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 뒤로도 몇 번의 비공식 미팅이 이루어졌다. 배우들이 모두 모일 때도 있었고, 때로는 1:1 개인 미팅을 가질 때도 있었다.
그 결과.
“잘했다. 처음보다 캐릭터 비중이 확 살아났던데?”
“삼촌의 말처럼 열심히 준비하니 좋은 결과가 있었어요.”
누군가는 웃었고, 또 누군가는 속으로 분을 삼켜야만 했다.
참고로 나는 웃었다. 그것도 아주 활짝.
“이번에 경험해 보니 우지학 감독님이 참 대단한 사람 같아요.”
“그렇지. 만약 우 감독에게 그런 능력이 없었더라면. 서준이 네게 추천해주지도 않았을 거다.”
그랬다.
예상보다 우지학 감독의 일 처리 방식이 뛰어났다. 누군가의 분량을 뺏어다가, 대놓고 다른 배우에게 준다면 서로 얼굴을 붉힐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체적인 큰 틀은 유지한 채. 부분 수정을 통해 교묘하게 비중을 조절해버렸다.
그러니 누군가는 분량을 뺏겼음에도 불구하고, 표현도 못 하고 속으로 분을 삼켜야만 했다. 실제로 그 사유가 자신의 부족함에 있었으니.
“박주병은 좀 어때? 혹여나 서준이 네게 뭐라 하진 않았고?”
“네. 그냥 더 열심히 해서 복구하려는 태도만 보였어요. 저한테는 전혀 내색을 안 했어요.”
“그렇겠지. 만약 거기서 불쾌한 티를 냈다간 바로 하차당했을지도 모르니.”
하긴, 비공식 대본 리딩에서 몇 번이나 감독에게 연기 지적을 받고. 7살 배우에게 분량을 뺏겼다는 이야기를 어디 가서 하겠어.
차라리 그렇게 오점을 남길 바엔. 지금이라도 절치부심하여 복구하겠다는 자세를 보인 박주병이었다. 오히려 그 모습에 나도 플러스 점수를 주게 되었다.
그건 우지학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최종 시나리오에서는 줄어들었던 대사가 조금 살아났다.
“삼촌의 말처럼 확실히 선배님들의 연기력이 좋았어요.”
“배우 이름값보다 배역에 맞는 연기력을 우선시하는 감독이니까.”
“맞아요. 처음 흔들렸던 박주병 선배님도 결국 최종 시나리오에선 조금 더 캐릭터가 살아났잖아요.”
“그렇지.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걸 상대를 원망하기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 우지학 감독이 원하는 배우들이 그런 배우들이거든.”
오디션이야 상대를 짓눌러야만 내가 뽑힐 수 있는 경쟁이겠지만. 캐스팅이 완료된 이후에는 아니었다.
상대를 밟기보단, 오히려 함께 으쌰으쌰를 해서 시너지를 내야 하는 상황.
그런 조율이 잘 될 수 있도록 컨트롤하는 것 역시 감독의 역량이었다. 그걸 잘 수행한 감독이 우지학이었고.
“다음 주에 고사 지낸다고 했지?”
“네.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요.”
“이번 주말에는 뭐하게? 또 그 연사모였나? 모이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서도현의 물음에 대답이 고민할 시간도 없이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어딜 그런 끔찍한 소리를. 김우승과 박우형을 가끔 만나 수다를 떨 때라면 즐겁긴 했다.
하지만 얼마 전에도 모였었다. 심지어 두 사람 때문에 귀 터지는 줄 알았다고.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칙칙한 남자들끼리의 수다가 아닌 더 행복한 약속을 잡았다.
본격적인 영화 촬영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그 전에 엄마, 아빠와 함께 힐링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엄마, 아빠랑 벚꽃 나들이 갈 거예요!”
어느새 엄마의 날씬하던 배가 볼록 나왔다. 그 안에서 동생인 깜짝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뜻.
그런 엄마의 운동도 도울 겸, 사람이 많지 않은 곳으로 엄마, 아빠와 나들이를 나가기로 했다.
*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나들이를 나온 내 입에선 흥겨운 흥얼거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 같이 나오니까 너무 즐거워요.”
최근 또다시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나였다. 계속되는 우지학 감독과의 미팅에 준비도 해야 했고. 그와 동시에 사총사들도 신경 써야 했었다.
아직 연기를 공부하며, 차기작을 검토 중인 김우승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사소한 부작용은 있었다. 도와준다는 핑계로 수시로 박우형까지 종종 모였다는 것.
서도현이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엊그제도 정말 만나자는 연락이 왔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 모두에게서.
- 서준아. 이번 토요일에 우형이 형이랑 같이 저녁 먹을까? 마침 우형이 형도 촬영하면서 뭔가 떠오른 게 있는데 한번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 서준아. 혹시 토요일에 우승이랑 같이 저녁 먹을래? 마침 우승이가 차기작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면서 말하던데. 서준이 너도 본격적인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동시에 저 문자들을 받고서 얼마나 놀랐던지.
무슨 전염병도 아니고. 멀쩡하던 김우승의 문자도 어느 순간부터 박우형에게 옮았는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처럼 용건이 같을 때. 두 사람이 보내는 글자 몇 개만 바꾼 똑같은 문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였다. 서로 마음이라도 통하나.
다른 날이었더라면 오케이라는 답장을 보냈겠지만. 오늘 가족 나들이가 기다리고 있기에 거절해버렸다.
“서준이는 또 먹고 싶은 거 있어?”
“핫도그요! 감자 핫도그로요!”
핫도그는 감자가 덕지덕지 붙은 감자 핫도그가 진리였다.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장소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가족, 또는 연인들이 나들이를 나왔다.
그런 자리에 당연히 상인들이 빠질 리가 없었다. 이미 엄마 손에는 아빠와 나누어 먹는 솜사탕이 들려 있었고. 내 손에 있던 솜사탕은 입 안에서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그러면 저기 보이는 곳에서 살까?”
“좋아요! 대신 하나만 사서 아빠랑 저랑 나눠 먹어요.”
“그럴까?”
“네!”
오늘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외식하기로 했다. 그러니 감자 핫도그를 하나 사서 아빠 한입, 나 한입 사이좋게 먹었다.
“엄마. 오늘은 우리 딱 저기까지만 가요.”
“왜? 벚꽃길이 예쁜데. 끝까지 갔다 오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러면 좋긴 하겠지만 주차장에서 너무 멀어졌다. 엄마에게 있어 적당한 걷기가 좋은 거지. 저 끝까지 찍고 오기엔 걸어야 할 거리가 너무 멀었다.
“괜찮아요. 대신 사진 많이 찍어요.”
“그럴까?”
“네!”
이제 곧 본격적인 영화 촬영이 시작된다. 그러니 오늘 열심히 엄마, 아빠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남는 추억은 당시에 함께 찍은 사진들이었다. 하지만 삼각대를 세워서 촬영하기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상황.
나는 아까부터 열심히 사진만 찍고 있던 커플에게 슬쩍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사진 좀 하나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꼬마 아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커플 중 여자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진다.
“어? 차 배우다. 차서준 맞죠?”
“네. 엄마, 아빠랑 같이 벚꽃 나들이 나왔거든요. 사진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그러면 대신···.”
살짝 망설이는 여자. 이미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알기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시면 같이 사진 찍어드릴게요. 사인도 당연히 해드리고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어쩐지. 나를 알아보자마자 7살 어린이임에도 존댓말을 써준 이유가 있었다. 지금처럼 가렸음에도 알아보는 사람들은 내 팬들뿐이었으니까.
“저 차 배우 팬이에요. 진짜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지? 저 진짜 ‘너다’랑 ‘폭군의 세자’도 생방으로 다 챙겨봤어요.”
“고맙습니다.”
주변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이들 몇몇이 힐끗힐끗 시선은 던졌지만. 과거 놀이동산 때처럼 나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피치노’의 콜라보 제품 디자이너로서 엄마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가족에게 깜짝이가 생긴 것도 밝혔다.
그 인터뷰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진 내 팬서비스에 관한 이야기들까지.
그 덕분에 엄마, 아빠와 함께 다닐 때에는 무작정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동 반사처럼 사인 요청과, 사진 요청에 응했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다닐 때에는 정중하게 거절해버렸으니까.
“자기야, 거기서 잠시만 기다려봐. 저기가 배경이 예쁘게 나와요. 저쪽으로 가요.”
가족사진을 도와주면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말에 방방 뛰던 여자가 얼른 좋은 배경을 알려준다.
일부러 많은 사람들 중에서 계속해서 사진을 찍는 커플을 골랐다. 가장 예쁜 배경으로 찍어줄 것 같아서.
그 예감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돌려받은 카메라에는 우리 가족이 흩날리는 벚꽃을 배경으로 화목하게 담겨 있었다.
“고맙습니다. 진짜 잘 찍어주셨네요. 서준아, 얼른 저분들도 찍어드려야지.”
“제가 가운데에 설까요?”
“네. 그리고 단둘이도 한 장 가능할까요?”
“당연히 가능하죠. 그러면 저도 엄마, 아빠랑 한 장만 더 찍어주실 수 있나요? 사진을 많이 남기고 싶어서.”
“10장이라도 더 찍어줄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10장이라도 가능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팬이었다.
그렇게 팬서비스도 해주고. 그 과정에서 잠시 대화도 나누었다. 내 팬인 만큼 다음 작품은 무엇인지를 가장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번에 출연했었던 ‘소소한 하루’ 봤는데. 혹시 차기작 생각 중인 거 있어요?”
“아, 영화 하나 준비 중이에요.”
“저, 정말요? 혹시 이거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되는 건가요?”
“아뇨. 곧 공개될 예정이라. 제 팬 분들에게는 말해도 상관없어요.”
이렇게 떡밥도 뿌렸다.
정확하게 모든 정보를 말하면 스포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지금처럼 ‘차기작으로 영화를 준비 중이에요.’라고만 한다면?
- 오늘 차 배우 만났는데. 님들이 좋아할 엄청난 소식을 들었음!
저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올 수 있는 좋은 떡밥이 되는 법이다.
└ 진짜임? 벚꽃 구경 나갔다가 우리 서준이 봤다고?
└ ㅇㅇ. 엄마, 아빠랑 손잡고 나왔더라. 잠깐 대화 나눈 거 인터넷에 올려도 되냐고 물어보니까. 팬들에게라면 상관없대.
└ 그래서 무슨 이야긴데? 우리가 좋아할 엄청난 소식이라면서.
└ 우리 차 배우 곧 차기작 들어간대! 그런데 이번에는 무려 영화라는 사실! 조만간 기사 뜬다던데?
└ 헐. 드디어 대형 스크린에서도 우리 차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는 건가? 대박이네. ㄷㄷ
효과는 훌륭했다.
순식간에 실시간 검색어에 ‘차서준’이라는 이름이 올라가고. 그걸 본 사람들이 궁금증을 가지고 차서준의 차기작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
*
영화 ‘금괴 소동’의 대박을 기원하는 고사 날이 밝았다.
“이야, 서준이 얼굴 뚫리겠는데?”
곁에 다가온 김정범이 농담을 던진다. 저 말이 농담이 아닌 게 아까부터 직원들과 투자사 관계자들까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거 나도 분발해야겠어. 서준이가 그렇게 열일을 해주는데. 감독님이 나한테 뭐 하고 있냐고 한마디 할지도 모르잖아.”
“그냥 나들이 갔다가 만난 팬이랑 잠깐 대화를 나눴는데. 그게 퍼진 거 같아요.”
내 대답에 김정범이 낄낄 웃기 시작했다. 그런 우리 두 사람에게 우지학 감독이 다가왔다. 그것도 함박 미소를 지은 채로.
“서준이가 주말에 아주 엄청난 일을 해냈던데?”
“헤헤. 고맙습니다. 다 우리 영화 대박 날 좋은 징조인 거 같아요.”
“이거 우리 차 배우가 영화 대박의 기운이 담긴 행운의 부적 아니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지학 감독과 김정범이 웃음을 터트린다. 어째 농담이 아닌 거 같은데.
저쪽에선 분량을 뺏긴 박주병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현재 이 자리의 주인공은 나였다. 심지어 감독도, 영화 주인공인 김정범도 아닌 나.
“서준이 너한테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영화 시작도 전에 아주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되었어. 저기 홍보팀장님도 홍보 효과가 끝내줬다고 활짝 웃잖아.”
말처럼 저쪽에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여자가 홍보팀장일 거다.
처음 내가 캐스팅되었을 때에도 비밀로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적절한 시기에 공개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잡겠다는 것.
이미 홍보팀과 이야기를 마친 뒤 던진 떡밥이었다. 주말에 있었던 팬과의 대화가 화제가 되면서. 벌써부터 기자들이 앞다투어 기사를 올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실시간 검색어에 ‘금괴 소동’이 올라갈 정도로 톡톡한 홍보 효과를 보고 있었다.
- 차 배우. 배우 차서준의 차기작은 우지학 감독의 영화?
- 우지학 감독의 새로운 영화 ‘금괴 소동’ 크랭크인 준비 완료. “유쾌한 웃음을 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
- [영화 소식] 우지학 감독과 배우 차서준의 만남. 영화 ‘금괴 소동’ 크랭크인 앞둬.
- 차서준, ‘긴급한 탈출’ 우지학 감독 신작 ‘금괴 소동’에 합류. 이번 영화는 어떤 영화?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한 관계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거기에 더해 나를 향한 시선이 뜨거워지는 건 당연한 순서.
이러다가 대박을 기원한다면서 내 코에 돈 꽂는 거 아닌지 몰라.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그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김정범이 슬쩍 나를 바라본다.
“이거 대박 기원하려면. 저기 돼지머리가 아니라 서준이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김정범의 농담 아닌 농담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하하···.”
이 사람이 진짜.
봉투 내려놓으라고.