게 됐어? 그게 제일 최우선이라는 거 알잖아.”
“그것도 지금···.”
말끝을 흐리는 거 보니 물으나 마나다. 저 배역 역시 아직까지 진전이 없다는 뜻.
“그냥 차선으로 틀면 어떨까요?”
“안 돼. 김나희 작가 성격 몰라? 지금까지야 막힘없는 진행 단계니까 예예 하는 거지. 저쪽도 수틀리면 꼬장꼬장해진다.”
작가 김나희.
괜히 CBS에서. 그리고 김준혁 PD 본인이 야심차게 데려온 작가가 아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주말드라마가 중반부를 넘어섰음에도 시청률 23%라는 부진한 성적을 털어내겠다는 CBS의 의지가 담긴 선택.
그렇게 김준혁 PD는 부스스한 머리를 헝클이며 골머리를 싸매야 했다.
분명 그랬었는데.
“뭐?”
“우준욱이 하고 싶답니다. 길게 시간 끌 필요 없이 오늘 도장 찍자는 대요?”
안 그래도 김준혁 PD가 들은 소문이 하나 있었다. 최근 감독들이나 연출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떠도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차서준을 잡으면 캐스팅이 쉬워진다.’
이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역 배우 차서준이 선택한 작품들이 모두 대박이 났으니까. 그냥 대박도 아닌 초대박들.
그렇기에 차서준의 차기작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따라가라는 농담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역 배우 차서준이 선택한 차기작이 주말 드라마였다. 그것도 한 차례 손발을 맞춰 검증된 김준혁 PD와 김나희 작가의 조합.
농담으로 치부했던 김준혁 PD는 그 소문의 위력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한다고? 저번까지는 간만 봤잖아. 심지어 우리 까고 저쪽으로 가려고 한다며. 내부적으로 그렇게 결론 나오고 있다며 그랬으면서.”
“그러게요. 그런데 차서준 캐스팅 기사 보자마자 연락이 왔어요. 하겠다고. 얼마나 다급한지 지금 문자 주면 바로 도장 들고 뛰어올걸요?”
“하하.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우준욱도 괘씸하긴 하지만 김 작가가 원하는 배우니. 다만 촬영장에선 다루기 쉬워지겠어.”
김준혁 PD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저 지금까지 연출을 맡았던 수많은 캐스팅 중 아역 배우 하나가 들어왔을 뿐이다.
그랬는데.
아역 배우 차서준이 마치 흥행 보증 수표라도 되는 것처럼. 고민을 해보겠다던 배우들이 앞다투어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오고 있었다.
그 놀람의 끝은.
“예. 김준혁입니다. 예예. 예?”
배우들의 선생님. 원로 배우 김순철의 연락을 받았을 때 절정을 찍었다.
*
김순철 선생님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안 그래도 ‘너에게 다시’에서 인연을 맺은 뒤. 주기적으로 가끔씩은 찾아뵙곤 했었다.
저번 ‘금괴 소동’ 촬영을 마치고 나서도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그렇기에 김순철 선생님의 용건이 무엇인지 예측이 가질 않았다.
만나보면 알겠지.
“그래. 이번에 주말극에 들어간다면서? 내 서준이 문자를 보고 알았구나.”
“네, 할아버지. 대본을 봤는데 엄청 재밌어서 하기로 결정했어요.”
“잘했다. 배우가 하고 싶은 연기를 해야지. 성공만 쫓다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연기가 무엇인지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나를 보는 김순철 선생님의 눈빛엔 흐뭇함이 가득했다. 어찌 예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3연 성공으로 인하여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 배우가 차서준이다. 안정적인 성공이 보장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선택해도 될 텐데.
정작 나는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주말드라마를 선택해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면서.
연기, 그리고 배우에 진심을 보이는 7살 아역 배우가 김순철 선생님의 눈에는 사랑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요즘 이야기를 좀 들어 보니. 주말극 말고도 많은 제안들이 갔다고 들었는데.”
“그렇긴 한데. 제가 주인공만큼 비중이 많은 작품은 많지 않았어요.”
“허허. 좋은 자세구나. 배우란 모름지기 배역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지. 아무리 작품이 성공한다 한들. 그 안에 내 자리가 없다면 퇴보하는 법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말은 주말드라마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서준이 네 연기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겠다만. 쉽게 생각해서도 아니 된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번 주말드라마를 하면서 많은 선배님들, 그리고 선생님들에게서 배울 생각이에요.”
“으허허. 맞다. 비록 주연을 하기엔 여건상 어려운 배우들이지만. 그 연기력만큼은 수십 년의 경력들이 쌓였으니 말이다.”
사실 김순철 선생님이 저 이야기를 꺼낸 것도. 충고가 아닌 배움의 기회로 삼으라는 뜻이었다.
김순철 선생님이 이런 덕담이나 나누자고 이 자리까지 나를 불렀을 리는 없다. 그 말은 오늘 나를 부른 용건이 따로 있다는 의미.
“할아버지. 그런데 ‘재벌가 금동이’와 관련해서 해주실 말씀이 있다고 했잖아요.”
내가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묻자.
“내 이번에 서준이 너랑 같이 ‘재벌가 금동이’의 신준양을 하기로 했다. 김 감독에게 연락하니 좋아하더구나.”
김순철이 깜짝 놀랄 만한 대답을 꺼냈다.
“저, 정말요?”
“허허. 그래. 저번에 같이 작품을 해보니 오랜만에 열의가 살아나더구나. 게다가 이번에는 시작부터 같이 촬영한다니.”
이건 의외였다.
안 그래도 김준혁 PD와 김나희 작가가 신준양 캐스팅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는지 알고 있었다.
막장, 사랑 이야기는 주연들이 보여주되. 제목부터 들어가 있는 ‘재벌가’라는 분위기를 잡아줄 무게감 있는 배우가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눈앞의 김순철 선생님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죽하면 ‘너에게 다시’에서 그간의 카리스마를 내려놓는 연기를 보고 다들 놀랐겠던가.
수많은 작품에서 무게감 있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 대기업 회장님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배우. 그것이 김순철 선생님이었으니 말이다.
“정말 좋아요! 이번에도 같이 재미있게 촬영해요, 할아버지.”
“으허허! 그러자꾸나.”
깡충깡충 뛰는 내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김순철 선생님이었다.
김준혁 PD와 김나희 작가가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표정이 상상이 간다.
만약 김순철 선생님의 캐스팅 소식이 알려지게 된다면.
- ‘너에게 다시’에서 환상의 호흡을 보여준 김순철-차서준. ‘재벌가 금동이’에서 다시 만나다.
이런 기사들이 줄줄이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터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촬영 시작뿐이었다.
*
최종 스코어 802만 2,328명.
우지학 감독의 영화 ‘금괴 소동’이 마지막까지 스크린에서 얻은 성적표였다.
└ 미쳤네 우리 차 배우. 첫 영화로 얻은 성적이 800만 관객이네. 실화임?
└ 실화지. 그리고 내가 처음 영화관에서 봤을 땐 몰랐는데. 두 번, 세 번째 보다 보니까. 우리 차 배우의 감초 연기가 눈에 들어오더라.
└ ㅇㅈ 웃음이 터지는 장면들에서 우리 서준이가 큰 역할을 했었음.
└ 내가 왜 코미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금괴 소동’이 성공했나 분석해보니까. 배우들 중에 연기 구멍이 없었음.
└ 맞지. 가벼운 영화인데도 즐거움만 느낀 건. 배우들의 연기가 탄탄해서 가능한 거 아니겠어? 특히 우리 차 배우가 말이야.
└ 그래! 말 잘했다! 그러면 당연히 차기작도 영화로 가야지. 왜 주말 드라마로 가는데!
└ 난 그래서 더 좋은데. 이제 주말마다 우리 차 배우를 볼 수 있잖아. 심지어 재벌가 회장님을 연기하는 또순철과 같이 케미를 다시 맞춘다? 이거 못 막는다.
확실히 김순철 선생님의 캐스팅 소식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아역 배우 차서준을 보겠다며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 시청자들. 그리고 나와 김순철 선생님의 재조합을 기다린다며 말하는 20, 30대 시청자들까지.
이미 실시간 검색어에도 오른 터라. 김준혁 PD와 김나희 작가의 싱글벙글함이 멈출 줄 몰랐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연락을 해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금괴 소동’을 같이 했었던 배우 김정범이 그 주인공이었다.
- 서준아. 나랑 같이 그 감독님 영화하자니까.
“죄송해요. 엄마를 위해서 주말드라마가 꼭 하고 싶었어요. 집에서 웃고 떠들면서 같이 보고 싶어서요.”
- 쩝.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대신 다음에 나랑 또 같이 작품 하는 거다? 꼭 해야 돼. 약속해야 되는 거 알지?
“네. 꼭 그럴게요.”
저럴 만도 한 게 이번 영화를 통해 전작의 상처를 완벽하게 회복한 김정범이다. 뒤에서 수군수군하던 뒷말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
무려 8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의 주연이었다. 특히 내가 감초 역할로 주목을 받았다면. 김정범은 코믹 연기 그 자체를 선보인 배우였다.
퐁당퐁당의 바닥을 찍은 전작들 때문에 줄어들었던 시나리오가 다시 쏟아진다고 들었다. 그게 다 행운의 부적인 나 덕분이라면서 차기작을 같이 하자며 조르고 있는 것이다.
- 꼭이다!
“알겠어요.”
내게 확답을 몇 번이나 받아내고서야 전화를 끊는 김정범이었다.
계속해서 나에게 같이 해야 된다며 떼를 썼던 건. 그만큼 내가 마음에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것이 내 연기력이든, 아역 배우 차서준 그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든 말이다.
*
CBS 새 주말연속극 ‘재벌가 금동이’의 첫 대본 리딩 날이 밝았다.
확실히 주말 연속극답게 대본 리딩을 위해 모인 배우들의 연령대가 높았다.
“이야, 또 보네.”
“그러게. 이제 우리 슬슬 그만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고 그래. 그보다 간보다가 김 감독한테 찍혔다며?”
중년 배우 김준규가 무슨 소리냐는 듯 손사래를 저었다. 마치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은 채로.
“간은 무슨. 배우가 좋은 작품들 두고 저울질을 할 수도 있는 거지. 캐릭터가 겹쳐서 같이 할 수가 없어서 그랬다니까. 저쪽 배역이 진짜 괜찮았는데 그거 포기하고 온 거라고.”
“그게 간을 본 거지 뭐. 촬영장에서 김 감독에게 당하는 거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겠구만.”
“우리 김 감독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주말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 중에서. 특히 중년 배우들은 이미 서로가 친분들이 깊은 사이였다.
오늘 주말드라마 촬영장에서 본 두 사람이. 다음 날이면 아침드라마 촬영장에서 마주하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였으니까.
중년 배우 풀이 적은 한국 드라마계의 특성상. 이 자리에 모인 배우들은 서로 다 안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선생님도 이번에 같이 하신다던데?”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선생님께서 주말극에 나온 지 몇 년 만이지?”
“한 5년 가까이 되신 거 같긴 한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부셨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배우 김동화의 얼굴을 보면서. 김준규가 그걸 모르냐는 듯 타박했다. 방금 자기를 놀리던 거를 복수라도 하듯.
“차서준이 때문이잖아.”
“차서준이? 걔가 왜?”
“저번에 선생님께서 촬영하셨던 ‘너에게 다시’. 거기서 선생님이 걔를 엄청 예뻐하셨다고 하더라고.”
“아아. 그건 듣긴 했지. 요즘 차서준이가 아역답지 않게 연기력이 그렇게 끝내준다며?”
매일매일 여기저기에 출연하느라 바쁜 중년 배우들이다. 최근 떠들썩한 아역 배우 차서준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사랑 이야기나, 퓨전 사극 같은 것을 보는 취미 같은 건 없었다.
그렇기에 다들 소문만 무성한 아역 배우 차서준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오늘 한 번 보자고. 얼마나 잘하는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녕하세요! 차서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문을 열고서 아역 배우 차서준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